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85화 (285/325)

#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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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이 다가오자 바로 지미가 재빨리 쿤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듀란의 에스퍼 보안관 지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환한 얼굴의 지미가 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쿤은 무표정한 얼굴로 길어지려는 지미의 말을 도중에 잘라냈다.

“긴말은 필요 없습니다.

바로 범죄자의 정보부터 보죠.”

“아휴. 네네. 그러셔야죠.”

“이쪽으로 오십시오.”

쿤과 일행이 릭을 따라가자 지미는 일행의 뒤쪽에서 쿤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음 짓던 모습이 아니라 처음에 릭과 함께 이종족들에게 경멸을 퍼붓던 그런 얼굴이었다.

“칫. 엄청난 상전 납시셨군.

세상을 좀먹는 버러지들 주제에.”

혼자 작게 중얼거린 지미는 터벅터벅 일행을 뒤따랐다.

“OK!”

지미의 정체성에 대하여 알려주는 장면을 촬영하고 지미와 쿤, 그리고 릭이 쉐도우를 찾아 여러 곳을 수사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그 장면 중에는 쿤이 여러 곳을 들쑤시자 덤벼드는 지하 조직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도 있었다.

라이칸스로프의 피를 이은 쿤과 쿤의 팀원들은 전투할 때 거대한 늑대인간으로 변하여 괴력을 발휘하는데 아마 이 장면을 통해 쿤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관객들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드디어 설아가 처음 등장하는 날이었다.

민수가 촬영하는 동안 설아는 크리스가 주도하는 OST 작업과 음악 작업을 돕고 있었다.

이 욕심 많은 아가씨는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지 크리스의 작곡 능력까지 탐내고 있었다.

자신의 촬영 날이 되어서야 촬영장에 등장한 설아는 촬영 전에 민수에게 다가와 도도한 표정으로 엄포를 놓기 시작했다.

“드디어 오늘이군요.

오빠. 각오는 단단히 하셔야 할 거예요.”

어차피 영화 끝까지 같은 편으로만 나오는데 무슨 각오를 하라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어서 민수는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살살해.

우리 같은 편이잖아.”

민수가 자신의 말을 그저 웃어넘기면서 흘려듣자 설아는 뾰로통한 얼굴로 다시 한번 경고했다.

“그게 아닐 텐데요. 오빠. 진짜 나중에 후회하지 마세요.

제가 지금 기합이 단단히 들어갔거든요.

정신 제대로 안 차리시면 크게 당할 수도 있어요.”

설아는 자신이 이번에 경고한 것으로 민수에 대한 의리(?)는 지켰다고 생각하며 탈의실로 향했다.

하지만 만약 민수가 자신의 말을 그냥 흘려들었으면 NG를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뮤비를 찍을 때도 K-G가 엄청나게 NG를 냈었으니까.

민수는 설아가 의상을 완전히 갖춰 입고 나오자 왜 그런 경고를 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와. 무슨 옷이 저래? 저거 설마 설아가 직접 고른 옷은 아니겠지?”

설아의 옷은 몸에 딱 달라붙는 짧은 블랙 미니 원피스였다.

민수로서는 조금 불만스러운 노출이었지만 솔직히 심한 수준은 아니었다.

노출이 있다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렇게 헐벗은 옷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 영화가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도 아니었으니 노출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몸에 너무 밀착해 설아의 매혹적인 몸매가 완전히 드러나는 건 좀 다른 문제였다.

거기다가 저건 단순히 의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기합이 잔뜩 들어간 설아의 나른하면서도 교태로운 표정과 눈빛 그리고 요염하면서도 요망한 몸의 움직임이었다.

하늘하늘 걸어오는 설아의 몸짓과 손끝, 발끝의 움직임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흔히 저속한 말로 걸어 다니기만 해도 염기와 색기를 줄줄 흐른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설아가 딱 그랬다.

“와…. 허허.”

민수는 자신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누가 저 여자를 23살밖에 안 먹은 어린애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분명 설아도 자신이 첫 남자라고 했었는데 혹시 자신이 속은 건 아닐까?

민수는 고개를 크게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을 애써 떨쳐버리고 촬영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것에 대한 추궁은 나중에 이어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범죄자를 찾아 계속 소탕하고 있지만, 아직 자신의 애인을 살해한 범인에 대한 정보를 전혀 얻지 못한 쉐도우는 닥터C의 권유로 이 도시의 유일한 선견자 샌디를 만나러 가게 된다.

닥터C는 자신이 그녀가 있는 곳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녀가 당신을 도와주게 만들 수는 없다고 했는데 소문을 들어보니 샌디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단편적으로 알려준다고 한다.

과연 선견자라고 불리는 샌디는 어떤 사람일까?

쉐도우는 닥터에게 들은 정보들을 떠올리며 샌디가 일한다는 재즈 바를 찾아갔다.

재즈 바 엘리자베스.

아는 사람만 안다는 선견자 샌디가 일하는 가계였다.

샌디는 평소에는 이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가끔 마음 내킬 때만 특정한 사람에게 점을 봐주곤 했다.

쉐도우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샌디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서큐버스 혼혈이라는 샌디는 명성대로 대단한 미인이었다.

아니 미인이라고 단순하게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샌디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조직의 간부들 사이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쟁탈전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전쟁이 너무 길어져 잠시 휴전하고 만인의 꽃으로 내버려 뒀다는 소문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거기다 목소리는 또 어떤가?

그녀는 이미 인간의 감정을 거의 버렸다고 생각했던 자신마저 혹할 정도로 매력적이고 치명적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오늘 이곳을 찾은 것은 한낱 저속한 욕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노래를 마친 샌디는 손에 한잔의 위스키를 쥐어 들고 곧장 이곳으로 걸어왔다.

자신이 접근하기도 전에 자신에게 웃으며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쉐도우도 잠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헤~ 귀여운 오빠네.

날 찾아온 거지?”

샌디의 말에 쉐도우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런 상황은 자신이 예상했던 상황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샌디 맞나?

쉐도우는 바로 상대의 정체부터 확인했다.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경계심이 생겨난 것이었다.

쉐도우는 왠지 샌디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응. 맞아. 귀여운 오빠.

샌디 E.T.

이 바닥에서 샌디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나 하나뿐이지.

선견자 샌디. 아는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러.”

쉐도우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샌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대의 정체를 확신하기 위해 넌지시 떠보듯 물었다.

“서큐버스 일족은 특정한 것을 이름으로 삼고 대대로 전승한다던데.

네 이름은 왜 샌디지?”

샌디는 쉐도우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헤… 그런 것도 알고 있었어?

그건 우리 일족에게만 전해지는 이야기인데.

우린 사람의 감정을 이름으로 삼지.

내 원래 이름은 새드니스(Sadness) 슬픔이야.

샌디는 그냥 내가 지은 이름이고.

이름이 슬픔이라니 그건 너무 궁상맞잖아?”

닥터가 설명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샌디의 말에 쉐도우는 이 여자가 진짜 선견자인 샌디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슬픔이 싫다고 하더니 이름이 왜 샌디지? 어감이 거의 비슷하잖아?

나 같으면 아예 다른 이름을 지었을 거 같은데.”

쉐도우의 물음에 샌디는 생글생글 웃으며 쉐도우에게 다가왔다.

얼굴과 얼굴이 거의 밀접할 때까지 다가온 샌디는 쉐도우의 귀에 작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쉐도우는 귓가를 간지럽히는 샌디의 목소리에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샌디야 말로 날 정확하게 표현하는 단어라서 그래.

난 완벽한 에스 라인(S)의 몸매와 폭발적인 애플 힙(A) 그리고 (N) 매혹적인 D컵(D) 가슴을 자랑하는 우아한 숙녀거든?

게다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이 모습을 테니…. 영원한 젊음(Youth)까지 가진 환상적인 여자라고 할 수 있겠지. 어때? 탐나지 않아?”

끼워 맞춘듯한 샌디의 말에 쉐도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참 근사한 여성이긴 했다.

만약 자신에게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면 바로 대쉬할 정도로 말이다.

“하… 어이없군. 그럼 뒤에 E.T. 는 뭐지?

그것도 무슨 다른 뜻이 숨어있나?”

쉐도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샌디는 몸을 더 밀착해 혀끝으로 쉐도우의 귓가를 살짝 핥았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쉐도우는 놀라 움찔하면서 몸을 급하게 뒤로 물렀다.

쉐도우가 당황한 눈으로 샌디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웃으며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건 그냥 가문 명이야. 엘리자베스 토너.

그런데 난 에로틱 텅 (Erotic Tongue)이라고 부르고 싶어? 어때? 괜찮지?”

샌디는 당황한 쉐도우에게 살살 눈웃음을 치며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 걸 물으러 온 건 아닐 텐데.

당신 지금 바쁜 몸이잖아. 쉐도우.”

샌디가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지적하자 쉐도우도 정신을 차리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의 의도도 정확히 알기 전에 자신의 정체부터 들킨 건 정말 최악이었다.

그리고 쉐도우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샌디는 자신의 할 말만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아.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지.

일주일 후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남은 이야기는 그때 하는 게 어때?

그리고 당신에게 충고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만약 당신이 위험할 때 구멍이 3개 있다면 바로세 번째 구멍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당신을 도와줄 귀인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럼 다음에 만날 때까지~ 안녕~”

쉐도우는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손을 흔들면서 떠나는 샌디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말 정신을 쏙 빼놓는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

촬영이 끝나고 민수는 설아에게 다가가 가볍게 알밤을 때렸다.

“와. 진짜 당황했잖아? 너 진짜 이럴 거야?”

“헤헤. 괜찮지 않았어요? 나름 혼신을 기울인 애드립이었는데요.”

민수는 자신에게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배시시 웃는 설아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

설아가 민수의 귓불을 살짝 핥은 건 사전에 논의하지 않은 그녀의 애드립이었다.

원래 대사는 그냥 가문 명이라고 하면서 쉐도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헤헤. 그래서 오빠가 당황하는 모습이 제대로 카메라에 담겼잖아요.

이 정도는 해야 쉐도우도 당황할 만했구나. 하면서 사람들한테 공감을 살 수 있을 거예요.

겨우 자신의 이름이 밝혀졌다고 당황하는 건 쉐도우 답지 않으니까요.”

아마 당황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예쁘게 담기긴 했을 것이다.

진짜 당황했으니 말이다.

배역인 쉐도우가 당황한 게 아니라 배우인 민수가 당황한 게 좀 문제이긴 했지만.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애드립은 이미 태원하고 준수에게 허락을 받은 애드립이란다.

민수는 실시간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담고 싶어서 비밀로 했다는 태원의 말에 이게 참, 말인지 방구인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역시 이건 그냥 민수의 NG를 기대하던 악당들(?)이 작당한 작은 음모였다.

이 장면을 촬영할 때 다른 배우들도 다 자신의 반응만 유심히 살펴보며 당황하는 모습에 웃음 지었다니 민수가 자신의 한 몸 희생해서 여러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긴 했다.

긴 영화 촬영 동안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없으면 아마 촬영이 더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와. 그 와중에 NG를 안 내다니.

진짜 강적이네.

나라면 당황해서 NG를 냈을 텐데.

덕분에 스티븐한테 10달러 잃었어.”

태준과 스티븐은 무려 내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민수는 자신에게 찾아와 투덜거리는 태준을 보며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도 수연 선배랑 연기할 때 수연 선배가 그랬으면 당황은 했겠지만, NG까지 내지는 않을걸.”

“오호….. 과연.

저 정도는 익숙하단 말이지?”

민수의 말에 태준도 바로 이해가 됐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민수의 실수였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일 뿐이지만 상대가 태준임을 생각하고 말했어야 했다.

“와. 저게 익숙할 정도라니.

우리 정 배우. 이제 진짜 우리 식구가 되겠네?

이제 와서 우리 귀여운 설아와 헤어진다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니 평소에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주제에 이럴 때만 귀여운 설아라는 태준의 이중적인 태도에 민수는 할 말을 잃었지만 그래도 이왕 들킨 거 한 번쯤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우선 설아가 나이를 좀 더 먹을 때까지는 생각해 봐야겠지만 난 쉽게 헤어질 생각 없어.

설아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고.”

“오호. 남자네.”

당당하게 말하는 민수의 태도에 태준은 기꺼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야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만 역시 난관은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설아를 자신의 딸처럼 생각하며 아끼는 어른들.

건물의 보안을 책임지는 박춘섭 어르신도 그런 어르신 중 하나였다.

“후후. 마음에 들어.

그런데 정 배우 조심하라고.

생각보다 난관이 많아.

회사에 아버지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거든.

뭐 나중에 알게 되겠지. 큭큭.”

민수는 태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내막을 잘 알고 있는 태준은 나중에 민수가 겪을 곤란이 눈에 선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오늘도 촬영장에서의 하루가 또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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