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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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윤곽이 잡혀가는 배우들과 시나리오에 비해 제작진을 구성하는 윤 대표는 조금 난처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윤 대표의 전화를 받고 윤 엔터를 찾은 찬진은 윤 대표가 내미는 시나리오와 기획서를 천천히 읽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글쎄. 이건 자신 없는데.
그런데 이건 나 아닌 한국에 어떤 감독을 데려다 놔도 자신 있다고 할 사람이 없을 거야.
있다면 그건 완전 사기꾼이겠지.
한국에서는 이렇게 돈만 엄청 들어가는 스타일의 영화는 제작하지 않잖아?
이거 예산이 얼마라고?”
“우선 추정하길 900억 정도 잡고 있는데.
어쩌면 그 이상이고.”
윤 대표의 말에 찬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그걸로는 턱도 없을 텐데.
이거 제대로 맡기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들 거야.”
찬진은 굳은 표정으로 집게손가락을 한 개 펴서 윤 대표에게 내밀었는데 윤 대표는 대체 무슨 짓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뭐야? 그게. 얼마나 든다는 거야?”
“에이, 답답한 녀석. 손가락 1개 1억 불은 든단 말이야.”
“뭐? 1200억이나 든다고? 허….”
깜짝 놀라는 윤 대표의 모습에 찬진은 뭘 그리 놀라냐는 듯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 미국 M 사의 히어로 물은 제작비가 2억 불이 넘어가는데.
그나마 이게 등장인물들의 CG 처리가 그런 영화 보다는 간단해서 그 정도밖에 안 드는 거야.
애당초 CG 때려 박는 건 그거나 이거나 마찬가지거든.
싼 애들 쓴다면야 더 싸게 갈 수는 있겠지.
그런데 내가 전에도 말했지?
이 바닥에서는 돈이 곧 퀄리티라고.”
윤 대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CG로 영화를 찍는 시대에 배우로 활동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신보다는 찬진이 이 방면에서는 능통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아마 찬진이 측정한 예산이 더 정확하겠지.
아무래도 자신이 CG를 너무 무시한 거 같았다.
“이거 각 편당 1억 불이라는 것까지 들으면 완전 넘어 가겠구만.”
이어지는 찬진의 말에 윤 대표는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만약 그렇다면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한국 감독 누구를 데려다 놓아도 자신 없어야 정상이라는 말이 이제 이해가 되었다.
“그러면 이건 포기할 수 밖에 없어.
흠…. 어쩌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군.”
윤 대표가 고민하자 찬진은 조심스럽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물론 저번에 우리가 맡겼던 찰리 스튜디오에 전체를 다 맡긴다면 그 정도가 들긴 하겠지.
거기는 가장 비싼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총괄을 그쪽에 두고 세부적인 부분을 한국에서 하청 맡기면 많이 절약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저번에 여기저기 알아보면서 많이 느낀 건데.
우리나라에 생각보다 괜찮은 CG 제작자가 많더라고.
아니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섬세한 노가다 쪽으론 솔직히 우리나라가 최고였어.
애들이 그런 작업만 하다 보니 창의력이 좀 떨어지는 면이 있긴 했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전체적인 큰 그림을 찰리에게 맡기고 세세한 부분을 우리나라 애들 좀 많이 써서 만들면 분명히 절약할 수 있을 거야.”
“후…. 그렇게 하면 대충 얼마나 들 거 같아?”
“글쎄…. 진짜 많이 줄이면 반 정도는 줄일 수 있을 거 같은데.
기본적으로 미국이랑 우리나라는 임금 체계 자체가 틀리니….
뭐 쥐어짜면 더 줄일 수도 있긴 한데 그래서야 상대가 기분 좋게 작업을 해 주겠어?”
“아니아니. 그래선 안 되지.
애들 임금으로 돈 아껴서 어디다 쓰겠다고.
사람들 쓸 때는 임금을 넉넉하게 줘야 서로 뒤탈이 없는 거야.”
“그래. 그렇지.
역시 강철이는 말이 통한다니까.
그런데 할리우드 최고급 스튜디오에 의뢰하는 비용의 반만 줘도 우리나라 애들한테는 상상도 못 한 돈일 거야.
그리고 섬세한 노가다 작업은 우리나라 애들이 더 섬세하게 잘하니까 서로 좋은 거지.”
“흠…..”
“그래서 결론은 내가 총괄 감독을 하지는 못한다는 거야.
지금 우리 쪽 인사 중에 이 방면에서 나보다 더 발 넓은 사람이 없잖아.
그러니깐 난 찰리 스튜디오랑 한국이랑 오가면서 CG 작업에 대해서만 맡도록 할게.
그게 나을 거 같은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직 확실히 제작비가 얼마나 들지 알 수 없는 상황.
찬진이 부지런히 움직여서 줄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만약 그게 안 된다면 1200억 이상을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감독도 아직 미 확정.
도대체 답이 보이지 않았다.
“우선 이렇게 하자고.
총감독은 그냥 태원이한테 맡겨.
오히려 CG 쪽을 빼면 그냥 보통 영화보다 촬영이 쉬울걸.
대신 촬영 감독은 이 방면에 경험이 많은 외국 촬영감독을 찾아봐.
그리고 난 그날그날 촬영분을 받아 태원이랑 같이 편집하고 CG 작업 전체를 통제할 테니까.”
한 사람이 전체를 어우를 수 없으니 분담을 하자는 의견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많은 촬영 감독을 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어쩌면 그보다 예산이 더 급할 수도 있었다.
예산이 없으면 어차피 영화도 없으니 나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윤 대표는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다른 곳에서 투자를 받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민수는 액션 연기가 필요한 배우들과 액션 스쿨을 오가며 액션 연기를 가다듬고 있었다.
설아와 태준 그리고 은우.
이 셋은 확실히 액션 연기 연습이 필요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연기 교육과 스턴트 배우의 조달은 투지 체육관이 맡았다.
“용의 울음”에서 액션 연기를 총괄했던 민 단장은 윤 엔터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하. 내게 너랑 또다시 손발을 맞출 기회가 오다니.
올해는 운수가 트이려나 보구나.”
“용의 울음”의 대성공으로 한국에서 알아주는 액션 스쿨이 된 투지 체육관의 민 단장은 오랜만에 만난 민수와 감격의 포옹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렇게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도 잠시.
민 단장은 은우와 태준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 친구들은 좀 많이 배워야겠는데.
한 친구는 기본은 잡혀 있는데 뭔가 좀 엉성하고.
한 친구는 몸놀림은 제법 괜찮지만, 액션 연기를 전혀 모르고.
웬만한 영화라면 이 정도로 그냥 비빌 만은 한데.
네가 찍는 영화가 그저 그런 영화는 아닐 거 아냐?
이거 시간이 촉박하겠어.”
액션 연기 경험은 있지만, 무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태준이 전자.
태권도와 합기도 유단자였지만 액션 연기 경험이 없던 은우가 후자였다.
하지만 둘 다 특별 교육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에 비해 설아는 이번 영화에서 그렇게 많은 액션 연기가 필요한 배역은 아니었다.
액션은 어느 정도 기본만 받쳐주면 되고 나머지 부분은…..
“후~ 오빠 이거 괜찮았어요? 짜릿한 기분이 들어야 하는데요.”
설아는 민수의 귓가에 뜨겁게 숨을 불어 넣으며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설아의 전투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설정상 서큐버스 혼혈이라는 설아는 상대에 귓가에 마력(?)을 불어 넣어 매혹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서큐버스의 혼혈이라.
작품에서 설아가 어떤 분위기에서 어떤 의상을 입고 연기할지 벌써 눈에 선했다.
물론 청불로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아주 심한 노출은 없겠지만 민수로서는 벌써 속이 좀 쓰렸다.
그리고 배우들이 액션 연기 및 연기에 신경 쓰던 며칠이 지나고 민수는 수정에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뭐? 투자? 팬클럽에서?”
“네. 배우 오빠.
지금 팬들은 오빠가 “에이전트 K” 쪽에 들어간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쪽 투자자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하니 팬들이 자금을 모으고 있나 봐요.
이번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요.
저번에 제가 말했었죠.
그때 그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니까요”
“하… 뭐 민수 코인이니 우량주 민수니 뭐니 하는 말이 잠깐 돌았었지?
이 사람들이 진짜….”
민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껏해야 5000명뿐인 팬클럽에서 돈을 모아봐야 얼마나 모으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은근히 들리는 이야기로는 자신이 가볍게 생각했던 이 영화가 1000억이 넘게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하니 큰일은 큰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만약 팬클럽의 투자를 받게 된다면 도움이 좀 될 수도 모르겠다.
얼마가 모일지는 모르겠지만 십시일반이라고 했으니 도움이 전혀 안 되진 않을 것이다.
“원래 그런 것도 있지 않나요?
공개적으로 영화 투자자를 모으는 거요.”
“아. 크라우드 펀딩(자금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가 온라인 플랫폼 등을 통해 불특정 다수 대중에게 자금을 모으는 방식)으로 투자자 모으는 거?
아주 드물긴 하지만 그런 경우도 있긴 하지.
흠. 이건 윤 대표님하고 상의를 해보긴 해야겠네.
하지만 팬들의 투자금을 1순위 보장으로 돌린다며 문제가 없긴 할 거야.
우리가 자금이 필요한 것은 맞으니까 우선 팬클럽 쪽에 생각이 있는지만 알아볼래?”
말은 저렇게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민수를 보며 수정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팬들을 무시하고 있나 본데 나중에 액수를 듣고 저 오빠가 기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수정이 모금을 시작한 지 며칠 후.
민수는 수정의 예언(?)대로 깜짝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 얼마라고?”
“네. 지금까지 모금된 금액이 150억이라네요.
이걸 그대로 윤 엔터 쪽에 투자하러 오신다는데요.
한 분이 대표로 윤 대표님하고 계약하신 다고요.”
“…..”
수정은 민수의 놀란 얼굴을 보고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감히 [민수네]의 저력을 무시하다니. 이 오빠는 좀 당해봐야 했다.
“우리 팬클럽이 5천 명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그 돈이 나와?
5천 명이 평균적으로 300만 원은 내야 그 돈이 되는 거잖아?”
민수의 놀란 얼굴을 즐기며 수정이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원래부터 투자하고 싶어 하시는 분이 있다고요.
“리딕 파이낸셜”이라고 원래 영화에도 가끔 투자하는 회사의 대표님인데 그분이 투자하신 게 100억.
그리고 그 친구인 큰손 몇 분이 투자한 게 40억.
나머지는 사람들이 순수하게 모은 돈 10억.
이렇게 합계 150억 되시겠습니다.”
5천 명이 10억을 모았으면 평균적으로 20만 원 정도.
응원하는 마음으로 투자한다고 치면 충분히 낼 수 있는 돈이긴 했다.
“하.. 이건 좀 상황이 다른데.
그 정도면 그 자체로 하나의 투자자가 되는 거잖아?
우리 회사가 영화를 제작할 때 투자를 받지 않는 이유가 있는 건데.
그건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가 없겠다.
우선 그분이랑 대표님을 만나게 해 드려야겠어.
만약 괜찮으면 대표님이 받으실 테고 아니다 싶으면 거절하시겠지.”
영화에 투자자를 받으면 아무래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윤 대표가 투자자를 받지 않고 굳이 자신의 자금으로 영화를 만든 건 그런 일체의 간섭을 전부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아무리 투자금이 급한 상황이라고 해도 아무나 받을 수도 없는 거였다.
게다가 100억이라는 큰돈.
그 정도면 전문적으로 투자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성급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민수는 모든 일을 윤 대표에게 미루게 되었다.
다행히 회사를 찾아온 리딕 파이낸셜의 대표 주영민은 윤 엔터에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무조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는 입장.
그리고 영화가 개봉하면 가족들이랑 같이 볼 수 있게 시사회 티켓 4장을 원할 뿐이었다.
윤 대표는 최우선으로 금액을 보전해 주는 조건으로 영화에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계약서를 받았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투자금을 받았다.
외부에서 금액이 수혈되자 자금 부분은 좀 더 원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윤 엔터의 자금 350억. 민수의 개인 자금 400억. 그리고 외부 투자 150억.
그리고 다른 배우들이 모아서 100억을 만들고 아리 재단이 유동자산을 처분해 200억을 영화 제작 도중에 투입하기로 했다.
이렇게 모인 돈이 총 1200억.
결국 찬진이 예상했던 자금을 얼추 모았지만 이래서야 너무 빡빡했다.
영화의 홍보에도 많은 돈이 들어갈 테고 CG란 게 어떤 식으로 돈을 더 잡아먹을 지 몰랐다.
윤 대표는 이 상황에서 여유자금 200억 정도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자신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대작을 만들겠다고 다른 영화 한 편을 만들 자금을 여유자금이라고 표현하다니.
자신도 기가 막혔다.
하지만 당장 돈 나올 구석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외부에서 따로 투자자를 구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돈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충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