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79화 (279/325)

# 279

6

대표실을 나서며 민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영화 제작에 대한 허락을 받을 수 있어서였다.

영화에 투자될 자금의 규모를 생각하면 윤 대표가 통 크게 허락해 준 게 정말 다행스러웠다.

민수가 드림 픽처스와 진룡에게 쌓인 감정 때문에 그들을 한군데 모아 저격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꾀를 썼다.

그리고 윤 대표는 민수가 사전에 이야기하지 않은 바람에 헛심을 좀 썼다.

민수가 생각에는 윤 대표와 민 여사가 이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게 옳았다.

물론 윤 대표가 진심으로 김 사장과 협상하느라 며칠 동안 스트레스를 좀 받기는 했을 것이다.

만약 민수가 사전에 진룡의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드림 픽처스와 협상하는 척 해달라고 했으면 윤 대표는 스트레스받지 않고 그 발군의 연기력으로 지금과 같은 결과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훗날 묘한 찝찝함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히 며칠 동안 스트레스를 받는 것과 한동안 찝찝함을 느끼는 것.

민수는 자신이 윤 대표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나쁜 일 일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자신이 존경하는 윤 대표가 이런 일에 조금이라도 연루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을 뿐.

차라리 그냥 자신이 좀 더 괘씸한 녀석이 되는 게 마음 편했다.

“하… 초반은 그럭저럭 잘 넘어갔네.

이제 정작 중요한 건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드는 것이려나.

캐스팅도 중요할 테고 말이야.

아무래도 영화 제작사가 아니다 보니 캐스팅도 만만치는 않겠지?”

소속사에서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소속사 배우들로 중요한 배역을 다 채우고 시작했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등장인물이 많은 편이었고 드라마 스케줄 때문에 영화에 참여해 주지 못하는 배우들도 있어서 모든 배역을 다 채우기가 힘들어 보였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외부 배우를 써야 할 텐데 아무리 윤 대표라도 젊은 배우를 쉽게 공수해 올 수 있을지는 좀 걱정되었다.

특히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악역은 아무래도 높은 수준의 연기력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배우를 섭외하는 일 자체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마음에 드는 좋은 배우를 섭외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였다.

윤 대표가 영화 제작을 결정하자 소속사는 비상 체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여러 편의 영화로 어느 정도 익숙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한국이 아니라 중국에서 촬영할 가능성이 컸으니 소속사에서도 준비할 일이 많았다.

“음… 결국 그렇게 되었나요?

이게 그 대본이란 거죠?

제가 맡을 역할이….. 그러니까 선견자(Seer)네요.”

“사실상 여주인공이긴 하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두 남자 주인공에 비하면 비중이 좀 적긴 해.”

“이 정도면 비중은 충분해 보이는데, 캐릭터 성격은 좀 바꿔 달라고 해야겠어요.

이번엔 제가 제일 잘하는 거로 하고 싶어요.”

민수는 의문에 찬 눈으로 설아를 바라보았다.

설아가 가장 잘하는 것이라.

저 선견자라는 캐릭터는 평소에는 재즈 바에서 노래를 부르고 일정 시간이 되면 상대의 미래를 예지해 주는 그런 캐릭터였다.

그래서 설아에게 충분히 어울릴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설아는 민수의 표정에서 의구심이 느껴지자 요망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매혹적이고 도발적인 캐릭터요.

예전에는 너무 이르다고 했었지만…. 제 생각에는 딱 지금인 거 같은데요.

저도 배우로서 시선 집중 한 번 정도는 받아 봐야죠.

그게 오빠 영화면 더 좋고요.”

“음…..”

사실 준수도 저 캐릭터를 팜므파탈 캐릭터로 구상하고 있었는데 민수가 슬쩍 부탁해 변경한 것이었다.

그런데 설아가 준수에게 가서 저렇게 이야기한다면 민수 입장에서는 조금 곤란하긴 했다.

설아는 민수가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궁금해하던 설아는 이어지는 민수의 말에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좀 바꿔 달라고 한 거였거든.

꼭 그렇게 해야겠어?

그런 건…”

“좀 더 나중에 할 수 있다. 어차피 그런 배역은 많이 들어올 테니까.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었죠?

전 그 나중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해요.

후훗. 기대하셔도 좋아요.

전 벌써 기대가 되는데 어쩌면 좋죠?”

민수는 설아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어쩌겠는가. 본인이 저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민수는 그저 한숨을 내 쉴 뿐이었다.

이제 설아의 도발 본능(?)을 억누를 방법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저쪽에서 수연과 태준이 다가왔다.

태준은 일본 스케줄을 모두 마치고 어제 돌아왔다고 들었고, 수연은 이제 드라마 준비에 한창이었는데 왠지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지 조금 퉁명스러워 보였다.

“야이. 민수 나쁜 녀석아!

지금 꼭 히어로 물을 찍어야 했어!?”

수연은 오자마자 민수를 타박했다.

그리고 태준은 그런 수연을 보며 크게 웃고 있었는데 민수로서는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다.

자신이 영화를 찍는다는 소식을 듣고 온 모양인데 왜 저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하. 지금 찍으면 드라마 때문에 수연이가 영화에 못 들어가잖아.

수연이가 히어로 물 쪽에 로망이 좀 있는 모양이야.

한국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는 영화니까 저렇게 아쉬워하는 거고.”

냉정하지 못한 수연 대신에 태준이 수연의 입장을 설명했는데 설명을 들은 민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히어로 물에 심취했던 수연.

아주 어렸을 때는 많은 어린아이가 울고 웃었던 “후뢰쉬 맨”부터 “바이오 맨”, “파워 레인저” 등의 특촬 전대 물을.

그리고 나이가 좀 든 후에는 “슈퍼맨”이나 “배트맨”, “스파이더맨” 그리고 노블사의 히어로 물까지.

보기와는 달리 수연이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부류라는 설명이었는데 그렇다면 확실히 조금 아쉬울 만했다.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로 히어로 물을 찍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니까.

어쩌면 수연 입장에서는 자신이 찍을 수 있는 유일한 히어로 물이 그야말로 물 건너간 거라고 볼 수 있었다.

“음…. 하긴 제 주변에도 있었죠.

여자아이 중에 이상하게 특촬 전대 물을 좋아하는 아이가요.

전대 물에서도 핑크나 엘로우는 거의 여자였잖아요?

수연 선배도 핑크나 엘로우를 전담하는 그런 쪽이었나요?”

민수가 웃으면서 묻자 수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전대 물은 무조건 레드지.

난 언제나 레드였다고!”

민수는 취향이 확고한 듯한 수연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어릴 적에 수연에게 레드의 자리를 뺏기고 억울해했을 다른 남자 친구에게 작게 애도를 표했다.

그 시절에 여자한테 레드를 양보하다니, 수연에게 두들겨 맞지 않고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남자도 분명 폭력의 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리라.

원래 어렸을 때는 남자보다 여자의 힘이 센 경우가 많았으니까.

민수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웃고 있자 수연은 민수에게 슬쩍 다가와 헤드록을 걸었다.

“요 녀석이! 난 지금 심각한데 그렇게 웃고만 있다니.

요놈. 요놈.”

“악. 선배. 그만! 악”

그렇게 수연에게 잠시 응징을 당한 민수는 겨우 수연을 뿌리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와. 선배 진짜…..”

민수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젓자 수연은 도도하게 콧대를 세우더니 민수에게 한번 봐줬다고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수연이 민수에게 드잡이질 하는 걸 웃으며 바라보던 태준은 슬쩍 민수에게 다가갔다.

“정 배우. 그 영화에 나도 들어가야겠는데 말이야.”

민수는 태준의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 네가?”

“응. 아무래도 러닝 개런티가 아니면 100억을 버는 건 무리겠어.

어때? 나랑 같이 찍는 건.”

“그놈의 100억 드립은….”

장난치듯 100억을 들먹이는 태준을 보며 실소를 지은 민수는 잠시 말을 아꼈다.

윤 엔터에서 가장 믿을 만한 배우인 태준.

자신이라고 태준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액션 영화였고 태준이 자신이나 스티븐처럼 액션에 도가 튼 배우들이랑 수준을 맞추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연 정도라면 몰라도 주연이면 정말 그 정도는 해줘야 했으니까.

자신이 주연으로 태준보다 스티븐을 먼저 생각한 이유는 단순히 스티븐이 할리우드 스타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민수가 잠시 말을 아끼고 있자 태준은 웃으며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하하. 이 친구 참…

나도 내 주제는 안다고.

내가 너나 스티븐 아니면 저 옆에 설아처럼 그런 괴물 같은 능력자는 아니니까.

음… 내가 원하는 건 “지미”역이야.

이건 아직 할 사람이 없을 거 같은데.

캬~요즘은 은근히 악역이 끌린다니까.”

“….”지미”라…”

부패 형사 지미.

민수가 처음부터 걱정했던 배역이었다.

악역이면서도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생각보다 높은 연기력을 요구하는 배역.

적어도 주연급으로 연기해 주는 연기자가 필요한 배역이었다.

그런 배역을 태준이 소화해 준다면 정말 고맙긴 하겠지만.

“그런데 이거 악역 조연이잖아.

윤 배우가 하기에는 좀 그런 거 같은데.

이제 1800만 영화도 찍었는데 정말 대상을 한번 노려보려면 기다렸다가 큰 작품에 주연으로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태준을 악역 조연으로 쓴다니.

솔직히 너무 급이 맞지 않았다.

민수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였다.

태준은 악역이 좀 끌린다고 했지만 태준이라면 정말 극 전체를 뒤흔드는 최종 악역이 아니라면 눈길도 주지 않을 만한 그런 위치의 배우였다.

그러니 만약 이 영화에 들어온다면 그건 아마 자신과의 의리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에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기껏해야 영화 두 편이잖아.

이왕 먹여주는 거 제대로 한번 먹여주는 것도 좋고 말이야.

또 정 배우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니까 무조건 확실한 게 좋잖아.”

이번 사고는 태준에게도 의미가 작지 않았다.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키는 진룡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영화라면 자신도 한몫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민수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한 영화라면 자신도 한 손 거들 의향이 있었다.

태준은 민수와 같이 영화를 찍는 것에 배역의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게 왠지 재미있을 거 같단 말이지.

어때? 이 정도 이유면 충분하지 않겠어?”

민수는 태준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가 자기 마음에 들고 재미있어 보이는 연기를 한다.

솔직히 이것이 윤 엔터의 모토이긴 했다.

그리고 태준은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는 배우였고.

“좋아. 그런 생각이면 환영이지.

그럼 부탁 좀 할게.

솔직히 그 배역을 누구에게 부탁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긴 했거든.”

태준까지 민수의 영화에 합류하자 수연의 표정은 더 뾰로통해졌다.

스케줄 때문에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자의 울분이리라.

태준 이후에도 배우들의 합류는 계속되었다.

휴식 중인 은우가 합류하고 소희까지 드라마 촬영이 끝나는 순간 합류하기로 했다.

아마 소희는 2편의 중요 악역 중 하나를 담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의외의 일은 바로 강환의 합류였다.

“아. 씨 망했어.

다시 돈을 벌어야 해. 하….”

이번에도 예술의 전당 공연에서 고배를 마신 강환은 다시 다음 공연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때맞춰 영화를 준비하는 윤 대표에게 자신과 극단 배우들이 합류할 것을 전달했다.

강환은 이번 영화에서 1편의 주요 악역을 연기하기로 했다.

“오호. 이거 대부 느낌이 물씬 나는 배역이네.

나한테 딱 맞은걸. 흐흐.”

항상 가벼운 태도로 일관하는 자신에게 그런 무게감 있는 배역이 딱 맞는다는 강환이 뻔뻔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강환의 연기력만은 믿음직하기 그지없었다.

배역이 점점 차 들어가자 민수는 준수에게 배역의 캐스팅 상황을 알려주었다.

준수는 배우들의 면모를 듣고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호…. 지미 역에 태준 형님이라고요?

그럼 힘 좀 더 줘도 되겠네요.

악역이라 주연급 배우들이 피할 거 같아서 힘 엄청 뺏는데 잘됐네요.”

“오. 그게 되겠어?”

“물론이죠.

원래 처음에는 그런 찌질한 배역이 아니었거든요.

좋아요.”

준수는 웃으며 시나리오를 점점 처음에 자신이 생각한 데로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정된 시나리오에서는 설아와 태준의 배역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태준이야 그렇다 치지만 설아의 바뀐 설정에 민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야, 이거…..”

평소에 민수의 말에 껌뻑 죽는 준수도 이런 부분에서는 단호했다.

“후후. 그 정도는 돼야 팜므파탈이죠.

배경도 배경이거니와 저런 캐릭터가 하나 정도는 있어 줘야 영화의 분위기가 살아요.

그래야 러브라인도 더 매혹적으로 다가오고요.

그리고 형님이랑 연기할 때 저러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할 텐데요.”

준수의 지적에 민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매혹적인 연기는 자신이랑 같이 있을 때 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하다는 말은 민수의 정곡을 정확하게 찌른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