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74화 (274/325)

# 274

6

민수는 다음날 대표실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며칠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조금 핼쑥해진 윤 대표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드라마가 결국 제작 중단되었다는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리고 이어진 민 여사의 이야기.

드라마가 완전히 엎어졌다는 윤 대표의 말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민 여사가 전달해준 사건의 뒷이야기는 정말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드라마에 네거티브를 주기 위해 소동을 일으킬 생각이었는데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겹치면서 그렇게 큰 화재가 일어났다는…..”

민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화재가 커진 건 우연이라고 쳐도 남의 촬영장에서 그런 분탕질을 치려고 했던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어쨌든 그래서 직접 사주한 놈은 잡았는데 이놈이 누구한테 지시를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어.

지시받은 것도 고작 대포폰 하나뿐이고 자신은 그냥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 했다는 말밖에 하지 않으니…..

우리 쪽에서는 진룡의 누군가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심증만 있고 물증은 전혀 없는 셈이야.”

“따지고 보면 그 사고도 결국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만약 주연 배우가 제가 아니었으면 저들이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윤 대표는 조금 허망한 표정으로 말하는 민수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었다.

민수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왜 네 책임이야?

너 말고 지금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수두룩하거늘.

직원 관리를 소홀히 한 제작사, 세트장 관리에 무신경했던 소유주, 부실한 건물을 만든 시공사, 그리고 확인도 하지 않고 그런 건축물을 허가해준 주무 관청에다가 실제로 불을 지른 그 양아치 놈들까지.

그 정도로 문제가 있는 세트장이면 어차피 언젠가는 터질 문제였어.

심지어 소방차 진입로를 막고 있던 몰상식한 인간들까지 있었다지?

어떠냐? 이래도 이게 네 책임 같으냐?”

“그래. 민수야. 넌 그냥 피해자일 뿐이야.”

민수도 윤 대표와 민 여사의 말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정도로 문제가 있는 세트장이면 언젠가 사고가 터지긴 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기억 속에 그런 큰 화재 사고가 없었던 거로 봐서는 이렇게 크게 터지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만약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어쨌든 드라마는 완전히 물 건너간 상황이니 넌 좀 더 쉬면서 마음부터 추스르고 나중에 작품 생각이 나면 그때 다시 활동하도록 하자.”

윤 대표는 민수에게 우선 휴식을 당부했다.

“그건 생각 좀 해 볼게요. 대표님.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고 불을 냈다면서요?”

이번에는 민 여사가 대답했다.

“그 사주한 놈은 자기가 알아서 자수하러 갈 거야.

감옥에 갔다가 나온 후에도 이 바닥에 발붙이기는 힘들 거고.

그러면 자연적으로 그 불 낸 놈도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텐데.

다만 진짜 위에서 지시를 내린 놈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정확히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놈이 진짜 문제인데 말이야.”

“아…. 그래요?”

“왜? 혹시 한번 만나보려고 그러느냐?

화풀이라도 하겠다는 거면 말리고 싶구나.

이미 완전히 떡이 되어 버렸으니.”

“떡이요?”

민수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 대표가 혀를 차며 이야기하자 민 여사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자신은 죄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제가 지시한 게 아니에요.

놈이 도망치다가 직원들한테 잡혀서 그렇게 된 거지.

그놈 잡으려고 며칠간 잠복한 것도 짜증 났을 텐데 심지어 설아가 있는 곳 근처에 불을 지르라고 사주한 놈이니 직원들이 그걸 가만히 두겠어요?

설아가 어떤 아이인데.”

설아 이야기가 나오자 내심 찔리는 구석이 있던 민수도, 너무 과한 손속이라고 은근히 민 여사를 타박하던 윤 대표도 입을 닫고 말았다.

민 여사는 조금 민망한 표정이긴 하지만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그녀의 얼굴은 자신이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상대를 두들겨준 직원들의 행동에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티도 잘 안 나요.

우리 애들이 완전 프로라고요.

그때 그 애송이들 때릴 때 너도 봤지?

아, 그리고 그때 그 애송이가 이번에 한 건 했단다.

그놈 잡은 게 바로 그 애송이 녀석이거든.”

이번에는 민수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잊고 있던 그 친구들 중 하나가 아직 아리 재단에 몸담고 있는 것도 의외였는데 그런 큰일을 해주다니.

역시 사람 일은 모른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 화재가 방화에 가깝다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아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대단하긴 했다.

직원들이 나서서 방화를 저지른 놈과 사주한 놈까지 알아내고 심지어 직접 잡아내기까지 하다니.

그리고 그놈이 자수까지 하게 만들었다면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협박과 강압이 뒤따르지 않았을까?

하지만 윤 대표의 말대로 진짜 이 일을 꾸민 누군가는 건재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분명 민 여사의 설명대로 진룡의 누군가일 가능성이 컸다.

민수도 예전에 루머 사건 이후에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던 진룡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룡에 대해서는 우리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마.

그러니 넌 우선 마음을 추스르는 데 집중하고, 다음 작품에 대해서만 생각했으면 좋겠구나.”

민수는 우선 윤 대표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냥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정말 진지하게 한번 고민해 볼 생각이었으니까 말이다.

민수가 대표실을 나서자 윤 대표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미친 인간들 몇 때문에 피곤하기가 이를 데가 없군.

아무래도 진룡은 진짜 대표가 바뀌던지, 한국에서 사라지든지 해야 할 거 같아.

애당초 제작사 쪽에서 연예 기획사에 대립각을 세우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게다가 이런 미친 짓까지 벌일 줄이야.

정말 꼬여도 너무 꼬였어.”

“진룡에 부당한 대우를 받은 곳이 우리만은 아닌 모양이에요.

진룡이 손대서 망한 드라마나 영화 관련해서 문 닫은 제작사들도 몇 군데 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점점 진룡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늘어나는 상황이고요.”

“아마 자본으로 갑질 좀 했겠지.

투자한답시고 돈을 던져 준 다음에 그 자본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거야.

아마 촉박한 상황에서 투자자가 돈을 빼기라도 하면 정말 곤란해지니 제작사 측에서도 진룡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겠지.

내막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악질적이긴 해.”

“저대로라면 진룡도 오래 못 갈 거 같은데요.

그전에 본사에서 무슨 제스처가 있지 않을까요?”

“글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어서.

어쩌면 진짜 제대로 된 한방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진룡의 사장 놈이 남을 망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손해를 메우는 능력도 제법인지 꾸역꾸역 큰 손해는 보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까.

아, 처음에 완전히 망해 버린 드라마 말고는 말이야.”

“후….”

윤 대표는 뭔가 불만에 차 있는 민 여사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그녀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정말 그런 식으로 해결하면 곤란했다.

민수의 사건에 설아까지 말려들어 큰 위기를 겪은 일로 윤 대표의 마음도 말이 아니었다.

민 여사가 직원까지 다 동원해 헤집고 다는 걸 전혀 말리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게 사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진룡 미디어에 몽둥이라도 들고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길길이 날뛰는 민 여사 때문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자신까지 냉정함을 잃는다면 직원들을 다 히트맨으로 동원할 수 있는 민 여사를 누가 말린단 말인가.

그 양아치를 어젯밤에 잡았지만, 오늘에서야 민수를 부른 것도 자신이 냉정을 찾고 민 여사의 마음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윤 대표는 화가 많이 났지만 어쨌든 폭력적인 방법은 안 된다는 방침을 고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룡을 그대로 두고만 볼 생각은 없었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있었다.

진짜 진룡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말이다.

다만 이번에 그 양아치가 떡이 되어 아리 재단에 잡혀 온 일은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옳지 못한 일이긴 했지만, 자신도 그놈을 보고 속이 좀 시원하긴 했으니까.

윤 대표와의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민수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선 든 생각은 자신이 그들에게 정말 무슨 큰 잘못이라도 했나 하는 생각이었다.

자신이 정말 싫지 않고서야 그런 짓까지 할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일들뿐이었다.

진룡의 산하 RD 엔터의 수장 정우철은 그저 본인이 헛발질하며 자멸했을 뿐이었고 오히려 자신만 은근히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들이 자신과 다른 배우들에게 억하심정이 있다면 자신들의 드라마나 영화와 경쟁작으로 붙으면서 금전적 손해를 봤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굳이 더 찾아본다면 “용명”의 대성공 때문에 “유적 탐색자”의 성과가 조금 희석되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하. 결국은 돈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자 민수도 마음속에서 울분이 끓어 올랐다.

“그래…. 돈 때문이었단 말이지.

좋아. 돈 좋지. 돈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민수는 그들이 돈을 그렇게 좋아한다면 정말 큰 손해를 한번 안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수가 다시 살면서 지금까지 특별히 전생의 기억을 이용해 본 적은 없었다.

있다면 제복을 발로 차 버리려는 태준을 한번 말렸던 것 정도일까?

민수에게 무슨 대단한 도덕심이나 양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는데 어차피 작품 자체도 많이 바뀌었으니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 같지도 않았고 잘 될 작품에 자신이 들어간다고 그게 다시 잘된다는 보장도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기억에 잠시 의지해 볼 생각이었다.

민수는 곰곰이 이때쯤 일어났던 일들을 상기해 보았다.

뭐라도 하나 이용할 수 있는 게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서였는데 계속 머리를 굴리자 어떤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이거…. 잘하면….”

자기 생각대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생각보다 상대에게 큰 타격을 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좋아. 우선 상황부터 알아봐야겠지.”

마음을 정한 민수는 우선 가장 먼저 설아를 찾았다.

윤 대표나 민 여사의 눈을 피해 자신을 도와주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 설아였기 때문이었다.

윤 대표나 민 여사의 협조를 받으면 더 확실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 둘에게 자신이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설아라면 왠지 이유를 묻지 않고 자신의 말을 들어줄 거란 확신이 있었다.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 앨범 작업에 열중하던 설아는 민수의 부름에 민수의 방을 찾았다.

평소였으면 휴게실에서 보았을 텐데 굳이 자신의 방으로 찾아오라는 말에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앙큼한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물론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뭐 어떤가? 이젠 예전에 따끈따끈한 사이가 아니라 완전히 뜨거운 사이가 되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게다가 그런 일이 아니라도 피곤한 앨범 작업 끝에 민수를 보는 것 자체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오~ 오빠. 무슨 일로 저를 호출하셨나이까?”

민수는 다시 자신에 일에 열중하기 시작한 설아를 대견하다고 생각하면서 장난기 어린 설아의 말에 피식 웃어 보이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들었어? 이번에 사고 친 양아치가 잡혀 왔다는데.”

“아아. 물론 들었죠.

회사의 오빠들이 아주 그냥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라고요.

난 두 대 때렸네, 밟아 줬네. 복수를 해줬네 하면서 말이에요.

참 재미있는 오빠들이라니까.”

말을 들어보니 그 양아치가 응징을 당한 게 확실히 설아에 대한 복수도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예전에 누가 말한 대로 설아가 아리 재단의 공주님 같은 존재가 맞긴 한가보다.

민 여사의 말대로 쓸데없는 잠복근무에 대한 울분이 반이고 설아의 복수가 남은 반 정도 되지 않았을까?

저렇게 설아를 아끼는 직원들인데 만약 자신과 설아의 사이가 완전하게 밝혀진다면…..

민수는 갑자기 끼어든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지우고 본론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