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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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터진 다음 날.
진룡 미디어 사장실의 황 사장은 뉴스를 전해 들으며 황당해하고 있었다.
“이거….. 진짜 불이 나 버렸는데?
허허. 신이 날 버리진 않은 모양이군.
이봐, 설마 저거, 우리 쪽 인사가 벌인 일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그냥 해본 말.
대부분의 간부가 고개를 젓는 가운데 박철우 상무만이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웬만한 일이었으면 자신이 한 일이라고 떳떳이 밝히고 공치사를 했을 텐데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박철우 상무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다.
만약 진짜 세트장을 태워 먹을 생각이었으면 당연히 사람이 아무도 없는 야밤을 노렸을 것이다.
그가 사람이 잔뜩 모여있는 촬영 중에 일을 벌이게 한 건 그냥 적당히 안 좋은 이미지를 심어 줘 드라마에 악영향을 끼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촬영 중에 작은 화재 사고가 나면 당연히 언론에서 이 일을 다루게 될 테고, 철우는 스태프들의 촬영 준비 부족이나 안전 불감증 같은 부정적인 기사들을 언론에 사주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드라마에 대한 이미지도 안 좋아지고 어쩌면 민수와 연희의 팬들이 자신들의 배우를 위해 소요를 일으킬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세트장은 저질이었고, 시민의식조차 바닥이었다.
철우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소방차를 주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자리에 자신의 차를 주차해 놓은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에는 혀를 내 두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그런 생각 없는 사람이 있었다니.
세트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실공사 날림공사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어도 전혀 화재를 방비하지 않은 건축물이라니.
어떻게 저런 건축물이 허가가 나서 건설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정말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만약 이 일이 알려진다면 신의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저 황 사장이 자신을 보호해 줄 리가 없었으니 그냥 입을 닫기로 한 것이다.
자신도 어제 부하에게 마지막 지령을 넘긴 후 바로 연락을 끊었다.
만약에 그 부하가 잡히더라도 자신과의 끈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으니 자신에게 문제 생길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자신의 공적을 속 시원히 밝히지 못하는 건 좀 아쉽지만 이건 차라리 그냥 모르고 넘어가는 게 서로에게 좋았다.
“그래. 그럼 저 드라마는 어떻게 되는 거야?
방송국 쪽에서는 뭐라고 하디?”
“상황이 심상치가 않은 모양입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 드라마가 제작될 일은 없어 보입니다.
그 시간대에는 이제 완전히 다른 드라마가 들어간다는군요.”
“하하하. 좋아 좋아. 아주 좋아.
이제 우리 드라마만 잘 만들면 되겠군그래. 하하.”
오랜만에 사장실에 황 사장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황 사장의 호탕한 웃음에 간부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며칠 후.
민 여사는 몇 장의 사진을 받아 들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박 이사는 자신의 직원이 찍어온 사진에 대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이름 김영수 나이 32살.
제작사 리커벌 프로덕션에 계약직 FD로 일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약간의 도박 빚이 있고 남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음….”
“이 사진을 보시면 알겠지만, 사건이 일어난 지 2일 후.
어떤 남자가 김영수에게 무언가를 건네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사건 후 무언가에 쫓기듯 항상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입니다.”
민 여사도 사진 속 영수가 확실히 의심스러웠다.
민수처럼 화재에 특별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계속 불안해한다는 건 켕기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였다.
“이 남자에 신원은 파악했나요?”
민 여사는 영수에게 무언가를 건넨 남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영수는 그저 피라미에 불과했고 진짜 신경 써야 할 사람은 이 일을 사주했다고 짐작되는 이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게…..
미행하던 직원이 그만 저 남자를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직원의 말이 골목 골목으로 숨어서 다니는 데다가 경계심도 대단해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아마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녀석이 아닐지…..”
“하…. 진짜 중요한 걸 놓쳐 버렸네요.
그럼 다른 스태프들한테는 이상이 없고요?”
“네. 여사님.
대부분 똥 밟았다는 반응이었고 짜증스럽게 행동하거나 조금 우울해할 뿐 다른 징후는 없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저런 일을 겪었을 때 보여주는 전형적인 행동들이죠.”
민 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저 영수라는 남자가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무슨 사법기관도 아니고 의심된다고 잡아다가 수사를 하거나 물고를 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저 남자가 꽁꽁 싸매고 있는 걸 생각하면 영수라는 사람이 저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을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좋아요. 우선 저 남자의 신원을 밝히는 데 최선을 다 해 보세요.
어떻게든 누군지 밝혀내야 해요.
어려운 일이지만 부탁 좀 할게요. 박 이사님.”
“네. 이사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말았다는 보고에 민 여사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 진짜 누가 사주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민 여사의 예상대로 경찰은 누전에 의한 화재 사고 정도로 마무리 지으려는 분위기였다.
화재 발생 원인은 누전에 의한 것이라고 밝혀졌지만 바쁜 촬영 현장 구석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남자가 아리 재단 건물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손에는 음료수를 잔뜩 들고 있는 것이 어딘가에 심부름을 다녀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으차.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잘못하면 또 혼날 뻔했잖아?”
남자가 아리 재단 사무실 안에 들어서자 기다리던 다른 남자들이 휘파람을 불며 남자를 환영해 주었다.
“오~ 막내, 오늘은 안 늦었는데?
웬일이야? 요거 요거.”
덩치 큰 남자 하나가 손을 내밀어 봉지를 건네받은 후 남자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면서 장난을 쳤다.
“에이. 선배 언제 제가 맨날 늦었다고 그래요?”
남자는 상대의 장난이 익숙한지 자연스럽게 뿌리치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남자 하나가 작게 한숨을 쉬며 장난을 친 남자에게 한마디 했다.
“그래. 이제 막내 좀 그만 괴롭혀라.
저 녀석이 들어온 지도 거의 3년이 다 돼가는데 이제 대우해 줄 때도 됐잖아?
“그러게. 처음에는 맨날 힘들다고 질질 짜더니 이제는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하고 있단 말이지.
말이 막내지 이제 우리 직원이 다 됐지 뭐.”
막내라고 불린 남자는 예전에 민수에게 화풀이하다 경찰서에 끌려갔던 그 남자였다.
자신에게 몸이 불편한 노모가 있다고 선처를 호소하던 그 남자.
그 후로 7명의 남자가 모두 아리 재단에 몸담게 되었지만 이제 남은 것은 이 남자 하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강도 높은 아리 재단의 훈련과 정신 교육에 다 도망가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남자는 꿋꿋이 버텨 결국 아리 재단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애당초 훈련이나 교육 중에도 월급은 꼬박꼬박 제때 잘 나왔고 심지어 먹여주기까지 했으니 못 버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월급으로 꾸준히 치료를 받아 어머니의 병세도 점점 나아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직원 혜택이라고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도 무료로 빌려줘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실 수 있었으니 이런 곳이 어디 또 있으랴.
지금에 와서는 남자도 예전에 도망친 자신의 동료들을 비웃고 있었다.
겨우 이걸 못 참고 이런 자리를 박차고 나가다니.
정말 배가 부른 녀석들이었다.
“그나저나 이 비상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예요?
형님들도 집에 계속 못 들어가고 계시죠?”
“하. 그러게 말이다.
이놈이 누군지만 알면 되는데 말이야.
어떤 놈인지 진짜 잡히기만 하면….”
그러고 보니 자신과 같은 조에서 일하는 선배가 말하길 대충 덜미는 잡았는데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했었다.
남자는 무심코 탁자 위에 놓인 사진들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보면 누군지 알겠냐마는 그냥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어?”
사진을 살피던 남자는 자신에게 익숙한 실루엣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가 가져온 음료수를 들이켜던 다른 남자들은 남자의 반응이 범상치 않자 탁자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왜? 혹시 아는 놈이냐?”
“아… 그게요. 잠깐만요.”
남자는 다시 한번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여러 장의 사진을 넘겨보다 어떤 사진을 집어 들더니 남자들에게 내밀었다.
“어쩌면 제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겠는데요.
여기 보면 손등 쪽에 특이한 문신이 있잖아요?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좀 특별해 보여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오오. 진짜냐?”
“야. 이 새끼 누군데?”
“그러니까요. 제가 알기론 이 사람이 넙치 형.. 아니 넙치라는 사람인데요.
그 예전에 정우철이 뒤 봐주는 양아치 중 하나예요.
정우철이 잡혀가자마자 바로 동생들 버리고 잠적해 버린 나쁜 놈이죠.
동생들은 자기가 다 책임진다고 하더니…. 내가 그 소리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어쨌든 평소에도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놈이라 저도 얼굴은 잘 모르는데 저 문신은 확실하네요.
하도 맞아서 저 문신은 확실히 기억하거든요.”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지루한 잠복근무(?)의 끝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참았던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건 이제 다 끝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술 잔뜩 먹고 자랑하던 게 생각나네요.
자신이 뭐 은신 스페셜리스트라나?
서울 안에 자신의 은신처가 몇 군데 있다나 봐요.
그러니까 거기가……”
그리고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리 재단에서 대기하던 모든 직원이 남자가 말한 곳으로 출동하기 시작했다.
민수와 설아의 상태가 급격히 좋아지면서 태준은 바로 일본 스케줄을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속사에 남은 건 수연과 민수, 그리고 설아 뿐이었다.
설아는 가끔 음반 작업 때문에 자리를 비웠으니 소속사에 상주하는 건 수연과 민수 정도였다.
갑작스레 발생한 사고로 소속사로 달려왔던 소희와 은우도 민수가 괜찮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촬영 현장으로 돌아갔으니 이제 다들 자신이 있을 곳으로 돌아간 셈이었다.
민수는 소희와 같이 떠나면서 형우가 남긴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거 기분이 좀 안 좋아.
혹시 모르니까 형도 조심해.”
형우는 부대에서도 감이 좋기로 유명했다.
대신 타이밍이 안 맞는 면도 있었는데 특히 등골이 싸하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검열이 온다든지 아니면 사단장이 갑자기 찾아와 온통 헤집어 놓은 다음에야 “아 느낌이 안 좋더라니” 라고 뒷북을 치는 식이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형우까지 저럴 정도면 진짜 우연은 아닌 건가…..”
민수도 소속사 직원들의 움직임에서 뭔가 뒷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음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뒷이야기가 있다는 말은 정말 누가 방화를 했다는 의미였고 설마 그런 짓을 했을까 싶어서였다.
“후후. 민수, 네가 날 도망치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다.
진작에 승부를 받아들였어야지.”
처음에는 노심초사하던 수연도 이제는 민수와 설아가 다 괜찮다는 것을 알고 조금씩 장난을 걸고 있었다.
민수는 괜히 걱정하는 모습보다 평소처럼 자연스러운 수연의 행동이 오히려 더 마음 편했다.
“그러게요. 후. 비겁자의 말로죠.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누굴 탓하겠어요? 자업자득인데.
하….”
하지만 장난을 치던 수연도 민수가 심각한 자책 모드로 들어가자 얼굴색을 바꾸며 당황해했다.
“야. 그게 어떻게 그렇게 돼?
뉴스 보니까 누가 실수해서 누전 사고 난 거라는 구만.
그놈이 잘못이지 어떻게 네 잘못이냐?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도 마.”
요즘 민수는 그런 수연의 반응을 조금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열심히 설득하던 수연은 민수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보이자 자신이 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쉬면서 민수에게 달려들었다.
“요 녀석이 또 장난을…..
너 그런 걸로 장난칠래?”
“악 선배 아파요.”
아무리 민수라도 수연의 꼬집기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한창 그렇게 장난치면서 쉬고 있는 중 뉴스에서는 화재에 대한 또 다른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민수는 새롭게 들려온 소식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소식은 바로 제작사, 세트장 소유자, 그리고 시공사까지 서로 책임을 미루면서 결국 법정 공방에 들어간다는 소식이었다.
민수는 저 뉴스를 접하는 순간 드라마는 완전히 물 건너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 상황에서 배우에 불과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