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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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날이 밝았지만 민수와 설아는 여전히 침대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체온이 주는 포근함과 심리적인 안정감, 그리고 알 수 없는 나른함 때문이었는데 그래도 이제는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오빠. 이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음…그렇긴 한데…..”
민수답지 않은 투정에 설아는 작게 미소 지으며 민수의 손등을 찰싹하고 가볍게 내리쳤다.
“이제 일어나요. 배고프단 말이에요.
음… 오늘은 특별히 무조건 오빠가 해주는 아침을 먹고 싶네요.
괜찮겠죠?”
배가 고프다는 설아의 말에 민수도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배가 고프다면 뭐라도 먹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아침부터 설아를 굶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 좋아.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서 우리 설아는 뭐가 먹고 싶을까?”
“오… 그러고 보니 오빠가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말을 놓고 계시는데요.”
장난기 어린 설아의 말에 민수는 그녀의 콧등을 살짝 꼬집으며 대답했다.
“그러네.
이제는 완전히 내 여자가 되었으니 좀 편하게 대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마음에 안 들어?”
“오~ 내 여자.
그거 혹시 청혼이라도 하시는 건가요?”
중간단계를 완전히 뛰어넘은 설아의 말에 민수도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설아랑 헤어질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좀 이른 긴 했다.
“글쎄. 그러기에는 네가 너무 어리지 않니?”
“오호~ 어리다? 어젯밤의 민수 오빠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인데요.
어린 저한테 어제는 그렇게나…..”
“흠흠. 빨리 먼저 씻어.
밥 먹자고 했지? 오늘 내가 아주 근사한 거로 모실 테니까.”
은근슬쩍 말을 돌려버리는 민수의 반응이 재미있었지만 설아도 더는 파고들지 않았다.
앞으로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을 텐데 굳이 이런 일 정도로 물고 늘어질 이유는 없었으니까.
“히힛. 어쨌든 기분이 나쁘진 않네요. 내 여자라…..”
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자신의 휴대폰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몇 개의 문자를 확인하더니 환한 얼굴로 쾌재를 불렀다.
“오. 어젯밤에 엄마도 아빠도 집에 오시지 않았다네요.
이거 혹시 완전 범죄? 히힛. 좋네요. 아주 좋아요.”
설아의 말에 민수도 아차 싶었다.
자신이 너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질러 버렸기 때문이었다.
만약 평소 같은 날이라 두 분이 모두 집에 계셨다면 예상치 못한 딸내미의 외박에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지를 생각하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러네.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
후….”
“에이. 그러지 마세요.
손뼉도 맞아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이게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일은 아니죠.
그리고 또 뭐 어때요? 제가 아이도 아니고 전 엄연한 성인이라고요.”
“그건 그렇지만…..”
설아는 민수의 뒷말을 듣지 않고 후다닥 욕실로 자리를 옮겼다.
더는 이 일에 대하여 고민하지 말라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리라.
민수는 그냥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만약 자신이 어제 혼자 잠들었으면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일어날 수 있었을까?
충격적인 사건과 과거의 잔재로 악몽을 꾸며 괴로움이 더 잠식해 들어왔겠지?
민수는 정말 어제 설아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제 괜찮다는 말과 앞으로도 계속 좋을 거라는 속삭임에 마음이 점점 편안해졌고 그녀를 안고 있을 때의 그 충족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제는 일어나서 자신의 애인에게 근사한 아침 식사를 선물해 줘야 했다.
앞으로 일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지금은 마음이 정말 편했다.
그런 민수랑 설아와는 상관없이 윤 엔터의 직원들은 어제의 사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사실들을 전달받고 후속 조치에 집중하고 있었다.
특히 민 여사의 이사장실은 삼엄한 기세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 사고 소식을 접한 민 여사는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린 몇 시간.
설아와 민수가 모두 아무 문제 없다는 병원의 검사 결과가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해진 민 여사는 그 즉시 모든 이사를 불러 모았다.
침통한 분위기의 이사장실에 이사들이 모여들자 민 여사는 한껏 인상을 쓴 채 지시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웬만한 일에는 미소를 잃지 않던 민 여사와는 조금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우선 다행히 배우들에게 별 이상은 없다고 합니다.”
민 여사의 말이 끝나자 이사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금도 밖에서는 거대한 화재 사고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고 사고의 규모가 어떤지 잘 알고 있던 이사들도 병원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계속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난 우연이란 말을 잘 믿지 않아요.
우리 배우가 들어간 드라마 세트장에서 우연히 불이 났다고?
그래. 물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내 촉이 뒤에 뭔가가 있다고 계속 말하고 있는데 이게 진짜 우연일까?
그래서 한번 알아보려고요.
그리고 우연이 아니면…..후. 아니야.”
민 여사는 무슨 말을 하려다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사들은 그런 민 여사의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기만 했다.
“좋아요. 우선 지시사항부터 전달하겠어요.
먼저 각 배우에게 경호원부터 붙이세요.
당분간은 스케줄 어디를 갈 때도 반드시 동반하도록.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니 우선 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네. 그렇지 않아도 형우가 “붉은 범”에 연락해도 되냐고 문의해 왔습니다.
느낌이 별로 좋지 않다고요.”
민 여사는 최 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형우가 지금 소희 매니저로 들어가 있죠?
그 녀석까지 그런 걸 보니 진짜 뭐가 있긴 한 모양이네요.
그 녀석도 촉이 정말 좋은 녀석이니까요.”
“하지만 여사님, 아니 이사장님.
저희 쪽 인력도 충분한데 굳이 경호원까지 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보호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굳이 외부 인력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박 이사는 뒤숭숭한 시기에 외부 인력을 들여오는 것에 반대했다.
“맞아요. 하지만 지금 우리 직원들은 따로 할 일이 있어요.
외부 경호원은 우리 인력이 돌아올 때까지만 고용하도록 하겠어요.
그럼 잘 들으세요.
지금부터 우리 아리 재단 직원들은 오늘 민수가 촬영한 드라마의 모든 스태프를 미행, 감시합니다.
일의 경위는 아직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저렇게 모두 불타버린 상황에서 경찰이 정확한 단서를 잡아낼 수 있을 거 같지는 않군요.
만약 누군가가 일을 벌인 거라면 아마 원한이나 돈 때문이겠죠?
그런데 원한이라… 방송국 스태프가 민수에게 그런 짓을 할 만큼 원한을 가질 거 같진 않군요.
그렇다면 돈이란 건데, 돈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분명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런 일을 맡길 때 계좌로 돈을 건네주는 놈은 없죠.”
“그리고 선급으로 다 지급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만약 그런 모의가 있었으면 일이 다 끝난 후에 잔금을 지급할 겁니다.”
박 이사는 민 여사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직원들을 배우들의 경호로 빼지 않은 이유까지.
“누군지 모르니까 다 감시하세요.
그리고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특이사항은 없는지 빠짐없이 체크하시고요.
만약 누구를 만난다면 그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까지 조사하세요.
기간은 무기한. 제가 상황 종료를 명할 때까지입니다.”
“네. 이사장님.”
민 여사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모든 이사가 서둘러 이사장실을 빠져나갔다.
민 여사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만약 이 일이 사고가 아니라면 민 여사는 이 일을 지시한 놈을 잡아다가 자신이 직접 요절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래서는 안 되었다.
앞으로는 절대 폭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지 않겠다.
그건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고 최후의 심리적 마지노선이기도 했으니까.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정확히 정하지는 못했지만 우선 일의 내막은 알아야겠다.
그리고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알맞게 대처하리라.
설아가 민수표 스파게티와 샐러드를 음미하는 사이에 민수는 그런 설아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바퀴벌레 한 쌍을 향해 태준이 다가왔다.
어제 민수의 사고를 기점으로 한국에 들어온 태준은 들어온 김에 아예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쉬다 돌아갈 계획이었다.
자신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는 친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주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어제도 민수에게 얘기했지만, 어차피 스케줄이란 건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거고 일본에서의 스케줄은 다행히도 그 정도는 조율할 수 있었다.
자신의 동생과 친구가 완전히 안정되면 그때 안심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리라.
태준이 민수 옆에 자리를 잡고 TV를 켰다.
각종 뉴스에서는 아직도 어제 일어난 화재 사고에 대한 정보를 긴급 속보로 다루고 있었다.
[화재에 취약한 드라이비트 시공법은……]
[사고 현장에서는 당연히 작동해야 할 화재경보기와 스프링클러 조차 작동하지 않았고…..]
[소방차가 들어서는 길목과 소방차 주차선까지 막고 늘어선 차량이….]
“거지 같은 놈들이야.
하긴 사람 사는 집을 지을 때도 날림으로 지어대는 놈들이 세트장을 제대로 만들었을 리가 없지.”
태준은 민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뉴스에서 나오는 소식들에 귀를 기울이며 혀를 차고 있었다.
뉴스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니 기본적으로 그 세트장 자체에 문제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화재에 취약한 드라이비트(내부에는 단열 효과가 좋은 스티로폼 따위를 넣고 외부는 시멘트 따위로 감싸 외장제로 사용함)를 이용해 세트장을 만든 것은 둘째 치고 그것도 저 예산으로 만드느라 엄청난 부실 공사가 되어 버렸단다.
심지어 어떤 이유에서인지 당연히 작동해야 할 각종 화제 대비책들은 무용지물이었고 화재를 진압하러 들어오던 소방차들도 다른 차들에 막혀 제때 진입하지 못해 화재를 키우는 꼴이 되었으니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래서 이른 시간에 화재를 발견했음에도 조기에 화재를 진압하지 못해 결국 그 넓은 세트장이 반절이나 불타버리고 이제서야 겨우 진압 완료된 것이었다.
솔직히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 문제가 있는 곳이라는 말에 민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아 하긴. 아직은 모르려나?”
민수는 태준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하기 힘들었다.
솔직히 아직 민수도 정확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흘러가는 상황을 보니 그냥 가볍게 넘어갈 문제는 아닌 거 같았다.
“글쎄. 네 말대로 아직 알 수가 없네.
제작진 측도 정신이 없는 모양인지 따로 연락 오는 것도 없고 말이야.
아, 어제 피디님이랑 작가님한테는 괜찮냐고 묻는 연락이 오긴 했는데 아직 피디님도 확실히 알 수 없는 모양이야.”
“그런가.
그나저나 좀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사실 걱정을 좀 했거든. 일이 일이다 보니 말이야.”
“아아. 그래? 하긴 그렇지.
걱정해 줘서 고마워.
어제 설아가 잘 다독여줘서 괜찮아졌어.
이거, 남자 체면이 말이 아니야.
정작 사고 나서 나 때문에 고생한 건 설아였는데 내가 위로나 받고 있다니.
솔직히 좀 부끄럽네.”
태준은 민수의 말에 오호 하고 탄성을 내지르더니 설아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설아가 그녀답지 않게 얌전하게 음식만 먹고 있자 음충맞게 웃으며 민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꾹꾹 찔러대기 시작했다.
“오호 설아라고? 우리 정 배우가 언제부터 내 동생을 그렇게 다정스럽게 부르셨을까?
이거이거…..”
“뭘 그걸 가지고 그래?
벌써 우리가 알고 지낸 게 4년째잖아.
좀 편하게 부를 때도 됐지.”
민수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태준은 포기하지 않고 눈을 빛내며 계속 캐물었다.
“헤에… 정말 그게 다일까? 이 친구야.
정말…..윽!”
뭐라고 더 말하려던 태준은 발밑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에 작게 신음을 터트리고는 앞에 앉은 설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설아는 민수가 보지 않는 틈에 잽싸게 손날로 자신의 목을 여러 번 긋는 시늉을 했다.
마치 이 이상 더하면 널 XX해 버리겠다는 기세였다.
태준은 설아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살기 때문에 입맛을 다시며 더 이상 파고들 수가 없었다.
“그래그래. 뭐 좋아.
어쨌든 좀 괜찮아졌다니 그걸로 된 거지 뭐.”
태준이 입맛을 다시는 순간에도 민수의 온 정신은 이미 뉴스로 넘어가 있었다.
완전히 다 타버린 세트장의 전해를 보며 민수는 정말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