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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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윤설아 씨. 어서 와요.
오늘 촬영 부분 다 들으셨죠?
잘 부탁드릴게요. 이왕 온 김에 좋은 기운 좀 팍팍 주고 가세요.”
“아뇨.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예쁘게 잘 찍어 주세요 피디님.”
민수가 연기를 하러 간 사이 설아는 바로 피디에게 다가가 인사하고는 따로 자리를 잡았다.
자신이 들어갈 컷은 민수가 스타트를 끊은 후 몇 씬을 찍은 후였기 때문에 좀 떨어진 곳에서 화면을 통해 민수의 연기를 감상할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피디까지 촬영을 위해 이동하자 마음 편하게 주위를 살펴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와. 세트장 진짜 넓네요.
지금 촬영하고 있는 곳이 2층이라고요?”
설아가 묻자 카메라와 화면을 체크하던 조연출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죠. 대회의실이 2층이고요.
그다음 촬영이 1층이라 그쪽도 촬영 준비가 끝났을 거예요.
설아 씨가 들어가는 곳이 저 1층에 로비 부분입니다.”
“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설아는 웃으며 조연출에게 인사한 후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언제나처럼 민수의 연기에는 전혀 흠잡을 곳이 없었다.
냉정하고 냉철한 표정으로 독설을 내뱉는 연기는 예전부터 민수가 잘하던 연기였다.
그렇게 민수의 연기를 지켜보는 설아의 눈에 묘한 장면이 잡혔다.
어디에서인가 알 수 없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설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살펴보았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이상한 부분이 없었다.
“뭐지? 무슨 연기 같았는데.”
이상하다 싶은 설아는 계속 집중해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그렇게 집중해서 관찰하자 촬영을 준비 중이라던 1층 한 곳에서 다시 연기가 미세하게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던 설아는 바로 자신에게 친절하게 굴었던 조연출을 불러 세웠다.
“저기요. 저기 이상한 연기가 나는 거 같은데요.”
설아가 지적하자 바쁘게 움직이던 조연출은 무슨 엉뚱한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설아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지만 설아가 말한 연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예? 무슨 연기요? 그런 거 없는 거 같은데요.”
“이상하다. 분명 연기가 있었는데…..”
설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다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제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설아는 다시 자신의 할 일을 찾아 떠나려는 조연출을 붙잡고 재차 이야기했다.
“저기요. 이제 진짜 보여요. 저기 저기!”
조연출은 바빠 죽겠는데 자꾸 자신을 방해하는 설아에게 조금 짜증스러움을 느끼면서 설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아까는 발견할 수 없었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라오고 있었다.
“응? 진짜네. 저게 뭐지?
야 FD야 1층에서 혹시 무슨 다른 촬영 계획 있어?
연기 나는 소품 같은 거 쓰는 거로.”
“네? 연기 나는 소품이요? 화재 씬도 아닌데 그런 게 왜 필요해요?”
“그렇지? 그런데 뭐지 저건.
설마 무슨 불이라도 났다는 건가?”
조연출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순간 갑자기 연기가 나던 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커진 불길은 벽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생가지도 못 한 모습에 잠시 당황하며 멍하게 있던 조연출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러댔다.
“야! 진짜 불났어. 빨리 피디님한테 연락해! 어서!!”
설아도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순간 촬영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화면을 통해 혼란에 빠진 2층의 상황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다들 밖으로 뛰쳐나오는 동안 미처 챙기지 못한 카메라가 아직도 돌아가고 있어서 그러리라.
설아는 다들 뛰쳐나오는 가운데 몸이 굳은 듯 자리에 멈춰선 민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트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오늘 민수가 촬영할 첫 장면은 회의 장면이었다.
영업실적이 떨어지는 이사들을 질책하는 자리였고 자신이 그들에게 적절한 독설과 함께 분발을 촉구하면 되는 그런 장면.
자신이 연기하기에 어려움이 전혀 없는 무난한 장면이었다.
연기에 집중하고 있는 민수에게 갑자기 묘한 불쾌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 불쾌감이라기보다 알 수 없는 공포심에 가까우리라.
그리고 이내 외부에서 잡다한 소음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촬영이 시작되면 외부에서도 최대한 소음을 줄이는 것이 상식임을 생각했을 때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뭐? 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피디가 무슨 연락을 받았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벽 한쪽 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피디의 컷 사인이 없었지만, 회의실에 모인 배우들도 웅성거리며 피디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불이 났다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어 저기 연기가 올라오는데?”
한 배우가 벽면을 가리키는 순간 벽이 갈라지며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한번 커지기 시작한 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주변에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왁! 진짜 불이잖아. 빨리 대피해. 어서!”
피디가 소리를 지르자 순간 배우들도 놀라 밖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피디의 소리를 듣고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민수는 스태프들과 함께 회의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수가 많았고 그들이 몰려나가는 모습에서 갑자기 예전에 기억들이 떠오르고 말았다.
서로 밀치고 떠밀면서 결국 가족들을 잃었던 그 기억이었다.
예전에 기억이 떠오르자 순간 민수의 몸이 굳어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아른거리며 접근하는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머리 한편에서는 빨리 대피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데 손발이 뻣뻣하게 굳어 버려 자기 생각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멍하니 불길을 바라보던 민수는 이제 자신이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때 외마디의 외침이 들려오며 무언가가 민수의 몸을 강하게 가격했다.
“오빠! 뭐해요. 빨리요!”
다급한 목소리.
강한 충격을 받은 민수는 그제야 몸을 조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불길을 헤치고 자신을 찾아온 설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구두는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맨발이었고 애써 꾸며놓은 모습을 온데간데없이 얼굴에는 눈물만 가득했다.
설아는 겨우 몸을 가누는 민수를 잡아끌고 밖으로 나섰다.
아무리 운동으로 다져진 설아라도 건장한 민수를 수월하게 끌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조금씩 속도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까지도 민수는 자신의 몸을 완전하게 가누지 못하였다.
순간 민수의 머릿속에 강한 위기감이 느껴지고 설아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불타서 검게 변한 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마 저대로 떨어진다면 설아가 크게 다칠 거 같았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설아가 다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설아까지 목숨을 잃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예전에도 이런 사고에서 부모를 다 잃었는데 이번에는 자신의 여자를 잃는다고?
정신이 번뜩 든 민수는 온 힘을 기울여 자신의 몸 전체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부축하는 설아를 앞으로 밀치면서 떨어지는 덩어리를 발로 차 날려버렸다.
무슨 나무통이나 돌덩이였는지 정확하게 가격해 밀었음에도 민수의 다리에 느껴지는 충격이 작지 않았다.
이제 겨우 몸을 가눌 수는 있게 되었지만 얼얼한 다리 때문에 이동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빠. 괜찮아요?”
민수에게 밀려 넘어졌던 설아는 자신에게 떨어지다 민수에게 튕겨 나간 검은 덩어리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이제 좀 나아졌어요. 빨리 가요. 설아 씨.
차라리 절 그냥 두고 가는 게 낫겠어요.
전 제가 알아서 뒤따라 갈게요. 어서요.”
민수는 이대로 불길과 연기에 계속 노출된다면 설아도 무사치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화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불길이 아니라 연기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설아는 끝까지 민수를 끌고 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요.
그런 말 할 힘이 있으면 더 빨리 걸어요.”
설아는 민수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민수를 부축했다.
이제 몸을 가눌 수 있게 된 민수는 절뚝거리면서 설아와 함께 힘겨운 탈출을 계속했다.
그래도 전혀 몸을 가누지 못할 때 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로비 근처에 도달했을 때 아수라장 속에서도 자신의 배우를 찾아 헤매고 있던 동원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배우님!”
동원은 빠르게 달려와 민수를 부축해 들었다.
그리고 소속사 차량에 실린 민수와 설아는 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불을 발견하고 민수와 설아가 탈출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몇 분에 불과했지만 불은 빠르게 번져서 민수가 연기하던 세트장을 완전히 다 태운 후 옆 건물로 옮겨붙어 계속 불타고 있었다.
만약 조금만 늦었으면 민수도 한낱 숯덩이가 되었을 테니 정말 가슴 철렁한 순간이었다.
병원으로 가 정밀 검사를 받은 설아와 민수는 둘 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확진을 받고 소속사로 향했다.
얼얼했던 다리는 부러지거나 다친 게 아니라 충격을 받아 잠시 굳어 있던 것인지 차에 탑승하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시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소속사로 돌아가며 이제 정신이 좀 든 민수는 설아의 무모한 행동을 질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이 난 곳에 뛰어들다니 정말 무모해도 너무 무모했다.
“아니…. 대체 왜 거기로 들어왔어요? 너무 위험하잖아요?
평소에는 고분고분한 설아였지만 이번에는 민수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럼 오빠가 거기서 그렇게 서 있기만 하는데 제가 어떡해요?
오빠 그거였죠? 무슨 공황장애 같은 거요.
과거에 큰 사고가 있는 사람들은 가끔 그런 일을 겪는다고 했단 말이에요.”
울먹이며 말하는 설아의 말에 민수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설아의 말이 전부 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설아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대답이 궁색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이 어디 있어요?
만약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전 뛰어들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는 절대 그런 위험한 지경에 처하지 마세요.
그럼 되잖아요.”
울먹이면서도 확고한 마음 때문인지 다부진 표정.
자신도 놀랐을 터인데 그녀의 표정 속에는 민수에 대한 염려만이 가득했다.
이런 여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설아의 말에 민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설아를 가볍게 껴안아 줬을 뿐.
설아의 따듯한 체온을 느끼며 민수는 앞으로 이 여자와 영원히 함께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제는 진짜 이 여자가 아니면 안 될 거 같았으니까.
민수와 설아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소속사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리고 둘이 무사히 도착해 민수의 방에 들어갈 때까지 그 소란이 계속되었다.
소속사에서 연습하던 수연, 그리고 일본에서 스케줄을 소화하던 태준까지 한국으로 튀어 들어왔다.
“하. 정 배우 괜찮아?”
소식이 전해지고 민수가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그 몇 시간 만에 한국으로 귀환한 태준의 모습을 보며 민수는 황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수연은 민수 옆에서 쉬고 있던 설아를 껴안으며 울고 있었다.
“하… 일본에서 여기까지 온 거야?
스케줄도 많을 텐데.”
“스케줄은 개뿔. 그딴 게 다 뭔데?
몸은 괜찮은 거지?
화재라고 해서 나도 진짜 움찔했다니까.
웬만한 사고면 내가 걱정도 안 하는데 화재라니….”
“설아 씨가 날 살렸어.
그때 그 니킥이 얼마나 묵직하던지 내가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민수가 억지로 웃으며 이야기하자 태준도 피식하고 작게 웃으며 안심했다.
그래도 상태가 생각보다는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일 때문에 적어도 한동안은 정신적으로 힘들 거로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아 참 다행이었다.
“그래. 농담할 기운이 있는 거 보니 그래도 괜찮아 보이네.
역시 내 동생이라니까.
그 킥에 맞으면 누구라도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지.
암 그렇고 말고.”
태준이 너스레를 떨자 옆에서 설아가 입을 삐죽거렸다.
자신이 사고를 당한 사람인 양 설아를 안고 펑펑 울던 수연은 도끼눈을 뜨고 태준을 노려보았다.
“너 지금 그게 할 소리야?
지금 네 동생이랑 민수가 죽다 살아왔는데?”
“아니. 너무 분위기가 무거워질까 봐 그렇지.
이럴 때 너무 그러면 차라리 더 안 좋아져.
의연하게 대처하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수연의 말에 작게 항변하는 태준의 모습에 민수의 입가에도 조금 웃음이 맺혔다.
어쨌든 적어도 오늘 하루는 민수에게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설아는 수연과 태준을 밖으로 내몰았다.
“자자. 다들 무사한 거 확인하셨으니 오늘 면회는 여기까지입니다.
내일 뵙죠. 자자.”
“그…그래. 설아야. 내일 다시 올게.”
수연은 엉겁결에 이 집이 마치 설아의 집인 양 인사를 하고 태준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런 수연을 보며 설아가 미소 짓고 있었는데 민수는 그 광경이 너무 어이없어서 작게 실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한참 후.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설아도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나서려는 설아를 민수가 잡아끌었다.
“설아 씨. 오늘은 저랑 같이 있어 줄래요?”
애틋한 목소리로 이어진 말 한마디에 설아는 멈칫하고는 민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빛에서 평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평소에 한없이 다정하고 따듯한 눈이 아닌 조금 위험하고 뜨거운 눈빛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설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만큼 민수를 보듬어 줘야 할 날이 또 있겠는가?
민수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위로가 필요했고 설아는 아픈 민수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그리고 다음 날 둘은 같은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