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70화 (270/325)

# 270

5

“도대체!

왜 이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게 된 거야?!

분명 그놈들 정보는 즉각 보고하라고 했을 텐데.

지금 정신들을 어디다 팔아먹고 다니는 거지!?”

“방송국에서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꾸는 바람에 알아채는 것이 늦었습니다.

게다가 요즘 방송국 쪽 인사들하고도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다 보니…”

“하….”

황꾸웨민, 황 사장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인상을 썼다.

드라마가 계속 실패하니 점점 방송국 쪽 사람들하고도 소원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이해관계의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의미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 자신들이 그 정도로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황 사장은 다시 한번 한 손으로는 편성표를 집어 들고 다른 손으로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애써 화를 억눌렀다.

예전에 자신의 애송이 사장이 윤 엔터에 손을 내밀라고 했을 때만 해도 윤태준 외에는 다 볼 별일 없는 배우들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상대가 자신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그런 역학관계에서 누가 먼저 잘못했느냐는 것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때 그 핏덩이 배우가 중국에서도 수천만의 관객을 불러모을 만큼 대단한 배우가 되어 있었다.

단 두 편의 영화였지만 그 영화들이 만들어 낸 흥행수익이 수천억 규모.

아마 정확히는 몰라도 순수익만으로도 3000억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보다 더 무서운 건 그의 이름값 그 자체였다.

정민수가 나온다는 것 한 가지만으로 저 드라마는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되는 것이 확정적이었고 데뷔작 이후 다시 찍는 첫 드라마에 대한 기대 심리 또한 대단했다.

반듯하고 꿋꿋하면서도 터프한 이미지는 특정 계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호감으로 다가갔으니 아마 드라마가 제작됨과 동시에 이슈 몰이가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조금 삐딱하게 나오던 언론의 태도도 그에게 긍정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쉽게 흠집을 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민수가 지금 대단하다 한들 당장 상대할 일이 없으면 상관없는 거고 회사가 조금 흔들리고 있는 이때 한창 기세가 오른 민수랑 부딪칠 이유가 없었으니 그쪽의 움직임을 빠르게 파악하라고 지시했었다.

윤 엔터의 배우들이 제법 대단하다고 하지만 어차피 배우는 배우일 뿐.

배역을 맡겨 주지 않으면 연기를 할 수 없고, 설령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한다고 해도 그 시간대만 피하면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지금까지 자신은 그 단순한 사실을 몰라 그런 손해를 입은 것이었다.

솔직히 한번 제대로 눌러줘서 자신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이 나서서 저격에 들어간 것이었고 그때는 그 배우들이 출연하는 드라마마다 대박을 터트릴 줄은 몰랐다는 말이 더 정확하리라.

2번의 경험으로 황 사장은 윤 엔터 배우들이 들어가는 시간대의 드라마는 웬만하면 거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주일에 공중파 미니시리즈만 9가지, 케이블까지 합치면 15가지도 넘게 들어가는데 같은 시기에 드라마를 제작한다고 해도 일부러 노리지 않는 이상 경쟁작으로 만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제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얼마 전 정민수가 드라마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세히 알아보니 역시 자신들이 만들 드라마가 들어가는 시간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하…. 그래서 대책은 있나?”

“배우가 인기가 있다고 드라마가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자신 있습니다.”

황 사장은 무턱대고 자신 있다는 제작총괄 팀장을 바라보니 끓어오르는 짜증을 참기가 힘들어졌다.

“자네는 저번에 “로열”에 밟힐 때도, “귀의”에 무너질 때도 그러지 않았나?

아니, 예전에 “현대 달기전” 찍기 전에도 그랬었지?”

“…그건…”

“하…..”

진시첸 사장을 따르던 빠릿빠릿하고 입바른 소리를 잘하던 인사들을 몇 추려 냈더니 이제는 저런 쭉정이 밖에 남지 않았다.

황 사장은 자신이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남은 자들의 무능함만을 탓하고 있었다.

지금도 회사 내에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직원들이 파워게임에 밀려 목소리를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나가서 대책 마련해와.

그놈이 촬영하는 세트장에 불을 지르든지, 그놈 손모가지를 비틀어서 출연을 못 하게 만들든지, 정 안되면 그놈의 가짜 사생아를 만들어서 찌라시를 뿌리든지 뭐든 좋으니까 우리 드라마가 들어가는 시간에 못 들어오게 만들라고!”

사장이 소리를 지르자 회의를 위해 모였던 임원들이 썰물처럼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사장이 그저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말이다.

이미 투자와 방송이 확정된 드라마를 이제 와서 막을 방법은 없었다.

있다면 정말 범죄를 저지르는 방법뿐이었는데 실행하는 것은 둘째치고 그랬다가 덜미라도 잡힌다면 정말 회사가 망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당연히 자신들은 다 실직자가 되는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 책임은 대체 어떻게 진단 말인가.

하지만 그 임원 중 정우철을 따르다가 뒤늦게 줄을 바꿔 타고 황 사장을 모시면서 궂은일을 자처하던 박철우 상무만이 눈을 빛내며 골똘히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며칠 뒤.

드라마 촬영 날짜가 되고 민수는 즐거운 마음으로 촬영장을 향하고 있었다.

“외부 종합 세트장이요?

그것도 사극 세트장이랑 멀지 않은 곳이네요?

오. 이거 제작비를 생각보다 많이 받았나 봐요?”

지금 민수가 향하고 있는 세트장은 한국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종합 세트장이었다.

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편의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되었고, 그래서 해외 관광객들이나 국내 방문객도 제법 들르는 유명한 곳이었다.

“네. 배우님.

광고는 이미 완판이고, 방송국에서 제작비도 생각보다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정민수와 유연희 파워가 아니겠습니까?”

동원이 웃으며 말하자 민수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쑥스러워했다.

“에이. 제가 국내에서 무슨 힘이 있나요.

아무래도 연희 선배의 힘이겠네요.

이미지만으로 따지면 수연 선배를 앞서는 게 거의 연희 선배뿐이지 않나요?

그래서 광고주들이 엄청 좋아하고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배우님도 만만치 않죠. CF를 안 찍어서 그렇지 아직도 저희 쪽에 연락을 넣는 광고주들이 많습니다.”

“그거야 고마운 말씀이지만…..”

누구의 덕이든 상관없이 방영 전부터 광고가 완판이라고 하니 제작비가 부족하지 않아 보여 안심은 되었다.

그리고 그게 자신의 힘이라는 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이제 연기만 잘하면 되겠네요.”

“네. 배우님이 제일 잘하시는 거죠.”

“와. 동원 씨 대체 왜 이래요?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아부를….”

민수가 평소와는 다른 동원의 태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용히 타박했지만, 동원은 그저 웃으며 운전을 계속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원은 지금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민수가 스케줄이 없어서 놀고먹는 시간 동안 회사에서 얼마나 눈총을 받았던가.

그 시간 동안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민수 앞으로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정리해 민수에게 건네주는 것뿐이었다.

자신이 다른 일을 도와주려고 해도 회사 방침에 따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배우들을 전담하는 매니저는 배우의 활동 시기에 휴식을 못 취하기 때문에 배우들의 휴식기에 무조건 쉬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 좋은 사내 복지였지만 그것도 정도 것이지 6개월을 넘어가니 눈치가 안 보일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치고 자신보다 선배가 아닌 직원들이 없었으니 더 그랬다.

그나마 도중에 팬 미팅을 위해 일본으로 떠나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 이제 민수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서 회사에 안 있어도 되니 눈치 볼 일도 없고 얼마나 행복한가.

민수는 콧노래를 부르는 동원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오늘 연기할 대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출연하는 드라마 “달빛 연인”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드라마였고, 자신 역시 현대극 연기와 사극 연기를 동시에 선보여야 했다.

다양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민수가 이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였다.

달을 섬기는 무녀 가문의 장녀 “영월(유연희)”는 전쟁에서 자신을 구하다가 죽은 자신의 호위무사 “유천(민수)”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죽은 그를 잊지 못해 1000일 동안 지성을 드려 자신이 섬기는 달에게 유천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고 달은 그녀의 지성에 감동해 환생한 유천이 있는 세계로 영월을 인도하게 된다.

그리고 환생해 한 기업의 후계자로 잘살고 있던 유천 앞에 과거에서 현대로 시공을 뛰어넘은 영월이 등장하고 둘이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 드라마는 두 인물이 다시 만나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그런 드라마였다.

민수는 냉정하고 싹수도 없는 기업의 후계자를 연기해야 했는데 자신에게 접근하는 영월에게 깊은 경계심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더 신경이 쓰이고 관심이 가는 그런 미묘한 감정연기를 선보여야 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한 이후에는 정말 달달한 연기까지 선보여야 했으며 심지어 과거 영월이 회상하는 장면에서는 소소한 전투 씬이나 충성스러운 유천까지 연기해야 했으니 정말 민수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에 비해 영월을 연기하는 연희는 캐릭터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일관되어 있었고 좀 엉뚱하면서 유천에게 끊임없이 애정을 표현하면 되었으니 연기 자체는 좀 편하다고 할 수 있었다.

오늘 드라마 첫 촬영에는 설아가 카메오로 출연해 주기로 했다.

장기간 흥행하던 설아의 영화는 결국 820만의 스코어를 기록하며 스크린에서 내려왔고 아직 설아가 부른 OST는 음원 차트 상단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오늘은 음반 작업 때문에 방송에 출연하지 않는(평소에도 어차피 잘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설아가 영화 개봉 이후에 처음으로 브라운관에 선보이는 자리였다.

물론 당장 방송에 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활동을 한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으리라.

민수는 이제 앞으로 발매할 설아의 정규 앨범 일정을 생각했을 때 자신들이 드라마를 방영할 시기가 되면 설아의 인기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에 자신 있게 피디에게 설아를 추천할 수 있었다.

이 선택이 선견지명이 되리라고 확신하는 민수에게 설아의 앨범이 실패할 가능성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건 무조건 성공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피디는 첫 회의 카메오로 설아가 조금 약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배역 자체가 설아와 잘 어울렸고 어차피 태준이나 수연은 물리적으로 카메오로 출연할 수가 없었으니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는 시작부터 주연 배우인 민수와 이런 작은 일로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내재하여 있었다.

민수도 얼핏 피디의 마음을 눈치챌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분명 자신에게 감사할 거라고 확신하며 마음 편하게 설아에게 카메오를 부탁했다.

그리고 배역을 확인한 후 설아가 웃으며 허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설아가 연기할 배역이 유천의 헤어진 전 애인이자 첫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먼저 촬영장에 도착한 민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스태프들과 피디에게 인사부터 건넸다.

이건 민수가 촬영장을 찾을 때마다 항상 해오던 습관 같은 것이었고 그렇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면 스태프들의 분위기도 좀 더 부드러워졌으니 연기 인생을 끝마칠 때까지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설아도 촬영장에 도착했다.

잠깐 출연하는 카메오였지만 설아는 정말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등장했다.

세련되고 도도한 유천의 전 애인을 연기해야 했기 때문이었는데 이 배역은 유천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집안의 아가씨였고 당연히 몸에 걸치고 있는 의상도 고급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 오늘 예쁘네요. 잘 부탁해요. 설아 씨.”

“피~ 제가 언제 안 예쁠 때가 있었나요?

그럴 때는 “오늘 예쁘네요”가 아니라 언제나처럼 예쁘네요. 이렇게 말해 주셔야죠?”

민수는 설아의 말에 너털웃음과 함께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훗. 솔직히 연희 선배가 미인은 미인이에요.

하지만 제가 꿀려서야 곤란하죠.

그래서 오늘 평소보다 좀 더 힘을 주고 왔는데 괜찮나요?”

배역도 배역이었지만 아무래도 연희에 대한 경쟁심도 있었나 보다.

하긴 여자 배우가 그런 마음이 없을 리가 없었다.

어떤 순간에도 가장 돋보이고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것이 여배우의 마음일 테니까.

“네. 최고예요.

그런데 저한테 물어봐도 별 의미 없는 거 아닌가요?

제 눈에는 언제나 설아 씨가 최고니까요.”

설아는 환하게 웃으며 대꾸하는 민수의 말에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민수는 그런 설아의 모습에 작게 웃음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신의 말이 진심이긴 했지만 설아의 작은 약점을 하나 발견한 기분이었으니까.

자신의 좀 당돌한 애인은 전부터 의외로 이런 공격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민수가 설아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다 모여 촬영 준비가 완료되었다.

그리고 설아에게 가볍게 인사한 민수는 첫 씬을 위해 준비된 세트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