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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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뭔가요? 수연 선배.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요.”
“민수, 이번에 네가 들어가는 드라마가 6월 말 수목 이라던데?
후후후. 아무리 네가 민수라도 아직 드라마에선 나한테 안되지.
각오는 되어 있으렷다?”
민수는 수연의 말을 듣고 나서야 왜 저러는지 알 수 있었다.
민수도 동원을 통해서 이번 드라마가 수연의 작품과 겹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연기자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수연이 저런 식으로 나온다면 자신도 마음을 고쳐먹는 수 밖에 없었다.
잠시 결정을 보류하며 유치하긴 했지만 민수는 잠시 수연에게 어울려 주기로 했다.
“호. 선배 자신 있어 보이네요.
절 태준이 따위와 비교하면 곤란할 텐데요.”
민수는 수연의 장단에 맞춰 짐짓 거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수연은 민수의 말에 흠칫했지만 이내 결의에 찬 눈으로 민수를 바라보며 승리에 대한 갈망을 드러냈다.
“훗. 그래 우리 태준이가 사천왕 중 최약체 같은 존재이긴 하지.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아직 내가 너보다 한 수 위라 이 말씀.
게다가 이번에 네가 들어가는 것도 로맨스였지?
아무리 연기 스타일을 바꾸고 한 단계 수준이 올라갔다지만 풋내 나는 네가 쉽게 사랑을 속삭일 수 있을까?”
수연 나름대로 민수에게 공격을 넣은 거 같은데 그녀의 첫 말에 빵 터져 버린 민수에게는 뒷말이 자세히 들리지도 않았다.
“푸하하하. 와. 선배.
요즘 진짜 이상한 거 보시는 거 아니에요?
태준이한테 이상한 승부 거시는 것도 그렇고.
사천왕 중 최약체가 뭐에요 대체….”
수연은 자신을 비웃는 민수에게 이를 갈며 경고했다.
“흥. 태준을 꺾은 난 지금 절호조에 올라있지.
태준이도 그렇게 날 비웃다가 나한테 덜미를 잡힌 거고.
너도 나중에 패배하고 울지나 마라!”
“아니… 패배고 뭐고…. 그게 뭐 어떻다고….”
민수가 뭐라고 더 말하려고 했지만, 수연은 민수의 말을 외면한 채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민수는 요즘 수연이 대체 왜 저러나 싶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만한 사람이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요즘 정규 1집을 준비하고 있는 윤 엔터 비공식 소식통 설아였다.
원래 OST 작업을 마치고 바로 작품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던 설아는 생각보다 OST 반응이 좋아서 이 기회에 가수 활동을 본격적으로 해볼 생각으로 정규 1집 녹음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크리스가 떠나며 선물로 안겨 준 곡 2곡과 설아의 전담 프로듀서 자리를 노리는 아크-쥰이 준비한 곡 7곡을 합쳐 총 9곡으로 구성된다고 하는데 그래서 요즘 설아는 자신의 연습실과 아크-쥰의 작업실만을 오가면서 음악 작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예 음악 방송까지 출연할 계획이라니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도 걸을 생각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연기를 완전히 포기한 건 또 아니었는데 민수가 그것에 관하여 물었을 때 설아가 대답했던 말을 떠올려 보면 그녀의 생각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음. 노래도 좋고 연기도 좋은 건 맞아요.
그리고 이제는 저도 제가 연기보다 노래에 더 재능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고요.
그래도 가수만 한다고 생각하면 좀 서운하다고 할까요?
원래 가수들이 행사에 다니는 게 돈을 벌기 위해 서기도 하지만 얼굴을 더 알리기 위해서잖아요?
전 돈은 필요 없으니 연기로 얼굴을 알리려고요.
행사하러 다니는 셈 치고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고 틈틈이 곡 작업을 해서 앨범을 내면 둘 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쥰 쌤(아크-쥰)은 제가 작곡에도 재능이 있다고 했거든요.
나중에 제가 만든 노래로만 앨범을 내는 게 일차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죠.”
연기와 노래를 병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설아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았다.
민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설아에게 인사하고는 조금 전에 수연과 나눈 대화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설아도 조금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민수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설아는 돌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 상황에 대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왜 나이를 먹을수록 저렇게 더 귀여워질까요?
요즘 언니가 소년 만화에 심취해 있거든요.
같이 게임을 하던 친구가 소개해 줬다는 데 그 왜 있잖아요.
차근차근 상대를 꺾고 올라가 세계최강자가 된다든지 하는 그런 만화요.
바보 오라버니와 오빠까지 꺾고 소속사 최고의 배우가 되려는 게 아닐까요?
지금 당장은 그거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그러고 보니 요즘 언니가 보던 애니가 용사가 마왕 성을 정복하는 거였던가요?”
게임에 만화, 그리고 애니까지 정말 서브 컬쳐에 관심이 많은 수연이었다.
민수는 저러다가 나중에 코스프레까지 하겠다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정상급 여배우의 캐릭터 코스프레라니, 어떤 의미로든 기자들이 달려들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지적하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었다.
수연의 교우 관계, 정말 저래도 괜찮은 걸까?
그리고 태준을 꺾었다는 것도 사실 말에 어폐가 있었다.
“그보다, 태준이를 꺾었다기보다는 그냥 어거지로 우겨서 실신시킨 거 같은데요.
그것도 이긴 건 이긴 거라지만 뭐랄까 참….
저도 나중에 그런 식으로 당하는 게 아닐지 걱정이네요.”
민수가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이야기하자 설아는 안심하지 말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냥 장난스럽게만 생각하던 민수도 이어지는 설아의 설명에 조금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단순한 일은 아닐걸요.
자. 저 생각이 과연 언니만의 생각일까요?
언니가 어디 갔다 왔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우리의 바보 오라버니가 혼자만 그렇게 당할 사람은 아니죠.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내부분열? 각개격파? 그런 게 아닐지 모르겠네요.”
“….윤태준. 이 녀석이 뒤에서 수연 선배를 조종해서?”
한군데 뭉쳐있는 3명의 배우를 상대하기는 아무리 태준이라도 무리일 것이다.
이번 패배도 자신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우기기에 당한 것이었으니.
태준이라면 수연에게 항복(?)한 척 사항계(거짓 항복하여 상대방을 속임)를 구사한 뒤에 설아와 자신을 응징하고 마지막으로 수연과 자웅(?)을 겨루는 큰 그림을 그릴만 했다.
잠시 이렇게 생각하던 민수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어 정신을 차린 후 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게 뭐라고…..”
민수의 말에 설아도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네요. 진짜 아무 의미가 없는데요.
저희가 무의식적으로 수연 언니한테 전염되었나 봐요.
바보 오라버니를 응징하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요.
뭐…. 솔직히 좀 재미있긴 했지만요.”
민수도 억울해하는 태준의 표정이 재미있긴 했다.
하지만 민수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원래 사람에게 재미란 건 생각보다 큰 동기가 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이미 상대를 골려 먹는 재미에 어느 정도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풋.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났는데요.
지금 수연 선배가 저렇게 열의에 불타 있는데 갑자기 제 드라마 일정이 변하면 완전히 김빠지지 않을까요?
사실 아직 확정은 아니거든요.
KBC로 들어가면 그 시간대인데 만약 MBS 쪽으로 들어가면 5월인가에 방송되니까 수연 선배랑은 전혀 상관없어지는 거죠.”
설아도 그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지 작게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기합이 들어간 수연은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허탈함에 말문이 막힐 것이 뻔했다.
어쩌면 하루 이틀 정도는 잠을 설치며 억울해할지도 몰랐다.
“그러네요.
원래 잔뜩 힘을 모으고 있는데 상대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만큼 허탈한 게 없죠.
와, 그거야말로 진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거네요.”
민수는 싸우지 않고도 이긴다는 설아의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고 웬만하면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더 재미있을 거 같았으니까.
이런 못된 생각(?)을 하는 것만 봐도 이미 민수가 이 패거리에 완전히 동화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며칠 뒤.
마음속으로 바라던 일은 어떤 식으로라도 이루어진다는 줄리의 법칙처럼 민수의 기대대로 일정이 결국 변경되었다.
KBC는 결국 사전 제작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드라마는 결국 MBS 쪽이랑 계약을 완료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이 기회에 민수에게 본때(?)를 보여줘 최강자가 되겠다는 수연의 결의도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사실 드라마니까 민수에게 대볼 수나 있는 거였지 영화였으면 어림도 없다는 걸 수연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고 민수의 성격상 언제 또 드라마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었던 만큼 수연의 희망은 이제 그저 일장춘몽으로 끝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적지에 가까운 영화에서 대결하는 건 너무 승산이 없었다.
수연은 애써 떨리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면서 민수에게 다가갔다.
민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연의 표정을 보고 겨우 웃음을 참으면서 의연한 척 대처했다.
만약 민수가 조금만 늦게 마음을 다잡아 먹었으면 파르르 떨리는 수연의 입꼬리와 동공이 흔들리는 모습이 너무 웃겨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하. 아쉽네요. 수연 선배.
방송국 스케줄이 저러니 뭐 어쩔 수 있나요?
저희 승부는 그럼 다음을 기약하죠.
아. 정 안되면 후반기에 영화라도?”
전혀 아쉬워 보이지 않으면서 아쉽다는 민수의 말에 수연은 이를 작게 갈았다.
게다가 뻔뻔하게 자신의 홈그라운드와도 같은 영화판으로 자신을 끌고 가려고 하지 않은가?
“야. 두고 보자.
이대로 끝날 거 같아?”
수연은 만화 속 3류 악당 같은 대사를 남기고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민수는 수연이 떠나자 겨우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점점 귀여워진다는 설아의 말에 민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좀 차갑지만 의외로 털털한 구석이 있는 선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보면 참 재미있고 전혀 그 나이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의외로 순수한 모습도 있고 말이다.
아마 저게 진짜 수연의 본 모습일 것이다.
뭐 가끔은 능숙하게 자신을 낚으려고 하거나 장난을 걸고 짓궂은 농담을 던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부분 저런 식이었으니까.
“음… 재미있긴 했는데 어쨌든 결국 일정이 당겨졌으니 더 촉박한 촬영이 되겠네.
어쩌면 100% 사전 제작은 무리일지도?”
벌써 1월이 지나가고 2월에 접어드는 시기였으니 5월에 드라마를 방영하려면 정말 서둘러야 할 거 같았다.
“그래도 이번엔 왠지 시작이 좋은 게 기분 좋은 일만 있을 거 같네.
그랬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리고 민수의 예상대로 촬영 일정이 바로 며칠 뒤로 정해졌다.
갑작스러운 촬영 일정 변경을 수연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진룡 미디어의 사장인 황꾸웨민과 그 일당들이었다.
몇 년 전 진룡 미디어의 수장 자리를 차지한 황꾸웨민은 처음에는 모든 일이 자기 생각대로 흘러갈 줄 알았다.
특히 투자 부분은 더 그랬다.
애송이 사장도 무난하게 소화했던 그 일을 자신이 실패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드라마나 영화 투자는 그냥 물량만 쏟아 넣으면 당연히 흥행하는 거로 생각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룡은 돈이 아주 많은 회사였고, 자신은 영화나 드라마에 많은 자금을 쏟아부을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진시첸 사장에게 가로채다시피 자신의 공적으로 만든 “유적 탐색자”가 거둔 성공이 그의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야심 차게 투자했던 “현대 달기전”은 엄청난 손실만을 남겼고 그 뒤로 투자한 드라마 2편도 연달아 고배를 마시면서 그도 생각을 조금 달리 먹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자신의 자리를 완전히 잃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고압적인 태도와 갑질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던 그가 사장의 자리에서 여러 제작사나 배급사를 조율하는 섬세한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진룡 미디어 코리아는 점점 어려운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계속되는 드라마에서의 실패로 드라마 제작사와 협력사에 대한 장악력을 잃게 갔고, 영원한 우방이라고 생각했던 MJ와의 갈등은 영화계 배급사들과의 사이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예전에는 진룡에 이름 앞에 굴복하던 자들이 지금은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반발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다.
만약 이 추세가 계속 이어진다면 한국에서 진룡 미디어가 설 자리는 머지않아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나마 지금까지 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최근에 성공한 “쓰나미”와 “로드 오브 트릭”에서 얻은 이익 덕분이었다.
웃긴 건 그것마저 자신의 계획하에 이루어진 투자가 아니라 윤 엔터에 대한 억하심정 때문에 충동적으로 결정한 투자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금을 바탕으로 지금 제작하는 드라마에 큰돈을 투자하게 되었다.
진룡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큰 자본은 아니었지만, 영화 2편에서 얻은 이익의 상당 부분을 투자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황꾸웨민은 갑작스럽게 변한 드라마 방영 일정표를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질러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