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61화 (261/325)

#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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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의 한 작은 술집에서 여섯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프리, 리단, 칸토, 진저, 조던, 딘.

이 여섯 남자가 대화하는 주제는 바로 그들의 삶, 그들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레이션이 끝나자 무대가 밝아 오고 노란색 스포트라이트가 비춘 곳에는 가지런히 놓인 탁자와 의자에 앉은 민수만이 관객들을 반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노란색 빛줄기에 비친 민수의 옷도 스포트라이트 색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살아간다는 건 정말 아름다운 거 같아요.

삶은 항상 제게 충족감을 선사하지요.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나를 반겨줄까.

전 언제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곤 한답니다.”

스포트라이트 색이 불게 변하며 민수의 분위기도 급격하게 달라졌다.

그리고 민수가 입은 의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 만족감 충족감?

웃기는 소리군.

인생이란 건 언제가 거지 같지.

한 달을 뼈 빠지게 일하고 나면 세금이다 뭐다 하며 다 훑여가고, 그렇게 그럭저럭 겨우 한 달을 살면 다시 내 지갑에는 먼지만 남게 돼.

그리고 난 다시 너덜너덜한 발걸음으로 그 병신 같은 곳으로 돌아가야 하고 말이야.

이런 세상에서 무슨 만족감을 느낀단 말이지?

거지 같은 소리는 집어치워!”

“그렇게 화를 낼 수 있을 때가 좋은 거야.

시간이 지나면 그런 생각조차 나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냥 죽지 못해 하루를 보내는 거뿐이지.

관성과 타성만 남아서 그렇게.

그러니 그렇게 화라도 날 때 많이 내둬.

나중에는 자신이 화를 냈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을걸.”

“돈 같은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정말 슬픈 건 사람들이지.

언제나 사람들은 그렇게 나를 떠나.

왜 그들은 항상 나를 떠나는 걸까?

그들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메어 와.

난 언제까지 다른 사람들을 떠나보내기만 해야 하는 걸까?

차라리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이런 슬픔을 느끼지 않게 될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져.

그들도 언젠간… 나를 떠나 버리고 말 테니까.”

빛이 바뀌어 가며 등장인물들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때마다 극단적으로 바뀌는 분위기에 관객들은 작은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

심지어 민수는 억양이나 목소리를 묘하게 바꿔가며 극의 몰입도를 더 올리고 있었다.

아마 눈을 감고 소리만 듣는다면 지금 저 자리에서 연기하는 배우가 한 명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빛과 민수의 연기, 그리고 의상이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관객들은 점점 더 민수의 연기에 빠져들어 갔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태준도 조금은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태준은 민수가 감정 전달 부분에서는 누구보다 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방향이 한쪽으로 치우친 건 경험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런 능수능란한 감정 변화 연기를 선보이는 민수를 보면서도 연습을 통해서 그 시간을 조금 단축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결국 어차피 해결될 문제를 조금 빨리 해결한 것뿐이었으니 충격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극이 계속 진행될수록 태준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사람들을 피해가며 혼자 슬퍼할 수는 없잖아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만나고 또 해어지고 다시 만나고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결국 인생을 같이할 동반자를 만나기도 하고 인생의 술잔을 같이할 벗을 얻기도 하죠.

그 시간이 영원하지는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한 게 아닐까요?

자, 이제 가슴을 펴고 주변을 둘러보세요.

당신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요.

인생은 그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것만으로도 너무 짧잖아요?

이렇게 슬퍼하면서 움츠리고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워요.”

“맞아요.

인생은 달콤한 순간보다 씁쓸한 순간이 더 많죠.

자신의 원하는 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고통스럽기만 하지는 않잖아요?

이봐요. 제프리.

당신 아들이 이번에 반장이 되었다죠?

아주 똘똘하고 귀여운 아이던데.

당신이 저번 달에 벌어온 돈으로 그 아이의 운동화를 새로 사줬고요.

그때 그 아이가 보여준 환한 웃음을 생각해 봐요.

기분이 어땠나요? 지금처럼 화가 났나요?

당신이 그렇게 욕하던 그 거지 같은 곳에서 벌어온 돈이 당신의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어요.”

노란빛과 분홍빛이 붉은빛과 초록빛을 점점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건 극이 진행되면서 그들의 감정이 점점 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민수의 연기도 조금씩 변해갔다.

화가 난 제프리가 조금씩 화를 누그러트리고 우울해하던 칸토도 조금씩 밝은 생각을 하게 되며, 허무함만이 가득하던 진저도 조금씩 의욕을 되찾는다.

그리고 슬퍼하던 조던마저 인생과 만남, 그리고 헤어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하… 맙소사….”

이번에는 태준도 깜짝 놀랐다.

단순히 완전히 다른 감정을 번갈아 가며 연기하는 것보다 지금 민수가 하는 거처럼 100이던 감정을 순차적으로 90, 80으로 줄여나가며 계속 연기하는 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도 여러 감정을 번갈아 가며 저런 연기를 할 수 있다니.

지금 민수를 비추는 저 빛은 민수의 연기를 보조하는 도우미이기도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족쇄이기도 했다.

빛의 색이 변해가는 만큼 감정을 바꿔가며 연기하겠다는 표시가 되기 때문이었다.

붉은빛이 연해져 가는 만큼 민수도 분노가 점점 옅어지는 제프리를 연기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더욱더 놀라운 건 그 연기가 주는 느낌이었다.

점점 변해가는 감정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으니까 말이다.

이는 결국 표현력까지 예전보다 더 좋아졌음을 의미했다.

태준은 민수의 연기를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몇 달 틀어박혀 연기 연습을 한다더니 정말 자신의 연기를 완성해서 돌아왔으니까.

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할 때도 남의 감정을 흉내 낼 수 있었던 민수였다.

이제 그런 페널티조차 없었으니 어쩌면 저렇게 연기 실력이 늘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었다.

자신의 친구는 언제나 자신에게 큰 동기를 유발한다.

어떨 때는 흥행으로, 그리고 가끔은 연기력으로 자신의 친구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라이벌이기도 했다.

적어도 라이벌의 포지션을 지키려면 자신도 민수 정도는 해줘야 했다.

“뭐, 중국과 일본에서는 민수가 더 유명하긴 하지만, 적어도 아직 한국에서는 나를 더 괜찮은 배우로 친단 말이지.

그것조차 이대로 가다가는 언젠가 뒤집히겠지만, 내가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지.

하지만 좀 천천히 가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참 폭주 기관차 같은 친구라니까.”

하긴 그래서 저 친구를 더 좋아하는 거지만 말이다.

그렇게 태준이 생각하는 사이에 민수의 일인극이 마무리되었다.

인생의 작은 것에 만족하고,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자는 내용으로 마무리가 된 것이다.

“어땠어?”

민수는 환하게 웃으며 돌아와 태준에게 물어봤다.

태준은 그런 민수에게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땠겠어? 죽여줬지.

감정 표현도 더 섬세해졌고, 표현의 폭도 넓어졌고, 어디 가서 산삼이라도 먹고 온 거야?

이 친구야.

좋은 건 좀 나눠 먹자고.”

좋다고 말하며 너스레를 떠는 태준의 모습에 민수도 뿌듯함과 개운함을 느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15분 동안 원 없이 표출해서 그런지 정말 상쾌했다.

특히 사랑에 빠진 딘과 행복한 리단을 연기할 때는 가슴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사실 요즘 가장 표현하고 싶은 감정들이 그런 감정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어떠셨나요?

배우 정민수의 1인 극장.

재미있게 보셨나요?

참 못 말리는 친구예요.

이제는 자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할 모양이에요.

욕심도 많은 친구라니까요?

저렇게 연기도 부쩍 는 걸 보면 자기 혼자 어디서 좋은 걸 먹은 게 분명해요.”

민수가 숨을 고르는 사이 태준이 무대로 올라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며 분위기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민수가 돌아오고 본격적으로 팬 미팅이 시작되었다.

태준이 진행하는 팬 미팅은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말재간이 부족한 민수에게 태준의 합류는 천군만마 같았다.

애초에 민수를 잘 아는 태준과 민수를 좋아하는 팬들과 함께한 시간이 즐겁지 않을 리가 없었다.

민수에게 가장 큰 충격과 팬들에게는 가장 큰 즐거움을 준 건 바로 민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아놓은 어록이었다.

팬 카페에서 민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아 팬들에게 투표를 붙였고 그 중 상위권을 기록한 말들만 민수에게 전달되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민수야.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 항상 초심을 잃지 말자.]

[건강이 제일이다. 돈보다 건강부터 신경 써야 해.]

이런 어르신들이 항상 말씀하시는 기본적인 충고부터.

[너무 외로우면 눈이 엉뚱한 곳으로 갈 수도 있어.

그러니 우선 결혼부터 하는 게 좋겠구나.]

[가정이 안정되어야 일도 잘 풀리는 법이잖니.

그러니 결혼부터 하자.]

왠지 자신을 내조를 받으면 더 좋은 성적을 기록할 스포츠 스타처럼 생각하는 미묘한 글들도 있었다.

아마 “힐링 멘토”에 계시는 어르신 중 누군가가 올리신 글 같았는데 가족이 없는 자신을 안타까워하며 적은 글이 아닐까 싶었다.

마음이 아플 때 가족이 없는 게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 잘 아시는 어른들이었으니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정말 민수를 충격에 몰아 놓은 건.

[민수형.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람을 치면 안 돼요.

민수형이 치면 진짜 죽을 수도 있잖아요.

우린 민수형이 오래 활동하는 걸 보고 싶으니까요.]

[민수형은 호구라고 소문 다 났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사업은 하지 마세요.

특히 사기나 꽃뱀은 정말 조심하시고요.]

[형. 제발 밖으로 좀 돌아다니세요.

그래야 여자도 만나고 연애도 하고 그러죠.

그러니까 형이 아직 모쏠인 거예요.

그 얼굴 가지고 뭐해요? 좀 써먹어야죠. 안 쓸 거라면 그 얼굴 나에게나 주세요.]

태준은 사람들의 전언을 읽으면서 애써 웃음을 참고 있었다.

글의 내용도 어이없었지만, 글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오묘해지는 민수의 표정도 너무 재미있었다.

“도대체…. 저분들 제 팬들 맞겠죠?

절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걸까요?

원래 이런 걸 하면 영화 재미있게 잘 봤다.

연기가 너무 좋더라.

아니면 민수 씨 사랑해요.

뭐 이런 것부터 나오는 거 아닌가요?”

한탄하는 민수의 말에 태준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애써 침착한 척 태연하게 대꾸했다.

“글쎄요 팬분들의 성향은 다 다르니까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민수 씨를 많이 걱정하고 계시네요.

건강부터 폭력 전과, 사기나 꽃뱀, 심지어 민수 씨의 연애까지 걱정하고 계시다니.

역시 팬은 팬이네요.”

태준의 말에 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맞다고 소리쳤다.

글들의 뉘앙스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태준의 말이 전혀 틀리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인정하기에는 왠지 조금 억울했다.

“아, 여기 운영자 측에서 적어 놓은 말이 민수 씨 사랑해요. 라든지 연기 잘 보고 있습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같은 판에 박힌 말들은 다 제외했다고 하네요.

역시 센스 있는 운영자군요.

하긴 그런 말들만 올라오면 재미가 없으니까요.”

센스고 뭐고 범인은 수정이었다.

하지만 태준의 말대로 판에 박힌 말들이 올라오면 재미가 없긴 했다.

사람들의 글을 읽어 줄 때마다 팬클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봐도 수정의 생각이 맞아떨어지긴 했다.

하지만 저런 글만 있는 것도 다른 의미에서 가슴 아프긴 했다.

민수도 자신을 찬양(?)하고 칭찬하는 글을 보며 힐링하고 싶을 때가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자신의 팬클럽 회원들은 자신을 그냥 배우로 보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쩌면 옆집 친구나, 잘 아는 친구 동생, 친구 아들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은근히 남성 팬이 많다고 하더니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면서 팩트 펀치를 날리는 것이 제법 묵직했다.

사기나 호구도 묵직하게 박혀 들어왔고 모쏠 어택은 자신에게 만약 설아라는 멋진 애인이 없었다면 충격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이제 모쏠이 아니었으니 그 정도 모쏠 공격에는 끄떡없었다.

민수는 모르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팬클럽에서 하고 싶은 말을 받을 때 그런 평범한 글들이 전혀 올라오지 않았다.

몇 개 있긴 했지만, 전혀 호응을 못 받고 바로 사라진 것.

참고 사항이라고 올린 말은 결국 미묘한 사람들의 글을 보며 민수가 마음 아플까 봐 오히려 수정이 배려한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수정을 원망한 민수.

민수는 자신의 팬클럽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민수네]에서 정상적인 “사랑해요.” “연기 너무 멋져요” 같은 댓글이 호응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진실과 상관없이 민수의 첫 팬 미팅은 그렇게 즐겁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팬들과 민수, 그리도 태준도 즐거운 그런 시간이었다.

셋 중 가장 행복하지 못한 게 민수란 건 좀 웃긴 일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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