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59화 (259/325)

#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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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가 자리를 비운 와중에도 영화는 순탄하게 촬영되고 있었다.

대규모 콘서트 씬 이라든지 많은 엑스트라가 동원되는 장면에서는 조금 난항을 겪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다른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

투자금도 충분한 편이어서 촬영을 촉박하게 할 이유도 없었고 자본적인 여유가 있으니 스태프들도 전혀 서두르지 않았으며 그만큼 배우들도 각 장면에 더 충실할 수 있었다.

지금 영화상으로는 3년이 지난 상황.

처음에 영세 기획사로 시작한 유리아 사장의 스타 엔터는 하루가 다르게 커져 나갔고 지금 어엿한 중견급 기획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회사를 키울 때까지 진아가 포기한 것은 한둘이 아니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행사하러 다니느라 침대에 제대로 누워 잔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건강도 점점 악화하고 있었고 그나마 있던 인간관계마저 완전히 단절된 지 오래였으며, 가장 중요한 노래에 대한 애정과 감사함마저 이제는 전부 메말라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 조차 잊어버린 채 그저 몸을 움직이고 있을 뿐인 진아.

그런 그녀의 허무함이 폭발하여 결국 소속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오늘 촬영할 가장 중요한 장면이었다.

시간에 맞춰 촬영 장소에 도착한 민수는 배우들이 모여서 옹기종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오늘도 촬영이 잘 되고 있다는 생각에 흐뭇한 기분이었다.

아마 촬영에 문제가 있었으면 저럴 틈도 없이 계속 촬영에 매진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민수는 자신이 출연하지도 않는 장면조차 잘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되어도 기분이 좋았는데 ‘이게 혹시 투자자의 마음인가’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배우들에게 다가갔다.

확실히 배우들의 표정만 봐도 상황이 괜찮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다들 쉬고 있네요.

촬영은 잘되고 있죠?”

“그럼. 잘 되고 있지.

안될 게 뭐 있겠어?”

오전 촬영분을 다 미치고 장소를 이동해 쉬고 있던 수연은 민수가 등장하자 밝은 표정으로 민수를 반겨 주었다.

“왔어요? 민수 오빠도 양반은 못되겠네요.

마침 민수 오빠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민수는 자신의 이야기 중이었다는 설아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배우들을 바라보았다.

수연은 민수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피식 웃으며 자신들이 아까 나눈 이야기를 요약해서 전달해 주었다.

민수와 전혀 성격이 다른, 아니 민수하고는 매치가 전혀 안 되는 방탕한 재벌 3세를 민수가 잘 연기할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는 이야기였다.

소희는 지금껏 분위기가 변한 민수의 연기를 생각하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거라는 의견이었고 수연과 설아는 그런 연기를 하는 민수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며 결국에는 어떻게 되긴 하겠지만 처음에는 버벅거릴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었단다.

“음… 뭐 해봐야 알겠지만 제가 예전의 민수가 아니란 말씀이죠.”

“올…. 그래? 쉽지 않아 보이는데….”

민수가 자신 있는 태도를 보이자 수연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민수를 바라봤다.

저렇게 자신 있어 할 일이 아닐 텐데.

수연은 민수가 엉겨 붙는 여자 단역 배우의 현란한 손놀림(?)에 민수가 움찔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럼 한번 두고 보자고 이야기했다.

설아도 이번에는 민수가 미덥지 않은지 너무 무리하지는 말라고 조언할 뿐이었다.

드디어 촬영이 재개되었다.

민수는 자신의 등장을 기다리며 소희와 설아가 연기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씬은 진아를 리아가 설득하는 장면이었다.

그냥 가볍게 가서 술이나 한잔 받아 마시고 인사만 하면 되는 자리라는 리아의 이야기에 진아는 마뜩잖았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인다.

회사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너의 후배들을 위해서 눈 딱 감고 갔다 오라는 리아의 말에도 진아는 멍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 고급 술집의 룸.

민수가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진아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룸 안에 들어선다.

룸 안에는 지금까지 여러 번 그녀를 귀찮게 했던 영진 그룹의 막내 손자 성진이 진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부터 이 바닥에서 망나니로 소문이 자자한 성진은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이미 술이 거나하게 취한 채 2명의 헐벗은 여성을 끼고 앉아 있었다.

성진은 진아가 룸 안에 들어서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진아를 위아래로 흘겨보더니 음충맞은 웃음을 지었다.

“큭큭. 왔구만. 왔어.

하긴 지 까짓 게 튕겨 봤자지.

야. 저년은 거시기에 금테 쳐 두른 년이야.

저년 여기로 부르는데 든 돈이 얼만지나 알아?

딴따라 년 주제에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큭큭”

성진은 자신의 옆에 앉은 여자를 더 깊이 끌어안으며 킥킥댔다.

진아는 오자마자 쏟아지는 모욕적인 언사에 깊은 모멸감을 느꼈다.

그리고 성진의 말에서 지금 상황이 예사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인사만 하는 자리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대로 나가야 할까?

진아가 머뭇거리는 사이 성진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진아의 손을 끌어 자리에 앉혔다.

“큭큭, 비싼 돈 받고 왔으면 빨리 앉아야지.

뭐하고 서 있어?

유 대표한테 다 듣고 왔을 거 아니야?”

“… 전 받은 게 없어요.

들은 것도 없고요.”

진아의 말에 성진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잠시 웃던 성진은 음흉한 얼굴로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입을 열었다.

비열하고 저열한 표정에 진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성진의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뭐? 받은 게 없어?

영진 그룹이 미쳤다고 네년한테 CF를 그렇게 넣었겠냐?

돈을 그렇게 받아먹었는데 돈값은 해야지, 안 그래?”

“어머, 오빠. 그랬어요?

그 돈을 내가 받았으면 아주 완벽히 뼈가 녹을 정도로 봉사하고 있을 텐데.”

“뭐, 이 년아? 큭큭.

요망하긴. 네년이랑 같이 있으면 네가 봉사하는 건지 내가 봉사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건 뭐 나보다 더 흥분해서 달라붙으니.”

“그게 내 매력이죠. 뭐.

어때요? 오늘 밤도? 아니면 저 언니랑 같이?”

수연은 한쪽에서 민수가 여자 단역 배우랑 서로 키득대며 농도 짙은 성적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을 헛웃음을 지으며 신기한 눈으로 지켜봤다.

전혀 안 그러는 녀석이 실수도 없이 자연스럽게 저러고 있으니 재미있기도 했지만 민수의 연기 폭이 넓어진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어서였다.

그리고 모멸감을 느낀 진아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성진을 가까스로 밀치고 도망치는 장면을 끝으로 OK 사인이 나자 천천히 촬영 장소로 다가갔다.

촬영이 마치자마자 설아는 다시 소희와의 촬영을 위해 다음 장소로 이동했고 민수는 한숨을 쉬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수연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민수에게 휘파람을 불면서 칭찬의 말을 건넸다.

“오. 민수.

대단한데. 난 또 어디서 좀 놀아본 남자인 줄?

이거, 너무 자연스러운 거 아니야?

나중에 따로 면담이 좀 필요하겠어.”

민수는 자신에게 다가와 너스레를 떠는 수연을 보며 다시 한번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 힘드네요.”

수연은 자연스럽게 잘 됐다고 했지만 민수는 촬영 중에 여러 번 위기감을 느꼈었다.

여자가 둘씩이나 착 안겨서 자신의 몸을 더듬는데 깜짝깜짝 놀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여자 연기자의 의상은 또 왜 이렇게 짧은 건지.

“아주 능숙하던데 뭘 그래.

정말 다시 봤다니까.

어때? 너랑 같이 연기한 애가 모델 출신인데 요즘 새로 연기 배우는 애거든?

예쁜 모델한테 폭 안겨서 연기하니까 좋았지?”

민수는 이게 무슨 함정인가 싶어 음흉하게 웃고 있는 수연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 선배 지금 우리 한편이거든요.

그런 낚시질은 자제해 주시죠?

설아 씨한테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민수의 말에 수연은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아깝네. 요거 한 삼 주짜리였는데.”

민수는 못 말리겠다는 듯 수연을 보며 고개를 저은 후 다시 촬영장을 바라보았다.

촬영장에서는 진아가 성진에게 쫓겨 추레한 몰골로 리아를 찾아가 따지는 장면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리아는 자신을 팔아넘긴 거냐는 진아의 말에 자신이 더 화를 내고 있었다.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인데 왜 그렇게 혼자 별나게 구냐는 리아의 말에 진아는 지금까지 회사에 헌신하며 지내온 자신의 3년이 너무나 허망해졌다.

“변하셨네요. 사장님.

처음에 저한테 뭐하고 하셨죠?

연예인들이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는 그런 회사를 만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사장님도 예전에 회사 때문에 힘들었다면서요.

그런데 이게 사장님이 만들고 싶다던 그런 회사에요?

전 지금 제가 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진아는 회사를 떠났다.

굳이 법적 분쟁이니 이런 것도 의미가 없었다.

진아는 지금까지 회사에서 번 돈을 전부 위약금으로 사용했으니까.

진아가 허망한 눈으로 회사를 떠나는 장면을 끝으로 오늘 촬영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촬영을 마무리 짓고 다가오는 설아와 소희의 모습을 바라보며 민수는 수연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진아가 연예계 활동을 시작한 후로는 수연 선배 출연 씬이 많지 않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저쪽은 소희가 중심이니까.

그나마 이제 진아가 저 바닥을 떴으니 내가 다시 출연할 차례라고나 할까?”

아마 지금은 여유를 부리는 수연도 이제 다시 진아가 카페로 돌아오면 촬영분이 많아질 테니 바빠질 터였다.

후반부는 실의에 빠져 세상을 떠돌다 다시 돌아온 진아를 혜영이 따듯하게 보살펴 주며 다시 삶의 행복에 대하여 깨달아 가는 것이 영화의 주요 스토리였으니까.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설아는 민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 조신(?)한 민수와는 달리 음탕(?)하고 방탕한 분위기를 마구 내뿜으며 연기한 민수가 조금 생소해서였다.

자신이 알던 민수라면 저 장면을 찍으면서 버벅댈 만도 한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오빠 혹시 제가 모르는 다른 과거가 있는 건 아니겠죠?”

민수는 설아의 물음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억누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만큼 자신이 연기가 괜찮았다는 뜻이었으니 엉뚱한 설아의 질문도 민수에게는 반갑게 느껴졌다.

“글쎄요? 어떨까요?”

“뭐에요. 오빠 이건 제대로 대답해 주셔야죠.”

민수가 웃으면서 의뭉스럽게 대답하자 설아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채근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채근하는 설아와 대답을 회피하며 은근히 약을 올리는 민수.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눈꼴사납다는 듯이 쳐다보던 수연은 왠지 짜증 나서 말을 돌려 버렸다.

“아. 맞네! 민수야.

너 이제 곧 팬 미팅이라지 않았어?

그것도 무려 5일이나.

고생 좀 하겠는데.”

바쁜 일정이라 설아와 한동안 같이 지내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던 민수도 수연의 말에 김이 빠진 듯 한숨을 쉬었다.

수연의 말대로 이제 팬 미팅이 코앞으로 다가와서였다.

자신이 11월에 하겠다고 하긴 했지만 매정한 수정이 팬 미팅 날짜를 무려 11월 1일로 잡을 줄은 미처 몰랐다.

연기 연습에 이 영화에 단역으로 여러 배역을 소화하고, 화보에 사인하면서 팬 미팅에 보여줄 무대를 구성하다 보니 이제 그 날짜가 바로 내일모레였다.

하루도 아니고 5개 도시로 나뉘어 5일 동안 팬 미팅만 해야 했으니 민수가 벌써 우울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 맞다. 오빠 이번에 팬 미팅 하죠?

어때요? 제가 게스트로 가서 노래 한 곡조 뽑아 드릴까요?

“민수네”에 제 노래를 좋아하시는 팬들도 많다는 첩보를 입수했거든요.”

민수는 이제 영화 마무리 작업에 한창 바쁠 설아가 게스트로 나오겠다고 말하자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마음만 받을게요.

설아 씨는 이제 진짜 바쁘잖아요.

OST 마무리 작업도 남았으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배우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태원은 민수가 찍은 장면을 보며 조연출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혹시 민수가 나오는 바람에 장면의 느낌이 죽어 버린다면 과감하게 다른 단역으로 다시 촬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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