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57화 (257/325)

#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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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감독 태원에게 윤 엔터는 유망한 젊은 배우를 무려 6명이나 보유한 건실한 회사였으며 심지어 심심하면 자체 제작영화를 만드는 그야말로 노다지 중의 노다지였다.

게다가 친분이 깊은 영화감독이라고 해 봤자 지금 태준과 영화를 찍고 있는 거장 봉성구 감독과 독립영화에서 놀고 있는 찬진 외에 한두 명뿐이었다.

그러니 이 소속사와 친분을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태원에게는 이익이었고 자신에게 베풀어 준 은혜 또한 작지 않았으니 조금 무례한 부탁이라도 그냥 넘길 만했는데 하물며 자신이 좀 귀찮을 뿐인 이 정도 부탁이야 딱히 까다로운 부탁도 아니었다.

사실 지금 이 부탁도 투자금 전체를 제공한 투자자가 한 것 치고는 너무 가벼운 부탁이었음에도 상황을 봐서 아니다 싶으면 빼라고 재량권까지 주며 자신을 존중해 주고 있으니 그야말로 같이 일하기에 최고의 파트너였다.

“아. 그보다 음악은 들어봤나?

어때?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은가?

내가 듣기론 많은 도움이 될 거 같던데.”

태원은 이어지는 윤 대표의 말에 상념을 떨쳐내고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이 말하려고 했던 걸 지적하는 윤 대표의 말에 밝게 웃음을 머금은 채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정말 대단하더군요.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습니다.

이런 친구가 어디에 있었는지 참….”

“그래? 다행이군.

자네가 들은 건 가이드 본이라고 하더라고.

지금 설아랑 정식 버전을 녹음하고 있어.

실제 사용할 음원은 가이드 버전보다는 좀 더 섬세하다니까 한번 기대해 보게.”

“네? 이게 가이드라고?

허…참…”

태원은 그냥 이대로 써도 충분히 괜찮은데 따로 녹음하고 있다니 조금 놀랐다.

평소에 영화 음악이란 건 그냥 부수적인 매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선입견을 깬 노래들이 미완성 가이드 본이란다.

어쩌면 진짜 영화 음악이 단순한 소리만으로 영상만큼이나 강한 임팩트를 주며 흥행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민수는 윤 대표에게 자신이 제안한 것들이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녀석아. 이번 한 번만이야.

그리고 솔직히 시작부터 거의 주연만 해온 네 녀석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김 감독한테도 말해 놨는데 연기 연습 좀 하겠다고 영화에 누를 끼칠 수는 없으니 김 감독이 나가라고 하면 두말하지 말고 돌아와. 알겠지?”

“그럼요. 대표님. 당연하죠.”

민수는 윤 대표의 말에 희희낙락이었다.

자신이 존재감 때문에 감독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예전에 아등바등 한 장면이라도 주목받으려고 존재감을 뿜어대던 민수는 윤 대표와의 연기 연습을 통해 이미 그런 문제를 극복한 지 오래였고, 차라리 그런 전생의 경험 때문에 지금은 단역이 어떤 식으로 연출되어야 하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돌아가서 자신이 맡을 배역들의 대사 연습과 캐릭터 분석부터 시작할 것이다.

민수는 이번에 명품 단역이 어떤 건지 톡톡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자신의 특수 분장에 들어가는 돈도 작지 않았으니 돈값은 확실히 해야 했다.

민수가 배역을 연구하고 있을 때 설아는 한창 녹음실에서 녹음에 집중하고 있었다.

크리스 건은 설아가 막연히 알고 있는 사실들을 더 감각적으로 이해시키는 재주가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크리스 건의 설명이 거듭될수록 설아의 실력도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크리스 건도 설아가 이렇게 빨리 자신의 말을 이해할 줄은 몰랐는데 미국에서 앨범을 제작할 때 가수들이 초반에는 자신의 말을 영 이해하지 못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제길. 그 녀석이 멍청한 거였어. 내 설명이 틀린 게 아니었다고.”

그는 자신들이 무식해서 못 알아들은 주제에 자신의 설명이 너무 난해하다고 타박했던 가수들을 떠올리며 분통을 터트렸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그가 다음에 다른 가수랑 작업을 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일이었다.

“세라. 넌 차라리 가수를 하는 게 더 어울릴 거 같은데.

설마 연기도 이 정도 하는 거야?”

“음…. 글쎄요. 전 비슷한 거 같은데요.”

“맙소사. 정말 연기도 이 정도라고?”

“크리스는 제 연기 안 봤어요?

직접 눈으로 봤으면 알 거 아니에요?”

설아는 자신을 배우로 섭외하러 온 주제에 이제 와서 연기에 관하여 묻는 크리스가 어이없었다.

게다가 인터넷으로 뒤지면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걸 저렇게 묻고 있다니.

“음…..”

“연기는 그렇다 치고, 그럼 제 노래 수준은 지금 어느 정도인가요?

혹시 빌보드에서도 통할 실력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진짜 전향하는 것도 생각해 보고요.”

크리스가 실력이 있는 프로듀서라는 건 인정하지만 아직도 빌보드를 점령할 거라는 말은 믿지 못하는 설아가 그냥 농담 삼아 한번 물어보았다.

그래도 미국에서 제대로 음악을 배운 크리스가 자신보다는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글쎄.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

“에이. 뭐에요? 고작 빌보드에 오르지도 못할 미천한(?) 실력인데 가수로 완전히 전향하라고 말한 거였어요?”

설아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불퉁거리자 크리스는 그런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말뜻은 그게 아니야.

이건 내가 네 연기를 제대로 못 알아본 거랑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인데.

네가 미국에서 가수를 하기에는 영어 발음이 너무 구려.

대화는 통하지만, 노래로는 좀 힘들다고 해야 할까?

내가 한국어를 제법 잘하지만 네 연기를 보고 제대로 평가하기 힘든 거랑 마찬가지지.”

“그럼 그 말은 제가 영어만 완벽하면 가능도 하다?”

“그렇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보다도 노래 못 부르는 가수들이 곡을 잘 만나거나 마케팅 전략으로 빌보드에 오르는 경우도 많으니까 말이야.”

설아는 크리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왜 자신에게 연기를 물어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언어가 문제고 노래 자체는 충분할 거라는 크리스의 말에 기분이 좋긴 했다.

크리스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아마 누가 이런 말을 했어도 기분은 좋지 않았을까?

자신을 인정하는 말이었으니까 말이다.

“말만 들어도 고맙긴 하네요.

어서 마저 연습해요. 오늘 안에 끝내고 싶으니까요.

저도 연기 연습에 들어가야 하거든요?

주연 배우인데 노래만 연습하다가 현장에서 얼 탈순 없잖아요.”

“What? 얼 탄다? 그건 무슨 말이야?”

“아. 못한다고요. 서툴다. 못한다. 형편없다.”

“아아. Ok. 좋아. 그러자고.

연기도 잘해줘야 영화가 살 테니까.

적어도 내일 안에는 끝낼 수 있을 거야.”

“오늘이요. 오늘!”

“끙. 그래 노력해 보지.”

그렇게 설아가 노래하는 동안 민수 수연 소희는 한창 자신의 연기 분을 점검하고 있었다.

캐릭터 분석과 대사 점검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대본을 누가 만든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조금씩 어색한 부분이 있어서 다들 머리를 맞대고 같은 의미에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수정해 줘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용의 울음”의 시나리오를 만들었던 준수가 도와줬다.

크리스 건도 대본이 미묘하게 어색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 수정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바쁜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영화 촬영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제 실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고 처음 주연으로 연기하게 된 설아는 그녀답지 않게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아마 주변에 민수나 수연, 소희가 없었으면 지금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 영화 “Cafe Jude.”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빚 때문에 야반도주한 여고생 “진아”가 우연히 도시 변두리에 작은 공연장이 딸린 음악 카페 “주드”에서 사장인 “혜영”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마음씨 고운 혜영은 진아를 동생처럼 돌보게 되고 그곳에서 진아는 자신이 노래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진아의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된 신생 소속사 사장인 “리아”는 진아를 스카우트해 진아와 함께 소속사를 일으켜 세우고, 진아는 결국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당대의 디바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렇게 인기를 얻게 된 진아는 돈을 많이 벌고 사람들이 알아주면 행복할 거로 생각했는데 전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결국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시 혜영이 기다리는 주드로 돌아가게 된다는 게 영화의 중심 스토리였다.

그리고 당연히 주인공 진아 역에 설아가, 주드의 사장 혜영 역에는 수연이, 소속사 사장인 리아 역은 소희가 연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민수가 맡게 된 배역은 다양했다.

중심 단역은 주드의 단골손님 A, 망나니 재벌 3세였지만 그 외에도 사채업자 3, 길에서 부딪치는 행인2와 콘서트 스태프3 등등 여러 가지 다양한 역할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이는 민수가 요구했던 배역 대부분을 배정받은 것이었는데 유일하게 거절된 것은 추위에 떠는 거지3 역할이었다.

민수의 체형을 생각했을 때 아무리 해도 각이 안 나온다는 판단에 사전에 태원이 거절한 것이었다.

촬영이 시작되고 얼마 후 오늘은 민수가 들어가는 씬에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민수는 평소보다 빨리 촬영장에 도착해 특수 분장으로 몸을 꾸미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지나가는 엑스트라로 몇 번 출연했지만, 극에 전혀 방해를 주지 않고 잘 묻어갔다.

하지만 오늘은 대사가 제법 많은 단역이었기 때문에 민수도 더 신경을 써야 했다.

민수는 지금까지 며칠 동안 엑스트라로 출연하며 자신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패시브 스킬 같던 묘한 슬픈 분위기가 많이 희석되었음을 느꼈다.

유쾌하게 웃고 떠드는 행인 1을 연기하면서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리고 오늘 연기할 단골 손님 A는 주인공에 대한 선망과 동경, 애정 그리고 익살스러움까지 모두 포함한 배역이니만큼 오늘의 연기로 지금까지 자신의 노력이 성과가 있는지 분명히 알게 되리라.

(씬 3-12-A)

진아가 노래하는 시기에 맞춰 오늘도 한 남자가 카페 쥬드를 찾았다.

여드름 가득한 얼굴에 두꺼운 뿔테 안경.

그리고 풍만한 허리를 가진 젊은 남자는 항상 이 시간에 카페를 찾곤 한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늦어서인지 뒤뚱뒤뚱 뛰어서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진아의 노래를 듣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하…..”

진아는 가볍게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시작했다.

곡명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진아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곡 분위기에 맞게 조금 애잔하게 흩어져 나간다.

남자는 곡이 끝날 때까지 진아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몽롱하면서도 호감 가득한 눈빛.

마치 열성 팬이 자신이 사랑하는 스타를 바라보고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어이, 우리 통통이 또 왔어?”

“통통이라고 하지 마세요. 듣는 통통이 기분 나쁘잖아요?”

“킥. 짜식이. 자 오늘도 카페모카지?

맨날 이런 걸 먹으니까 살이 찌지 짜샤.

넌 앞으로 그냥 아메리카노 먹어.”

남자는 입을 한발은 내밀고 카페 주인 혜영을 보며 투덜거렸다.

남자는 정말 진아만 아니었으면 이런 까페에 다시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카페모카가 조금 자신의 취향이긴 했지만.

“비싼 거 먹어도 난리야.

누나, 손님 취향도 좀 인정해 주시죠.

전 그런 쓴 건 못 마시거든요.

내가 내 돈 내고 먹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람.

사장이 이러니까 이렇게 손님이 없지.”

“킥 야, 너야말로 신경 끄시지. 남이사 장사가 잘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노래를 부르던 진아는 오늘도 손님이랑 티격태격하는 사장 언니를 보며 혼자 몰래 웃음 짓고는 다시 노래에 집중했다.

혜영과 대화하면서도 슬쩍슬쩍 진아를 바라보던 남자는 진아와 순간 눈이 마주 치자 해 벌쭉하게 웃다 혜영에게 볼을 꼬집혔다.

“아야! 아 이 누나가 진짜.

정말 이럴 거예요? 손님은 왕 몰라요?

내 이놈의 카페 진짜.”

하지만 투덜거리는 것도 잠시 남자는 진아가 다시 노래를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혜영에게 물었다.

혜영은 남자의 행동에 이놈도 참 어지간하다는 듯이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누나. 진짜 쟤 뭐예요?

노래를 왜 저렇게 잘해요?

이거 완전 재능 낭비 아니에요? 저런 애를 이런 데서 데리고 있다니요.”

“뭐긴 뭐야. 우리 주드 전속 가수 진아 님이시지.

왜? 우리 카페에는 저런 가수 있으면 안 되냐?

짜식이. 시끄럽고 빨리 먹고 가라.

너 또 진아한테 찝쩍대면 나한테 죽어?”

남자는 도끼눈을 부릅뜬 혜영의 경고에 혼자 투덜거리며 작게 중얼거린다.

“찝쩍대긴 내가 언제 그랬어요?

그냥 사인 좀 받고 싶어서 그런 거였는데 사인도 못 받게 하고 아주 악덕 사장이야.”

떠나는 척했던 혜영은 몰래 다시 남자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야. 다 들리거든.

짜식이 사인은 무슨.

야 내가 모를 줄 알아? 어디서 수작질이야?

너 진짜 쟤한테 집적대면 범죄다.

제 아직 민짜거든. 철컹철컹 몰라?”

혼자 깜짝 놀란 남자는 혜영이 양 손목을 모으고 눈앞에 살짝 흔들자 티가 날 정도로 움찔한다.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초점이 모이지 않고 당황하는 게 단순히 사인만을 받을 목적은 아니었나 보다.

“…누..누가 뭐래요? 아후~ 이게 무슨… 카페가 왜 이렇게 더워?

그럼 내일 다시 올게요.”

“OK!!”

촬영이 마치자마자 수연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민수 표정이 왜 그래.

목소리는 또 어떻고.

와 진짜 민수 아닌 줄. 큭큭큭.

곁에 있던 민수도 수연과 같이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수연의 반응만 봐도 지금까지의 자신의 연기와 완전히 다른 연기를 보여줬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자신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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