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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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요. 고민되는 일이 좀 있어서요.”
“음… 제가 맞춰 볼까요? 아마 지금 설아 씨가 고민할 만한 일이라면 역시 작품 문제겠죠?”
“헤헤. 아셨어요? 하긴….”
가수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할 게 아닌 이상 설아가 고민할 일이라고 해봐야 작품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 민수의 짐작이 맞아떨어졌다.
태준도 자기 영화에 집중하느라 집에도 잘 안 들어오고 있었으니 마땅히 조언을 구할 곳이 없었을 것이다.
사실 윤 대표가 봐 준다면 가장 좋겠지만 윤 대표는 배우의 연기력을 향상하는 것만 신경을 쓰고 작품 선택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방임하는 편이었다.
스스로 작품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는 뜻도 있었고 연기만 제대로 한다면 작품이 어느 정도 망한다고 해도 배우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영화가 망하면 바로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는 투자자와는 달리 배우는 그런 작품을 촬영하는 동안에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는데 확실히 그런 면이 있긴 했다.
특히 설아같이 젊다 못해 어린 배우라면 더더욱 그럴 테고.
그리고 배우가 제대로만 해준다면 투자자나 제작사가 바보도 아닌데 망할만한 영화를 찍겠냐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민수도 기본적으로는 윤 대표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어차피 망하는 영화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었고 영화 촬영 후 얻을 수 있는 것이 흥행뿐이라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경험도 있고 인맥도 있고 좋은 연기를 보이는 것 자체도 중요했다.
하지만 그래도 설아가 영화를 찍는다면 가능하면 잘될 영화를 찍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모순적인 말이었지만 기분이 그냥 그런 거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가능하면 진지하게 설아의 고민을 들어 줄 생각이었다.
설아는 해태 눈이기도 했으니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요. 뭔가요? 설아 씨를 괴롭히는 녀석은.”
“그러니까요.”
설아에게 시나리오가 하나 들어왔다고 한다.
그것도 단독 주연.
아직 영화 쪽에서는 더 검증이 필요한 설아에게는 이례적인 일이긴 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웃긴 게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대본을 가져온 것도 감독이 아니고 음악 감독이었으니 더 이상했다.
심지어 그 대본조차 음악 감독이 직접 작성한 대본이었다.
민수는 설아가 설명을 계속할수록 이게 뭔가 싶었다.
“….. 그런데 설아 씨가 고민하는 걸 보면 대본이 좋았나 봐요?”
달랑 음악 감독이 들고 온 대본에 고민하는 설아라.
아무리 생각해도 대본이 마음에 든 것 외에는 고민의 이유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음…. 대본 자체는 그냥 무난한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좀 대단한 사람 같았거든요.
제 노래에 대해 이런저런 개선점을 설명해 주는데 그게 글쎄, 제가 전혀 생각 못 한 부분이기도 하고 정말 그렇게 하니까 느낌이 확 달라지기도 하고, 진짜 신기했거든요.”
그리고 이어서 그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했다고 하는데 분명 음악 용어 같았지만 민수로서는 그냥 외계어일 뿐이었다.
아마 그 남자의 조언을 듣고 설아가 느낀 점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요. 진짜 중요한 건 이거예요.
그 사람이 이번 영화에 OST로 쓰겠다는 매인 테마 곡이거든요.”
그리고 뒤이어 설아가 바로 한 곡의 노래를 들려줬는데 그건 상대가 건네준 멜로디에 설아가 가사를 따로 붙여 녹음한 노래였다.
“……하…”
노래가 이어지는 데 민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미래(?)에서 온 민수가 듣기에도 놀랍도록 세련된 멜로디에 설아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메인 테마 곡이라는데 음악과 노래만 들어도 지금 주인공이 어떤 상황인지 어떤 마음인지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이 곡은….”
“대단하죠? 저도 처음 듣고 엄청 놀랐어요. 곡이 너무 좋잖아요.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니…..”
설아의 말대로 정말 놀라웠다.
민수가 충격을 받은 건 두 가지였는데 놀랍도록 세련된 느낌인데 그게 파격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과 곡 자체도 좋았지만, 관객들에게 영화를 이해시키는데 최적화된 제대로 된 영화 음악이라는 것이었다.
민수가 생각하기에 세련과 파격은 종이 한 장 차이였지만 그 효과는 천지 차이였다.
세련은 많은 사람에게 쉽게 받아들여져 신선한 느낌과 좋은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면 파격은 일부 앞선 사람들에게만 받아들여지고 일반적으로는 거부감부터 주게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떤 것이든 시대의 흐름을 이끄는 것은 파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장 영화를 찍어야 하는 배우에게 그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민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영화에 파격적인 음악을 사용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런데 음악만 들어도 영화의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최적화된 주제곡이라니.
민수가 음악에 대하여 잘은 몰라도 이 곡이 정말 이 영화를 200%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음악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런 영화음악을 만드는 음악감독이라니 설아가 고민할 만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설아 씨는 마음에 드는 거네요.
저 노래도 그렇고, 그 음악 감독도 그렇고요.
그런데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영화라 고민되는 거고요.”
“헤헤. 네. 역시 제 마음을 바로 딱딱! 역시 민수 오빠예요.”
아무래도 설아는 하고 싶은 모양인데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고민하는 거 같았다.
우선 시나리오를 봐야겠지만 솔직히 설아가 하겠다면 뭐가 문제겠는가.
이미 소속사에서 찍고 싶은 영화를 만든 것도 벌써 2번, 이젠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음악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큰 투자가 필요한 영화는 아닌 거 같은데요.
이게 스케일이 엄청나게 큰 작품인가요?”
“때려 부수는 영화도 아니고, CG가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 영화는 아니라 그렇진 않을 건데요.
사람은 좀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만약 이걸 우리가 만든다면…. 배우들 출연료 빼고도 한 백억은 들지 않을까요?
장소도 몇 군데는 꽤 오래 대절해야 할 테고요.”
“음…..”
“확실히 그 정도면 대표님 손을 빌리긴 해야겠네요.
제작사도 따로 알아봐야 할 테고.
그런데 누구길래 제작사도 없이 배우한테 먼저 달려온 거예요?
그건 상식에 어긋나는 일인데요.”
“아 그게요.”
설아는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풋 하고 웃으며 설명했다.
“그러니까요. 그 음악 감독님이 오택건 이라는 분인데요.”
민수는 오택건이라는 이름을 듣고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익숙한 듯한데 또 생소한 이상한 느낌.
머릿속에 뭔가 떠오를 만한데 잘 떠오르지 않았다.
설아의 설명은 이랬다.
오택건이라는 남자는 재미 교포 3세로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한 작곡가 겸 뮤직 디렉터인데 원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받는 것이 목표인 사람이란다.
그런데 자신의 할아버지가 미국에서 영화 음악을 하려면 우선 한국에서 한 편의 영화라도 만들어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했는데 자신은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배우랑은 작업할 생각이 없고 자신이 마음에 드는 목소리를 가진 배우, 그러면서도 영화 주제에 맞게 노래도 할 줄 아는 배우는 설아가 유일했기 때문에 설아를 찾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어….”
이야기도 왠지 익숙했다.
“그런데 이 사람 능력은 있는데 뻥은 좀 센 거 같아요.
이제 조만간 자신의 노래가 빌보드에도 오를 거라는데 검색해보니까 아직 없는 노래더라고요.
그래서 이 노래 아직 없는데요? 라고 했더니 이제 마무리 작업 마치고 다음 달이나 다 다음 달에 발매한다는 거예요.”
“…. 혹시 곡명이 뭐라고 하던가요?”
민수는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진짜인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서서히 민수의 등골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라더라? Stay, Don’t leave me? Just Empty? 이런 노래라는데요.”
“아….”
민수의 입에서 바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민수는 이 남자가 진짜 그 남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이 낳았다고 끝없이 빨아대던 미국의 천재 작곡가 겸 뮤직 디렉터.
민수는 예전에 재미교포를 한국이 낳았다는 게 말이 되냐고 언론사를 비웃었었다.
그리고 하도 떠들어대서 아무리 다른 일에는 관심이 별로 없던 민수라도 이 남자를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설아가 저렇게 말하지만 실제로 저 노래가 정말 몇 달 후에 빌보드를 차트 최상위에 위치하게 된다.
그리고 작곡가가 재미교포라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그런 일들이 벌어진 것이었다.
천재 작곡가 겸 뮤직 디렉터 크리스 건.
이 남자를 천재라는 말 외에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빌보드에 숱하게 많은 곡을 올리고 결국 자신이 꿈꾸던 아카데미 음악상은 물론 그래미 어워드에서도 프로듀서상을 차지한다.
영화에 관련된 일이라 민수도 기억한다.
미국의 거장 감독들이 크리스 건을 마법사라고 불렀었다.
크리스 건의 음악은 영화를 몇 배나 아름답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고 말이다.
“허…참….
혹시 그분 작곡가 명이 크리스 건이라고 하던가요?
영어 이름은 크리스 오 고요?”
설아의 두 눈이 순간 동그래진다.”
“어? 오빠 아세요?
진짜 유명한 분인가?”
맞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보니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예전부터 모국에 애착이 심했던 조부가 자신의 음악을 넣은 한국 영화를 보는 게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었다고, 하지만 자신은 귀가 너무 까다로워 조건에 맞는 배우를 찾을 수가 없어서 한국에서는 영화를 만들지 못했는데 조부가 돌아가시기 전에 결국 영화를 못 만든 것이 한스럽다고 말이다.
훗날 크리스 건은 인터뷰에서 그때 자신이 그냥 신념을 꺾어야 했다고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시기인가 보다.
생각해 보면 전생에 세라가 데뷔한 것이 23살 때쯤인가 그랬으니 적어도 내년 이후였다.
전생보다도 설아가 더 빨리 데뷔하는 바람에 이런 기회가 생겼나 보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니 대충 시나리오가 나왔다.
크리스 건은 점점 몸이 안 좋아지시는 조부 때문에 서둘러 한국에 온 모양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의 음악이 들어간 한국 영화를 만들어 보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가 프로듀싱한 앨범이 발매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결국 그는 그냥 무명 작곡가에 불과했고 무명 신인 음악 감독이 시나리오를 덜렁 들고 와서 영화 제작사를 찾아가 봤자 그 시나리오를 써줄 리가 만무했다.
설아 말이 시나리오는 그냥 무난하다고 했었으니까.
마음이 급한 크리스 건이 바로 자신이 찍은 배우인 설아부터 찾아온 거겠지.
요즘 인터넷에서 윤 엔터의 규모가 생각 이상이고 자본도 충분하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으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설아가 자신의 말을 못 믿을 거 같아 능력부터 보인 게 아닐까?
크리스 건이라면 설아에게 그런 훌륭한 조언을 해 준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긴 아까 그 음악을 생각하면 정말 못 믿을 수가 없었다.
“설아 씨.
이거 하죠.
설아 씨가 좋아하는 노래 연기 둘 다 할 수 있는 영화네요.
그리고 주연이고요.
감독? 제작사? 투자사? 까짓것 언제 그런 거 생각하고 우리가 영화 만들었나요?
그냥 대표님한테 가서 만들어 달라고 하세요.
그럼 대표님이 다 알아서 하실 거예요.
대표님 능력 아시잖아요.”
설아는 민수가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화색을 띠었다.
솔직히 하고 싶었지만 확신은 없었는데 민수의 말을 듣고 나니 용기가 난 것이었다.
게다가 복덩이 민수가 찬성한 일이 어그러질 리가 없었다.
“응원해 줘서 고마워요. 오빠. 바로 가서 허락부터 받아야겠어요.”
설아는 활짝 웃으며 민수를 와락 껴안고는 단호한 표정으로 바로 대표실로 뛰어 올라갔다.
정말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니 아마도 영화 자체보다 그 음악과 배역이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솔직히 영화의 흥행은 알 수 없다.
크리스 건의 음악이 도움은 되겠지만 그게 흥행을 절대적으로 보장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크리스 건이랑 작업하는 거 자체만 해도 설아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OST 녹음은 크리스 건이 직접 디렉팅 할 테니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크리스 건이라니.
행운이 제 발로 설아를 찾아왔다.
대표실 윤 대표는 자신을 조르는 설아의 말에 난색을 보였다.
아무 경력도 없는 음악 감독이란 녀석이 가져온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 거고 거기에서 주연을 하겠다니 이건 너무 심했다.
그냥 통째로 영화를 하나 만드는 격이지 않은가.
투자는 자신이 한다 쳐도 제작사부터 스태프들, 감독, 배우들까지 구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지금 들어오는 다른 대본도 제법 있는데 굳이 이 영화를 해야 하나 의문이었다.
하지만….
“아빠. 진짜 이거라니까요.
이걸 하고 싶다고요.”
저렇게 설아가 계속 조르니 마음이 또 약해졌다.
“민수 오빠도 딱 이거라고 했거든요.
알죠? 소속사 최고 승률, 진짜 승부사, 복덩이 정민수!
저도 이게 하고 싶단 말이에요.”
“끙….”
농담 삼아 사람들이 하는 말이지만 정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자신이 설아가 실패할까 두려워 말리는 건 아니었지만 이왕이면 잘되는 게 좋긴 했다.
마음속으로 이미 허락한 윤 대표는 머리를 굴려 앞으로 뭐부터 구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굳히고 생각해보니 의외로 간단했다.
“후. 알았다. 녀석아.
그 음악 감독님부터 모시고 와.
이야기부터 좀 해봐야지.”
윤 대표의 말에 설아가 화색을 지었다.
윤 대표가 허락한 이상 이 영화는 만들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자신은 연기랑 노래만 잘하면 되었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