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39화 (239/325)

#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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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 민수가 “귀의”에 출연하기로 한 날이 되었다.

일주일간의 짧은 시간 동안 민수는 수술 장면과 복잡한 의학 용어를 외우느라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이제 수술 장면의 연출은 어느 정도 머릿속에 그려놓은 상황이었고, 대사만 제대로 처리하면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르는 울분은 풀 길이 없었다.

“귀의”의 촬영장.

촬영장에 도착한 민수는 피디와 배우들의 열띤 환호를 받았다.

“귀의”를 책임지고 있는 피디는 지정욱 피디.

예능에는 스타 피디가 존재하고 드라마에는 유명 작가가 있을 뿐 스타 피디는 없었지만, 만약 드라마 쪽에 스타 피디를 꼽으라면 아마 사람들은 지정욱 피디를 선택할 것이다.

작가와 상관없이 이미 세 편의 드라마로 시청률 탑을 기록하였고, 지금 “귀의”조차 30%에 근접한 시청률을 기록 중이었다.

이미 드라마 쪽에서는 지정욱과 함께하면 최소 20, 믿고 쓰는 지정욱이라는 말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배우들의 면모도 상당했다.

태준 말고도 여자 주연에 유민영, 주조연에 최성진, 김진아, 그리고 영화계에서도 인정받는 조연 배우들이 여럿 보였다.

그야말로 돈 좀 제대로 써서 대작을 만들어보겠다는 구성이었다.

이렇게 유명한 피디와 이름있는 배우들이 다 민수를 반겨 줬지만 민수는 기분이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

이들이 자신을 이렇게 열렬하게 환영해 주는 건 아마 오늘 자신이 할 연기가 어떤 것인지 들어서일 것이다.

민수는 이런 뻔뻔한 대본을 쓴 작가님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작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도 자주 촬영장을 찾는 작가님이라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민수는 작가가 자신을 피해 도망갔다고 확신했다.

작가들이 가끔 배우한테 몹시 어려운 연기나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한 후에는 촬영장에 얼씬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하하하. 정 배우. 난 정 배우를 환영하네.

준비는 잘해 왔겠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너스레를 떠는 태준의 모습에 민수는 기가 막혔다.

그리고 태준은 진짜 자신의 말대로 일주일 동안 소속사를 전혀 방문하지 않았다.

그전에는 보지 말고 촬영장에서 보자고 했던 말은 빈말이 아니었는데 이는 민수의 항의와 거절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태준의 술수였다.

“와. 진짜 더러운 놈….”

민수가 이를 바득 갈았지만 태준은 싱글벙글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가 당연히 완벽하게 준비 왔을 거라고 확신했다.

고생스럽긴 했겠지만 민수의 역량을 생각해 봤을 때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다만 엄청 피곤하고 힘들 뿐이지.

“자자. 시작합시다.”

민수까지 합류한 촬영장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술 장면에서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니 평소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태평(윤태준)은 이번 수술의 집도의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흉부외과장 지성을 찾아왔다.

태평은 이 수술이 자신이 성공 할 수 있는 수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과장님. 대체 왜죠? 바티스타 수술(확장성 심근병증에서 심실의 확장으로 인한 심실 기능 저하를 되돌리기 위해 심실의 부피를 줄이는 심실 용적 축소술의 일종)은 이미 제가 성공한 경험이 있는 수술입니다.

제가 집도하게 해 주십시오.

전 자신 있습니다.”

지성은 강하게 자신감을 보이는 태평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성도 태평의 수술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환자의 증상이 단순한 확장성 심근병증(심장 근육의 이상으로 인해 심장이 확장되고 심장 기능은 저하되는 심장 질환)이면 당연히 태평에게 수술을 맡겼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징후들이 계속 발견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자네도 잘 알지 않은가. 이건 단순한 확장성 심근병증이 아니야.

실제로 수술에 들어가면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몰라.

게다가 자네가 하려고 하는 건 단순한 바티스타 수술이 아니라 바티스타-테리사(가상) 수술이겠지?

그 수술의 성공을 어떻게 장담한단 말인가?”

태평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여러 이상징후가 나타나자 태평은 이 환자를 단순히 바티스타 수술로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바티스타 수술을 조금 변형한 바티스타-테리사 수술법으로 수술할 생각이었다.

최근에 알려지게 된 새로운 수술 방식은 이 환자의 상황에 아주 잘 맞아 떨어졌다.

이 수술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바티스타 수술에서 조금 복잡할 뿐이었으니 자신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수술을 집도하실 집도의는 존스 홉킨스의 닥터 제임스 리.

정말 어렵게 초빙한 분이네.

세계적인 흉부외과의이니 자네도 이름은 들어 봤을 거야.

그러니 자네도 이번 수술을 참관하게.

아마 배울 점이 많을 테니까.”

“하….”

지성은 단호하게 태평의 요구를 거절했다.

태평은 지성의 태도에 자신이 이 수술을 절대 집도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미 외부에서 집도의까지 모시고 왔다니.

태평은 수술의 집도의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흉부 외과의라는 이야기를 듣고 불쾌감이 더 커졌다.

상대의 높은 명성 때문에 자신의 수술 실력이 폄하되고 있다는 느낌에서였다.

태평은 자신의 수술 실력에 자부심이 차 있었다.

아무리 세계적인 외과의라고 해도 도저히 자신보다 뛰어날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수술할 때마다 명장이 빙의하는 귀신 들린 의사, 귀의였으니까 말이다.

그 시간.

제임스 리도 자신의 팀원들과 수술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보시다시피 우심실이 부풀어있는 DCM(dilated cardiomyopathy: 확장성 심근병증)입니다.

다만 문제는 저 늘어나 있는 우심실이죠.

일반적인 DCM에서 저런 형태가 나올 리는 없습니다.

아마 Tricuspid valve (삼첨판막 : 우심방에서 밀어낸 혈액을 다시 역류하지 않게 차단해주는 역할을 함) 쪽 문제가 겹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당연히 tricuspid regurgitation(삼천판 역류) 수술을 병행해야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수술 시간이 너무 길어집니다. 닥터.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냥 바티스타-테레사로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만약 Tricuspid valve에 문제가 생겼다면 여기에서부터 여기까지 절개한 후 이쪽에서 여기까지 CABG (Coronary artery bypass graft : 관상 동맥 우회술)로 연결하고 바로 Tricuspid regurgitation 수술을 시작합니다.”

“끙….”

“보시다시피 시간이 촉박합니다.

수술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환자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아마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하지만 할 수 있습니다.”

그 뒤에도 한참이나 수술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졌다.

제임스 리는 반론을 받지 않겠다는 태도로 수술 방법을 결정했다.

팀원들은 작게 한숨을 쉬었지만 익숙한지 제임스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무리 과정이 복잡해도 제임스가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수술 날.

태평은 그날 처음으로 세계적인 외과의라는 제임스 리와 마주할 수 있었다.

제임스 리는 벼려놓은 칼날처럼 싸늘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아주 냉정하고 차가운 모습으로 수술실로 들어서는 제임스의 모습에 태평은 작게 침을 삼키며 자리를 비켜줄 뿐이었다.

태평은 참관실에 앉아 수술을 진행하는 제임스를 심각한 표정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자신이 바티스타-테리사로 수술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환자를 세계적인 외과의라는 제임스가 어떤 방식으로 수술할지 궁금해졌다.

수술이 시작되고 제임스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흉부를 가르고 갈비뼈를 들어내자 드디어 문제의 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역시.”

태평은 환자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자 자기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분명 제임스도 그걸 알 테니 자신이 생각한 방법으로 수술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제임스의 움직임은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어…. 저렇게 한다고?”

제임스가 빠르게 수술을 진행하는 동안 태평은 말문이 막혔다.

제임스가 선택한 방법은 가장 고전적인 방법, 가장 안정적인 방법이었다.

자신도 저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렇게 하면 수술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시간도 너무 많이 걸린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면 지친 환자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마… 자신이 없는 거야?

수술에 실패할까 봐?”

바티스타-테리사 수술은 시간을 절약할 수는 있지만 그만큼 난이도가 높았다.

태평은 고전적인 방법을 선택한 제임스를 보며 수술에 실패해 자신의 명성을 더럽힐까 봐 두려워 어려운 수술을 선택하지 못하는 고인 물 같은 선배들이 떠올랐다.

수술에 성공했으나 수술 시간이 딜레이 되어 환자가 사망한다고 해도 의사는 책임이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수술 방법으로 수술했다가 수술에 실패하면 의사는 책임을 지게 된다.

“하….”

태평이 분노하는 사이에도 수술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진행된다면 분명 수술 시간이 너무 길어져 환자가 무사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생각에 태평이 화를 억누르지 못할 때, 이변이 일어났다.

제임스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수술속도가 놀랍도록 빨라진 것이었다.

특별하지는 않았다. 다면 빠르고 정확했다.

문제 부위를 거침없이 제거하고 바로 상처를 봉합한다.

그리고 이런 놀라운 속도에 맞춰 정확하게 보조하는 팀원들의 지원.

“빨라…. 하지만….. 이 정도로는…..”

수술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직도 시간이 모자랐다.

“헉…..”

그러나 제임스의 능력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섬세하게 절제해야 하는 우심실 부분이 마무리되자 이제 남은 것은 전체적인 봉합.

이 상황에서 제임스의 신들린 손놀림이 수술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태평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태평을 연기하는 태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수가 벌어진 부위부위를 촘촘하게 봉합해 가는데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마치 필름을 빨리 감기로 돌리는 느낌이었다.

태준도 수술장면을 위해 몇 주나 연습을 해봤기 때문에 저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런데 일주일 정도밖에 연습하지 않은 민수가 저 정도라니.

지금 저 장면에서만은 민수에게서 숙련된 외과 의사 이상의 포스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촬영 전체를 컨트롤 하는 지정욱 피디도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하…. 저 장면 살릴 수 있겠어요?”

“네, 피디님. 민수 씨 얼굴이랑 손 쪽으로 포커스를 맞추면 얼추 될 것도 같습니다.”

“그래요. 민수 씨가 엄청 준비해 왔는데 나중에 대역이니 뭐니 개소리 안 나오게 카메라 앵글에 주의해 주세요.

민수 씨도 얻어가는 게 있어야죠.”

지정욱은 큰소리치는 태준의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솔직히 이 장면을 가장 반대한 사람은 자신일 것이다.

작가가 웃기지도 않는 짓을 한다고 생각한 정욱은 어떻게든 이 장면을 뺄 계획이었는데 태준이 확실한 배우를 데려올 수 있다고 하니 그럼 한번 보고 결정하자고 했었다.

자신의 드라마의 총 책임자였고 그렇기 때문에 만약 장면이 어설프면 과감하게 삭제해야 했다.

그런데 이건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저걸 저렇게까지 준비해 오다니 그렇다면 자신도 최선을 다해줘야 옳았다.

정욱의 편집 혼이 불타고 있었다.

그는 저 장면을 무조건 이번 회차의 명장면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섬세하고 예민한 처치를 해야 해서 지체되던 수술은 그렇게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결국 환자가 버틸 수 있는 예상 시간 보다 훨씬 빠르게 끝난 수술.

제임스 리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다.

바티스타-테리사 수술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태평의 예상을 완전히 박살 낸 수술이었다.

“…..대체 왜지?”

태평은 저 정도 기량을 가진 외과의가 새로운 수술법에 익숙지 않아 수술에 실패할까 저어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저 수술은 저렇게 고생할 게 아니라 더 화려하게 더 빠르게 끝낼 수가 있었다.

태평은 자기도 모르게 수술을 마친 제임스에게 다가갔다.

수술을 마치고 나온 제임스의 모습은 한 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놀라운 수술 실력을 가진 저 의사는 체력조차 엄청난 것이었다.

수술실에서 사는 외과의가 저런 체력이라니, 정말 대단한 자기 관리였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작게 한숨을 쉬며 나오던 제임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심각한 표정의 젊은 의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꼭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라 제임스도 그를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닥터…?”

“흉부외과 전문의 김태평입니다. 닥터 제임스.”

“그래요, 닥터 김. 무슨 일이죠?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왜 그런 어려운 방법을 선택하셨습니까?

닥터 제임스라면 더 쉽고 빠른 수술법을 선택할 수 있으셨을 텐데요.”

제임스는 태평의 말에 작게 실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낯설지 않은 질문이었다. 항상 그런 비슷한 질문을 받곤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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