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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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는 넋이 좀 나간 상태로 윤 대표, 민 여사랑 이야기를 마쳤다.
앞으로의 스케줄과 작품 일정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다행히 민수에게 악플에 대한 질책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딸 사랑이 지나친 윤 대표라도 그 일을 민수의 책임으로 돌릴 정도로 분별력이 떨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기가 좀 불편해 보이긴 했다.
저건 아무래도 설아가 쓸데없이 욕을 먹은 것에 대한 불만이 분명했다.
귀여운 딸 아이가 남에게 쓸데없이 욕을 먹었을 때 기분 좋은 아버지가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반면 민 여사는 민수에게 은근히 눈치를 줬다.
이건 질책이라기보다 설아가 민수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슬쩍슬쩍 이야기하는데 앞으로 설아에게 잘하라고 압박을 넣는 분위기였다.
‘설아에게 잘해. 널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데 너도 잘해야지? 안 그래?’
민수는 민 여사의 표정에서 이런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민수는 윤 대표에게 올해는 이제 작품 활동을 할 생각이 없고 영화에 관련된 스케줄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정을 비울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당연히 CF가 포함되어 있었다.
윤 대표는 민수의 말을 듣고 잠시 고심하다가 뜻대로 하라고 말하면서 들어오는 스케줄을 계속 전달은 해 줄 테니 혹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했다.
한창 뜨거울 때 태업에 들어간 셈이었지만 윤 대표는 민수의 뜻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민 여사는 민수에게 다른 건 상관없는데 지금 후원하고 있는 아동 복지재단의 CF는 꼭 찍어 달라고 당부했다.
아동 복지재단이 민수를 메인 모델로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다는데 민수도 이 일은 해주기로 했다.
돈을 받는 일은 물론 아니었지만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스케줄에 대한 이야기까지 마친 민수는 한숨을 쉬며 제2 연습실로 향했다.
나중에 설아가 올 때까지 대충이라도 연습을 해볼 생각이었다.
“하, 망할 윤태준 진짜…..”
민수는 제2 연습실에 준비된 자료와 도구를 살펴보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가장 문제는 수술장면.
당연히 수술 같은 걸 해봤을 리가 없으니 생소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진짜 수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럴싸하게 보이기만 하면 되었으니 연습만 하면 충분히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민수는 지금까지 의학 드라마에 나왔던 수술 장면들을 살펴보며 어떻게 하면 더 멋진 장면을 보일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음…. 확실히…..”
드라마에서 피가 흥건한 내부 장기들을 계속 비추는 것은 말도 안 되었으니 수술장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절개, 그리고 봉합이었다.
그리고 민수가 연기할 수술 장면에서도 이 점이 두드러졌다.
섬세한 손놀림으로 날렵하게 절개하는 장면과 화려하고 빠르게 봉합하는 손놀림.
이 정도만 잘 연출할 수 있어도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들에게 제임스 리가 대단한 의사임을 표현할 수 있었다.
“봉합을 화려하고 빠르게 하는 게 중요하겠네.
그리고 다행히…. 내가 몸으로 하는 건 좀 괜찮은 편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은 일주일의 시간은 자신의 대사를 외우는 것과 화려하고 멋진 봉합기술을 연마하는 것으로 다 보내야 할 거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늘을 잡고 씨름하고 있는데 제2 연습실 문이 열리며 설아가 고개를 쏙 밀어 넣었다.
예전에 자신과 여행을 가자고 찾아왔던 그 모습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히힛. 오빠 왔어요?”
민수는 태준의 말을 듣고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이렇게 웃고 있는 설아를 실제로 보고 나니 이제는 정말 안심할 수 있었다.
“네, 설아 씨. 왔어요.
제법 길었죠?”
연습실에 들어온 설아는 민수가 바늘을 들고 끙끙대고 있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민수 오빠 다음에 무슨 의학 드라마나 영화에 들어가세요?
갑자기 웬 수술 연습이에요?”
민수는 설아의 말에 아까 태준이 능글맞게 카메오를 요구하던 모습이 생각나 울컥했지만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설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허….이 오라버니가 진짜…..”
설아도 왠지 울컥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민수도 자신의 고충을 이해한 듯한 설아의 모습에 작게 위안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아의 말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도 민수 찬스를 한 장면 밖에 못 써먹었는데 이 정신 나간 오라버니가 이런 짓을 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세 장면 정도는 넣어 달라고 할걸.”
“…. 설아 씨?”
“아? 흠흠. 오라버니가 너무 심했네요?
그래요. 심했어요. 이건 너무 과해요.”
뒤늦게 설아가 말을 바꿨지만 짜게 식은 민수의 눈빛이 변하지는 않았다.
이게 아니다 싶은 설아는 실망스러워하는 민수에게 살짝 안기며 급하게 말을 돌렸다.
“헤헤. 수고 많으셨어요. 오빠.
완전 월드 스타가 되어 돌아오셨네요.
역시 민수 오빠는 멋져요.”
설아의 따듯한 여체가 부드럽게 자신에게 안겨 오자 민수는 헛웃음을 지으며 기분을 풀 수밖에 없었다.
뭐 어떤가.
이 정도 서비스(?)라면 자신이 기분을 풀기에 충분하지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드 스타는요.
그냥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죠.”
“에이, 그래도 천루 쪽에서 전세기로 모셔왔잖아요.
그 소식이 지금 파다하게 퍼지고 있어요.
월드 스타 대우라면서요.”
“그건 그냥 비즈니스죠.
내가 당신을 이 정도 대우해 준다.
그러니 다음에도 나랑 같이?
뭐 이런 거 아니겠어요?
나쁜 기분은 아니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네요.
돈 지랄이라는 생각도 좀 들고, 중국에서 한국까지 몇 시간이나 걸린다고 이런 짓을 하는지 원.”
민수도 이렇게 말하지만 천루에서 자신을 많이 신경 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기억이 있으니 만약 같은 조건이라면 다음에도 천루를 선택할 가능성이 컸다.
민수의 말대로 비즈니스지만, 그래도 효과가 있다는 뜻이었다.
설아는 돈 지랄이라는 민수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민수는 그렇게 웃는 설아를 바라보며 자신 때문에 괜한 고초를 겪은 설아에게 진지한 사과를 건넸다.
“진짜 저 때문에 설아 씨가 쓸데없는 일을 겪었네요.
드라마 때문에 신경 쓸 일도 많았을 텐데.
미안해요.”
“헤헤.
어때요? 저 좀 믿음직하지 않아요?
민수 오빠 옆자리를 차지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요?”
당당한 설아의 말이 왠지 자신이 사고뭉치라 자신의 곁을 차지하려면 트러블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로 들려 기가 막히긴 하지만 반론하기 힘든 것이 정말 사실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항상 사고가 따랐고,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하면 민수에게도, 그 상대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설아처럼 이런 일에 당차게 반응해 주는 여자가 자신의 곁에 있는 건 참 행운이었다.
“그러네요.
설아 씨 밖에 없어요.
제 옆에는 설아 씨만 있으면 되죠.”
민수가 정말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설아는 움찔하며 얼굴을 붉혔다.
설아는 저런 눈빛의 민수는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가 점점 어디서 요망한 것만 배워오고 있는데 이건 정말 곤란했다.
자신이 원하는 건 상대가 자신에게 더 반하는 것이지, 자신이 상대에게 더 빠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디서 그런 요망한 눈빛을….”
“네?”
민수는 설아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아뇨.
어쨌든 오라버니가 만행을 저지른 것은 확실하네요.
이건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요.”
멍하니 민수를 바라보던 설아는 민수의 반문에 정신을 차리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당장 태준에 대한 진압(?)이 들어갈 기세였다.
“그래요. 우리 윤 배우를 어떻게 혼내줄지 같이 생각해 봐요.”
민수는 그런 설아의 모습이 귀여워 보여 흐뭇하게 웃으며 동의했다.
태준이 알았으면 경기를 일으킬 모습인데 민수의 눈에는 마냥 귀엽기만 했다.
한창 드라마에 바쁜 설아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아마 5월이 되어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는 이런 양상일 것이다.
그러니 결국 자신의 영화가 개봉되는 5월이 완전히 지나야 설아와 좀 편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민수는 별다른 스케줄 없이 연기 연습을 하며 그냥 편하게 지냈다.
유일한 스케줄인 아동 복지재단의 CF 라고 이름 붙은 공익광고의 촬영을 마치고 다른 스케줄은 일절 소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동안 계속 연습을 계속하자 이제는 어느 정도 화려한 봉합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윤 엔터 내에 상주하고 있는 건 민수 만이 아니었다.
“오, 민수 형님? 요즘 항상 계시네요.”
이제 다음 달에 주말 드라마에 들어가기로 계약을 마친 은우가 대본을 받아 들고 연습실에서 연습에 한창이었다.
“하. 진짜 여기 연습실 끝내주는데요.
딱 제가 원하는 곳이에요.”
은우는 윤 엔터의 연습실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특히 자신의 연기를 방송 카메라로 찍은 장면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에 큰 만족을 표했다.
하긴 저 카메라 가격을 생각하면 정말 상상하기 힘든 연습실이긴 했다.
민수도 처음에 정말 놀랐으니까.
“그런데, 민수 형님은 대체 어디에 사시길래 맨날 이렇게 일찍 계시는 거예요?
저보다 먼저 가시는 것도 한 번도 못 봤는데…..”
최근에 합류한 은우는 아직 민수가 옥상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는지 항상 소속사에 있는 민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 몰랐어요?
제가 저 위에 살 거든요.
8층 옥상에 제집이 있어요.
그러니 굳이 어디 갈 이유가 없죠.”
“예?! 와…. 세상에.”
은우는 정말 놀란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여기 있으면 밥도 알아서 먹기 편하고 연습하기도 편하고 저 위에 7층에 헬스장도 있어서 따로 운동하러 나갈 필요도 없잖아요.”
민수의 말에 은우는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식구 식구 하더니…. 진짜 식구였네요.
여기서 살고 있었다니. 생각도 못 했어요.”
민수의 말이 타당하긴 했다.
윤 엔터의 밥은 생각보다 맛있었고, 헬스장까지 있었으니 살기에 충분히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게 말이 그렇지 개인 생활이나 사생활의 자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은우는 민수가 참 별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저렇게 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대단하네요. 진짜.”
은우는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하하. 나름 재미있어요.
지금은 다 바빠서 그런데 한가하면 다들 제집에 올라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곤 하거든요.
완전 아지트 같은 곳이죠.”
그리고 민수가 예전에 자신의 방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자 은우는 이제야 윤 엔터 배우들의 결속력이 강하다는 이야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연예인은 외로운 직업이기 마련인데 같은 일에 종사하고 같은 성향을 가진 또래의 배우들이 그렇게 시간을 공유한다면 결속력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약 자신도 거기에 끼어서 같이 시간을 가졌다면 다른 배우가 불합리한 일을 겪으면 바로 나설 거 같았다.
친한 친구가 안 좋은 일을 당하면 같이 울분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이 배우들은 서로에게 비즈니스적 파트너가 아닌 것이다.
“헤…. 좋네요. 그런 자리가 있으면 저도 다음에는 같이 하고 싶어요.
사실 친구들은 많지만, 이쪽 친구들은…..
하. 그 사람들을 친구라고 할 수 있으려나.
어쨌든 진짜 마음 맞는 사람들은 많지 않거든요.”
은우는 이곳의 배우들이라면 자신의 처지와 마음을 이해해 줄 거 같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남을 전혀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필요가 없는 배우들이었으니까.
은우는 자신이 이곳을 선택한 것이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원들이 서로 물어뜯지 않는 것만 해도 만족, 연습실이나 연습환경이 좋은 것은 대만족이었는데 배우들하고 진지하고 진솔한 친분을 나눌 기회까지 있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곳이었다.
“그래요.
다들 은우 선배를 좋아할 거에요.
연기에 열정이 있는 배우를 싫어할 사람은 없거든요.”
민수는 은우처럼 밝은 사람이 하나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자신이랑 소희는 전체적으로 좀 어두웠고 태준과 설아는 장난기가 너무 지나쳤다.
그나마 정상인은 수연인데, 요즘 보면 수연까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은우가 합류하면 그나마 정상인이 하나 늘어나는 거니 자신은 완전 찬성이었다.
하지만 민수는 그중 가장 비정상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