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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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은 떨떠름한 표정의 민수를 보며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말하지 않아도 민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여서였다.
“하하하. 이거야 원.
정 배우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딱 보이네.
연기력만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거지?
뭐, 배우라면 누구라도 당연히 그런 욕망이 있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거기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어.
지나 보니까 이게 순서는 상관없더라고.
뭐 어때.
있는 연기력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보여주기만 하면 되지.
그냥 보여줄 기회가 더 많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
경험담인 듯한 태준의 말에 민수의 표정도 조금 밝아졌다.
“게다가 이게, 인기에는 적당한 시기가 있는데 연기력은 그게 없더라고.
그래서 차라리 인기를 얻는 게 연기력 인정보다 중요할 때도 많고.
야, 솔직히 우리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그냥 남 흉내나 잘 내는 잘생긴 옆집 형이랑 뭐가 다르겠냐?”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뉘앙스인데, 스포츠 스타들이 팬들에게 불성실할 때 사람들이 흔히 하는 비유랑 왠지 좀 비슷한데, 내 기분 탓이겠지?”
태준은 민수의 지적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과장된 행동을 보였다.
“하하. 와. 이게 들키네.
정 배우, 많이 달라졌네. 조심해야겠어?”
민수는 태준의 태도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녀석은 항상 시도 때도 없이 이런 식이다.
“그래. 시사회 때는 워낙 바빠서 못 물어봤는데 다른 식구들은 어때?
어차피 너랑 설아 씨는 드라마 때문에 별다른 일이 없을 테지만 다른 식구들은 전혀 다르잖아?”
민수는 고민이 어느 정도 해결되자 문득 다른 식구들이 생각났다.
특히 새롭게 들어온 은우라든지 중국에서 활동하느라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소희는 다른 배우들과의 친분이 그렇게 깊지 않았으니 더 신경 쓰였다.
“아아. 뭐. 다들 잘 지낸다고 해야 하나?
수연이야 뭐 푹~ 쉬는 중이야.
언제까지 쉴지는 모르겠지만 CF 몇 개 찍고는 집순이 모드인데.
자기 말로는 어쩌면 올해 통으로 쉴 수도 있다나?
소속사 입장에서는 뒤로 넘어갈 일이긴 한데…..”
“뭐 별수 있나. 쉬고 싶으면 쉬어야지.
그러고 보면 수연 선배 은근히 게으르단 말이야.”
“얘가 욕망이 없어. 욕심도 없고.
아니면 추구하는 게 달라서 그런가?
확실한 건 나랑 생각하는 게 완전 다르다는 거야.”
“그래서. 애정전선에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에?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좋아하는 건 잘나가는 배우 이수연이 아니라 그냥 인간 이수연 인걸.
연기할 때도 근사하긴 하지만, 수연이는 그냥 인간 자체가 멋져서.”
민수는 흐뭇하게 웃는 태준을 보니 그들의 애정전선이 이상 없음을 잘 알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말을 시작할 때부터 만개한 듯 웃는 얼굴이었으니 괜히 물었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네네. 그럼 은우 선배는? 이 선배 이제 완전히 연기 강습에 한창이지 않나?”
“아아. 은우. 진성 선생님이 맘먹고 가르치셨지.
그런데 생각보다 진척이 빠른 모양이야.
벌써 실전부터 들어가라는 말이 나왔거든.”
“오호.”
실전부터 들어가라는 말은 이제 기본적인 부분들은 다 가다듬어졌다는 뜻이었고 실전을 통해 자신의 연기 스타일을 정립하라는 의미였으니 생각보다 진척 상황이 빨랐다.
이 선배가 자기 생각보다 더 재능이 있었나 보다.
“사실 드라마 찍는 중에 어느 정도 감은 잡은 거로 보였거든.
드라마 마치고 섬세한 표현이나, 놓치기 쉬운 것들 위주로 배운 모양이야.
확실히 진도가 빠르긴 하지.
이미 실전에서 갈고 닦은 면도 있으니까.”
“흠…. 그나저나 윤 배우가 보기에는 어때?
연기 보는 눈은 솔직히 널 따라올 수가 없잖아?”
태준은 민수의 말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남에게 인정받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괜찮아. 워낙 먹어 주는 외모잖아.
화사한 얼굴인 데다가 수연이가 데려왔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뭐.
그 정도면 진짜 괜찮은 배우지.”
“음…..”
태준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준수하긴 한가 보다.
연기 보는 눈은 윤 대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까다로운 태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각보다 마인드도 괜찮아 보이고.
이번에 주말 드라마로 들어간다고 했거든.
좀 장기적으로 꾸준히 다양한 연기를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야.”
“주말드라마? 은우 선배가 주말 드라마에 들어간다는 건 페이 컷 하겠다는 거네?
한창 잘나갈 때 주말 드라마에 페이 컷이라…..”
기본적으로 가족 드라마의 성향을 가지는 주말드라마는 자연스럽게 출연하는 배우들이 많고 회차도 길기 때문에 출연료가 높은 배우들을 쓰기 어렵다.
그러니 “로열” 출연 이후로 출연료가 더 높아진 은우를 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데 주말 드라마에 들어가겠다는 건 자신의 출연료를 적당히 깎으면서 많은 배우와 부닥치며 연기를 가다듬겠다는 의도가 확실했다.
지금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젊은 배우가 하기에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을 윤 대표가 막을 리가 없으니 거의 확실하게 그렇게 되리라.
드라마 제작진? 아마 그들은 쌍수를 들고 반기지 않을까?
페이 컷 하겠다는 주연급 남자 배우, 그것도 지금 물이 오른 미남 남자 배우를 거절할 제작진은 아마 없을 것이다.
“주말 드라마에서 완전히 가다듬어서 이제 영화 쪽으로 가려고 하겠네.”
“아마? 그게 아니라면 그런 선택은 안 했겠지.”
민수도 은우의 선택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 드라마에는 은근히 조연급으로 연기력이 괜찮은 배우들이 많이 들어온다.
특히 가족 드라마의 특성상 원로 배우들도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으니 은우가 그분들과 자주 접촉하다 보면 배우는 바가 많으리라.
“소희 씨는 지금 중국에 있는데, 이번에 들어가려고 했던 드라마는 무산된 상황이야.
예산 때문에 제작사 쪽에서 새 투자자를 받았는데 그게 진룡인 모양이더라고.”
진룡이 투자자로 들어오면서 소희의 배역에 다른 배우를 원했던 모양인지 소희가 배역을 놓치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치졸한 짓인지 어이없기까지 했다.
“하. 참 그놈들도 어지간하네.
그러면서 자기들은 내 영화를 중국에 가져가겠다고?
얘들은 생각이 없나?”
하지만 지금 민수의 영화를 중국 쪽에 가져가겠다고 접촉을 시도한 진룡 본사의 행동을 생각하면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선후가 다르긴 한데, 웃기긴 하지.
아무래도 중국 쪽 본사랑 한국 지부랑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긴 한가 봐.
이런 식으로 서로 행동이 다른 걸 보면 말이야.”
“확실히 그렇긴 하네.
정말 이상하긴 해.”
“극단적인 경우는 진룡 미디어 코리아가 아예 독자 노선을 걷는 건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진룡 본사랑 연계하지 않는 진룡 미디어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진룡 미디어 코리아의 힘은 중국으로 컨탠츠를 자유롭게 수출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니 태준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진룡 미디어 코리아 측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고.
“뭐 남의 회사에 신경 쓰고 싶진 않네.
소희 씨가 마음이 많이 상했겠네.
그래서 중국에서 활동하기로 한 건가?”
“완전히는 아니고 잠시만.
그런데 너 형우 씨랑 연락하고 지내는 거 아니었어?
어떻게 나보다 더 소희 씨 상황을 몰라?”
민수는 태준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태준의 말이 맞긴 했다.
자신이 소희의 매니저인 형우와 각별한 사이였고 연락도 자주 하니 소희의 근황을 들었어야 정상이었다.
“연락이야 자주 하지.
문제는 이 놈의 형우가 프로페셔널한 매니저를 자처하면서 배우에 대한 정보는 일절 공개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그게 맞는 거긴 한데 이건 뭐.”
태준은 형우가 그냥 민수를 놀리고 싶어서 그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자신도 가끔 민수를 그냥 놀려주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네. 그게 진짜 매니저의 자세이긴 하지.”
하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민수가 자신에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 앞으로 생활에 유리했다.
적어도 주변에 나름 순수한 사람이 하나 정도는 있는 게 삶의 활력소가 된다.
“자. 그건 그렇고 중요한 게 남았잖아.”
“응?”
민수가 의아하다는 표정이자 태준은 얼굴을 굳히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어허. 정 배우 이러면 쓰나.
영화 활동까지 마치면 분명 카메오 들어와 주기로 했지?
지금이 적기인 거 같은데?”
“아아.”
분명 태준과 그렇게 약속을 했다.
사기를 당했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이제 와서 다른 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뭐. 그래. 하기로 했으니 해야지.”
민수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태준은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민수에게 건네었다.
오늘 자신이 연기한 대본인 줄 알았는데 애초에 저 대본을 주러 소속사에 왔나 보다.
“하. 아예 들고 온 거야?
이거 만나자마자 너무한 거 아니야?”
민수의 투정에도 태준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 이거 봐. 정 배우가 연기할 부분이야.”
아무리 의학 드라마라도 카메오의 특성상 별로 어렵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민수는 태준이 내미는 대본을 보며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민수가 연기할 배역은 닥터 제임스 리.
설정상 세계적인 심장 전문의 중 하나였고 점점 교만해져 가는 태평에게 경종을 울리며 극의 분위기를 바꿔주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배역을 연기하는 것에는 숨어 있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야. 이거 너무하잖아? 이게 카메오라고?
수술 장면까지 있는 건 진짜……
이걸 제작진이 허락했어?”
말이 카메오지 이건 그 회차의 중요한 조연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술 장면이나 회의 장면, 그리고 수술을 마치고 태평과 논쟁하는 장면까지.
적어도 드라마상으로 10분은 출연하는 배역이었다.
“하하하. 애초에 이걸 누가 하겠냐?
드라마 시작 전부터 결정된 사항이었어.
작가님이 진짜 이 장면을 넣고 싶은데 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절망하고 계시길래 내가 한번 찾아보겠다고 했지.
그리고 네가 한다니까 완전히 신나서 노래를 부르시더라고.
야, 덕분에 내가 이번 촬영을 얼마나 쉽게 했는지 넌 상상도 못 할 거다.”
처음부터 태준의 계략이었다.
극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이지만 할 사람이 없을 배역.
아마 그때 찾아왔을 때 이 배역을 맡길 생각으로 자신에게 수작을 건 것이 분명했다.
민수가 이 배역을 하자면 수술 장면부터 연습에 들어가야 했다.
한 장면을 위해 수술 장면까지 연습해줄 배우가 누가 있겠는가?
민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순간 예전에 설아가 태준의 계략이 거기서 끝날 리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이 녀석은 진짜 사기꾼이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이 배역을 맡기고 딴에는 촬영장의 스타가 되어 극진한 대우까지 받는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이 작가라도 이런 연기를 제대로 해줄 단역을 모셔왔으면 극진히 모셨을 것이다.
심지어 그게 지금 한창 최고의 주가를 날리고 있는 민수 자신이었다.
작가랑 피디 입장에서는 태준을 업고 다니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태준이 편하게 촬영하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허….”
민수는 허탈한 마음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하하하. 부탁해 정 배우. 그래도 일주일 정도 시간이 있거든.
그, 제2 연습실에 가면 내가 수술장면 연습할 때 썼던 자료랑 도구들이 그대로 있어.
그걸로 연습해와.
일주일이면 충분하잖아? 수술 장면은 1개뿐이고 대사는 그냥 외우면 되니까 말이야.”
실신하기 직전인 민수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태준은 끝까지 뻔뻔했다.
그리고 민수가 이를 바득 갈자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아.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그래. 난 이만 가볼게. 수고해 정 배우.
촬영 전까지는 보지 말자고~”
민수는 인사를 남기고 급하게 도망가는 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잠시 허탈함에 몸을 떨던 민수는 순간 울분이 끓어 올랐다.
이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서 일주일 동안 고생할 자신이 눈에 선해서였다.
분명 자신은 쉴 생각이었는데, 정말 일이 더럽게 꼬였다.
민수는 오늘의 수모를 잊지 않기로 했다.
두고 보자. 윤태준. 카메오로 흥한 자 카메오로 망한다고 너도 이런 만행을 고스란히 돌려받을 것이다.
민수는 이렇게 생각하며 대표실로 향했다.
저런 부탁을 들어주는 민수가 어쩌면 진정한 호구가 아닐까?
민수도 민수지만 그런 민수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태준도 참 어지간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