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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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로 착석한 민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스티븐의 말대로 지금 민수의 정신은 다른 곳에 있었다.
어제 생각지도 못한 기사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경악! 여배우에게 욕설, 성적 비하, 음담패설을 쏟아낸 범인이 여성으로 밝혀져!]
[악플러를 향한 철퇴. 연예계의 악플 문제 해결책은 있나.]
[배우 윤설아 SNS에 욕설로 도배. 그리고 단호한 대처.]
솔직히 자신이 너무 무심하긴 했다.
어차피 자신은 SNS도 취급하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건 소속사의 게시판뿐.
게다가 중국에서의 일정이 너무 바빴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 사이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분위기를 보니 설아가 자처해 안 좋은 이목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인 거 같았다.
그리고 영리한 설아였으니 그 뒤에 있을 일들은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그건 분명 자신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어이없는 건 자신이 없는 사이에 모든 일이 끝나 있었다.
범인들은 잡혔고, 자신의 게시판은 깨끗해졌다.
“하…. 괜찮다고는 하지만…..”
민수는 어제 급하게 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민수에게 설아는 밝은 목소리로 괜찮다고 했다.
설아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괜찮을 리가 없지.
음담패설 성적 모욕, 이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데.
설아 씨는 이제 겨우 22살이라고.”
항상 어른스러워 보이는 설아였지만 막상 따지고 보면 22살에 불과한 어린 아가씨였다.
그런 아가씨가 그런 모욕을 듣고 과연 괜찮을까?
민수는 어제의 설아의 목소리조차 연기가 아닐까 의심되고 있었다.
지금 민수가 초조함을 느끼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빨리 돌아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설아가 별 탈 없이 무사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비행기는 쏜살같이 날아 민수는 곧 인천공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많이 모인 기자들을 발견하고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족속들이었다.
지금 돌아가도 드라마 촬영 중인 설아를 만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조차 민수는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달려드는 기자들을 적당히 상대해 준 민수는 서둘러 소속사로 돌아갔다.
소속사 입구에 도착한 민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끔찍한 악플과 결국 참다못해 고소를 결심한 배우.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조처를 하느라 소속사는 한창 바쁠 것이며, 윤 대표의 치명적인 딸 사랑을 생각해 보면 소속사 분위기도 많이 침체되어 있을 것이다.
민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올라가는데 소속사는 얼마나 바쁜지 자신의 예상대로 완전 북새통이었다.
다만….
“이거 분위기가…..”
바쁘긴 한데 뭔가 활기가 넘치는 것이 자신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뭔가 이상했다.
민수가 당황하는 사이 헐떡이며 수정이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서둘러 뛰어 올라온 민수 때문에 급하게 따라온 수정은 멍하게 직원들을 바라보는 민수의 등짝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아니, 배우 오빠 갑자기 왜 이래요?
제가 괜찮다고 했잖아요. 사람 말을 뭐로 듣는 거예요. 대체.”
분명 수정은 민수에게 설아가 괜찮음을 여러 번 강조했다.
그런데 이 배우 오빠가 자신의 말은 귓가로 흘려버리더니 이러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괜찮을 리가…. 정말……”
“어? 정 배우. 빨리 왔네.”
수정은 자신의 말을 증명해줄 지원군인 태준이 등장하자 반갑게 태준을 맞이했다.
자신의 말은 믿지 못해도 계속 설아와 같이 있었던 태준의 말은 믿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 잘됐네요. 태준 씨. 우리 배우 오빠에게 설명 좀 잘 해 주세요.
이 오빠가 맛이 갔어요.”
“설명은 무슨 설명을…. 아…아.
이게 또 이런 부작용이….”
수정의 말에 잠시 무슨 일인지 생각해 본 태준은 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태준이 생각하기에 저건 지금까지 설아가 부린 내숭이 부른 참사였다.
설아를 그냥 여리여리하고 예쁘기만 한 그 나이 때 순진한 아가씨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뻔한 민수였으니 그런 소식을 접하고 저리 반응하는 거겠지.
이건 설아의 뛰어난 연기력을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그 검은 속내를 비난해야 할지 판단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민수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적어도 이해는 시켜줘야 했다.
“아…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하지만 태준은 이걸 어디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설아의 모든 걸 까발리기에는 자신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거 같으니 어쩔 수 없이 이 사안에 관해서만 설명해야겠다고 결심한 태준은 이번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 그래서 일부러?”
“어. 설아가 일부러. 굳이. 내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소속사에서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굳이.”
민수는 굳이 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넣은 태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말렸는데 설아가 억지로 나선 모양이었다.
“하…. 정말….”
“걱정 마. 설아가 생각보다 심지가 굳어.
그러니 마음의 상처 같은 건 없을 거야.”
태준의 설명은 최대한 순화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민수에게 설아가 상대의 욕설과 음담패설을 확인한 후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든지, 아니면 단순한 악플을 보고 “약해 약해” 를 연발했다든지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민수는 그냥 설아가 자신을 위해 발 벗고 나서다가 악플러를 신고했다는 정도만 아는 것이 가장 좋아 보였다.
“정말, 왜 그랬을까?
어차피 시간 지나면 떡밥이 식고 적당히 사그라들 거였지 않아?
영리한 설아 씨가 그걸 몰랐을 리가 없는데.”
민수의 의문은 정당했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설아가 민수 앞에서 그 악플들을 치우기 위해 일종의 함정을 팠고 그 함정에 빠진 사람들이 결국 자신들의 기반까지 잃은 상황이라 적어도 당분간은 자제할 거란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태준은 그냥 말을 얼버무렸다.
아마 필요한 설명은 설아가 알아서 할 것이다.
고 앙큼한 것이 공치사하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네가 하도 이상하게 욕을 먹으니 설아가 못 참았나 봐.
캬~ 그게 사랑 아니겠어?”
“끙… 어쨌든 설아 씨가 지금 멀쩡하다는 거지?”
“그럼. 멀쩡하지. 오늘도 웃으면서 촬영장에 갔고.
이걸 덕분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그 이후에 드라마도 쾌조를 달리고 있으니까.”
태준의 말에 민수는 우선 안심할 수 있었다.
설아가 나이에 안 맞게 심지가 곧긴 한가 보다.
“그런데 소속사가 엄청 바쁘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난 설아 씨 일로 문제가 더 있나 싶었는데 지금 말하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거 같네.”
“뭐? 아, 이 친구 진짜.
지금 소속사가 왜 바쁘겠냐?
다 네 녀석 때문이잖아?”
“응?”
“응이 아니지 이 친구야.
지금 너한테 들어오는 섭외 때문에 난리도 아니라고.
CF, 드라마 영화. 아마 그거 다 확인하는 것만 해도 장난이 아닐걸.
우리 정 배우. 당분간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당분간 “Mama”가 개봉할 때까지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던 민수는 태준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영화가 흥행했으니 어느 정도 니즈가 생길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태준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의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요청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니 CF야 그렇다 치고 영화랑 드라마는 뭐야?
감독들이나 투자자들이 날 꺼리고 있는 거 아니었나?
이번 작품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섭외를…..”
“이 친구가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있어?
이건 이야기가 좀 길어질 거 같은데 자리를 좀 옮길까?”
민수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던 태준은 민수를 끌고 항상 이야기하던 휴게실로 향했다.
정갈한 느낌의 휴게실은 언제나처럼 그 모습 그대로 민수를 반겨 주었다.
앞이 살짝 뜯어진 소파와 색이 조금 바래 나무의 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큰 탁자까지 생각보다 오래 외부에 나가 있어서인지 조금 낡은 비품조차 정겹기 그지없었다.
“여긴 그대로네.”
“이런 싱거운 친구.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여기 앞으로도 그대로일걸.
여기 생긴 지 10년쯤 됐는데 항상 이랬거든.
사실 처음에는 너무 낡은 소파랑 탁자라 마음에 안 들었는데 지금은 차라리 괜찮은 거 같아.
익숙해져서 그런가 봐.”
감상에 젖은 민수에게 가볍게 타박한 태준은 자리에 앉아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 설명을 하는 태준의 태도가 왠지 신나 보였지만 이유 모를 한기도 같이 느껴졌다.
“진짜 웃긴 일이긴 하지.
예전에 정 배우한테 독이 든 성배라고 했던 거 기억하지?
아직 신인 배우에 불과한데 인기만 뻥튀기 돼 있어서 비싸기만 하고 불확실하다고.”
예전이라고 해 봤자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자신을 조금 꺼리던 감독들.
그들이 자신을 설명하던 단어가 바로 저 독이 든 성배였다.
“그랬지. 그런데 지금이라고 달라질 게 뭐지?
내가 딱히 연기력을 증명하진 못했잖아.
난 적어도 “Mama”가 개봉해야 어느 정도 그런 평가가 수그러들 거라 생각했어.
적어도 내가 거기서 보여주는 연기는 진짜였으니까.”
민수는 “Mama”에서 자신이 보여 줄 연기는 그들의 마음을 바꿔먹게 하기에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액션만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이 영화가 흥행하든 말든 자신의 연기력 자체를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킥킥. 진짜 이 바닥에도 좋은 말로는 뚝심 있다고 하지만 나쁜 말로는 꼰대 같은 작자들이 참 많지.
근데 진짜 웃긴 건 그래 봤자 자기들도 흥행에는 목을 맬 수밖에 없다는 거야.”
“흥행이라….”
“어. 흥행.
뭐 다른 말로는 그냥 인기라고 할 수 있겠지.
지금 일본에서 “Mama”의 수입을 고려하고 있어. 아마 확실하다고 하더라고.
거기서 “Mama”를 왜 수입할까?
그냥 정 배우가 나오니까 수입하는 거야.
지금까지 정 배우가 나온 영화 2개 다 일본에서 예상치 못한 흥행을 거두었거든.”
자신이 중국으로 떠나 있는 사이에 “Mama”의 일본 수출이 결정된 모양인데 자신의 영화가 계속 일본으로 수출된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 쪽에서도 지금 접촉 중이고.
지금 어디서 접촉하고 있는지 알아?
어이없게도 진룡이야. 진룡 미디어 코리아가 아니라 진룡 중국 본사.”
“하….”
중국의 진룡 본사가 진룡 미디어 코리아를 통하지 않고 직접 요청을 넣었다는 건 진룡의 한국 지사 입장에서는 정말 치욕적인 일일 것이다.
본사가 자신들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사의 표현일 테니까.
“지금 너의 인기가 연기력에 대한 의구심을 씹어 먹은 상황이야.
이제 연기력이 있든 말든 상관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지.
얼마나 웃기냐?
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어이가 없어.”
민수는 태준의 냉소를 바라보며 예전에 태준도 이런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아마 3년이던가, 태준이 영화에서 첫 주연을 맡을 때까지 걸린 시간이.
물론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입맛대로 생각한 그 잣대가 태준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주연 배우로 성공한 태준을 영화에서는 연기력이 불확실해서 쓸 수 없다는 분위기였으니 그건 좀 웃기긴 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태준의 인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하자 결국 주연으로 캐스팅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뭐 감독이 배우를 선택하는 건 자유지.
그런데 연기력이 의심스러워서 안 되겠다고 말했던 감독이 갑자기 다시 같이하자고 하는 건 좀 웃기지 않아?
그사이에 내 연기력이 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애당초 연기력 때문이 아니었단 말밖에 안 되잖아?
그러면서 자신은 마치 장인인 양 행동하니까 그게 가당치도 않은 거지.
결국 흥행에만 목을 매고 있던 주제에 말이야.”
그러면서 태준은 차라리 아예 흥행을 위해 달린다고 말하는 감독이 더 솔직하고 인간적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날 쓰면 중국과 일본 진출이 쉬워지고, 거기에 민감한 투자자들이 더 잘 붙는다는 거네.
그러니까 자기들이 말했던 연기력에 대한 건 그냥 접어 둔다는 거고.”
“요약하면 그래.
인기가 연기력을 뛰어넘은 거지.”
“후….”
민수는 태준의 말을 들으며 이걸 좋아해야 하나 서글퍼해야 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하던 대로 드디어 배역에 대한 제약을 어느 정도 넘어섰다.
하지만 그 이유가 연기력이 아니라 단순한 인기라니.
그야말로 이 바닥이 인기 있는 게 장땡이긴 했지만, 왠지 조금 서글퍼졌다.
배부른 투정이라고 매도해도 할 말은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게 그렇게 기쁘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건 그냥 마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