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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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마치고 나가려는 민수를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바로 같이 방송했던 나나세 미유였다.
일본에서 이름난 그라비아 모델인 그녀는 귀여운 얼굴에 농염한 몸매를 가진 그야말로 민수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성이었다.
“민수 사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로 돌아 나나세를 쳐다보던 민수는 그녀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늘 촬영 재미있었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민수 사마.
나중에 꼭 다시 봤으면 좋겠어요.”
나나세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민수에게 인사하더니 그대로 부리나케 도망쳐 이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민수는 그렇게 도망치는 나나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 자신의 손에 작은 무언가가 쥐어져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뭐야?”
[파라다이스 호텔 1207호 11시 30분]
“엥? 이거 설마….”
민수는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이거 거기로 와서 자기랑 만나자는 건 아니겠지?”
이건 아무리 멍청한 민수라도 상대가 자신에게 구애하고 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려는 음모일 수도 있었지만, 오늘 본 나나세는 그런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뭐 그런 사람이 자기 얼굴에 그렇다고 써놓고 다니진 않았지만, 오늘 종일 자신을 애타는(?) 눈으로 바라봤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 확실히 구애의 뜻일 것이다.
하지만 말만한 처자가 그 시간에 호텔로 남자를 부르다니, 민수의 사고방식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짜 톱스타들이 외국에, 일본이나 중국으로 나오면 이런 일이 종종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이런 일을 겪다니 참…..”
정확히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이런 걸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안 들었다.
자신을 좋게 생각하는 건 고맙지만, 아닌 건 아닌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쪽지를 구겨 휴지통으로 던진 민수는 고개를 저어 정신을 차리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버리긴 했지만, 남자로서 왠지 아깝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민수가 방탕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건 그냥 본능이었다.
“뭐해요? 배우 오빠 안 가세요?”
그때 메이크업 박스를 들고 지나가던 수정이 민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복도에 서서 심호흡이라니 민수의 거동이 묘하게 수상해서였다.
“어? 아아. 가야지. 별일 아니야.”
민수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자 수정은 더 수상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이 오는데 아까부터 민수에게 계속 추파(?)를 던지던 여우 한 마리가 지나가지 않았던가.
수정은 혹시나 해 휴지통을 살펴보다 그 속에 있는 구겨진 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호…. 이거군. 이거야.
파라다이스 호텔…..
설마 아니겠지?
이 여우가 지금 누구를 넘보고 있는 거야?”
수정은 쪽지를 챙겨 들고 서둘러 민수를 뒤따랐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수정의 걱정과는 무색하게 그날 밤,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이한 민수는 자신의 방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않고 그냥 푹 쉬었다.
그리고 수정은 그런 민수를 믿음직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이 생각하기에도 나나세 미유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특히 그 공격적인 가슴을 생각하면 어떤 남자로도 혹하기 마련인데 민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거 같아 조금 놀랍기까지 했다.
다음날 일본을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출발한 민수는 자신을 기특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수정의 눈에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동생인 주제에 무슨 손자 보듯이 바라보고 있어서였다.
“뭐야? 조수정. 그 눈은?”
“네? 아… 아니에요. 배우 오빠.
오늘 공항에서는 쉽지 않을 거예요.
오빠도 이젠 자신의 인기를 잘 알죠?”
“아… 그렇지? 흠…”
수정의 말에 민수도 조금 걱정이 되었다.
민수는 다만 사람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민수의 걱정대로 오늘 출국한다는 일정이 다 알려진 상황이라 공항 근처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나마 질서를 잘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민수가 탄 차가 공항 근처로 접근하자 어떻게 알아챘는지 많은 팬이 비명으로 민수를 반겨 주었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피켓은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피켓이었다.
그 피켓을 바라본 민수는 아무래도 나중에 일본에 다시 오게 될 거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지금까지 이렇게 열정적으로 자신을 반기는 곳은 일본이 처음이었다.
민수는 자신에게 환호하는 팬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마디는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동원의 만류에도 창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채 팬들에게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꼭 다시 올게요. 다음에 봐요!”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소리치는 민수의 모습에 팬들은 다시 환호와 비명을 질러대며 민수를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민수의 첫 일본 나들이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제 영화가 상영하는 날이 거의 다 되어 민수는 중국으로 출발했다.
영화가 동시 상영이라고 했지만, 날짜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는데 중국과 일본이 한국보다는 3일 정도 빨랐다.
이는 민수의 국적을 의식해 한국에서도 개봉 시사회를 할 수 있게 천루 쪽에서 나름 배려한 것이었다.
민수는 중국에서 3일간 각지를 돌며 시사회를 가지고 바로 한국으로 출발해 한국에서 개봉 시사회를 가진 후 영화를 개봉하게 될 것이다.
미국 쪽 개봉은 민수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었는데 어차피 자신이 미국에 갈 일이 없을 테니 에릭 존스 감독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중국 영화였고 중국을 위주로 일정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중국 내 시사회나 행사 외에 한국에서도 일정을 잡아준 천루 쪽의 배려에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민수가 중국으로 떠난 사이 한국에서는 이상한 기류가 몰아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민수가 일본에서 내디딘 행보 하나하나를 모두 특종으로 다루었다.
자국인의 해외 활약에 열광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한국인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열광하기보다는 조용한 일본 팬들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민수의 경우는 정말 이례적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이 민수가 일본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확실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수의 일본 활동이 속속들이 알려지면서 생각지도 못한 역작용이 발생하였다.
일의 발단은 민수가 출연한 토크쇼.
그곳에서 민수가 예전에 겪었던 성추행 사건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가 나오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민수를 폄하하고 있던 일부 여성 우월주의자 들이 민수가 자신들의 비판(?)을 곡해해서 일본 패널들에게 편견을 심어줬으며 그런 민수의 생각은 여성 혐오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전에 민수에게 고소당한 여성도 사실은 불의의 피해자였으며 모든 일은 민수가 여성 혐오자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판결을 내린 판사도 여성을 멸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죄판결을 내렸으니 그 판결조차 신뢰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졸지에 민수를 여성 혐오자로 단정 짓고 윤 엔터 홈페이지 정민수 게시판에 교묘하게 모욕적인 발언을 계속 올림과 동시에 자신들끼리 합심해 민수 같은 여성 혐오자는 연예계에서 퇴출해야 한다는 서명을 받아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은 당연히 민수가 출연한 영화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주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단순히 민수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여성 혐오와 남성 혐오, 즉 서로를 혐오하는 분위기가 점점 격해지는 중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인터넷상의 분위기일 뿐이었고, 사회 전체로 보면 일부에 불과한 문제였지만 이런 분위기가 점점 더 팽배해지면 정말 큰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 시작점은 여성들의 남성 혐오였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더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게 되었고, 여성들이 불평등하게 억압되는 것을 개선하자는 주장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사회적으로도 그런 양상을 인정하고 조금씩 변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성우월주의를 신봉하는 일부 여성들이 그 정도 변화만으로는 전혀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에게 가장 거슬리는 것은 바로 무고죄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다.
예전 민수가 공개적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알 정도로 떠들썩하게 무고죄를 고소했고, 그 사건이 유죄로 판결이 났다.
그건 사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누가 봐도 그건 돈을 받고 고의로 무고한 것이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성 우월주의자들도 그 당시에는 이 일을 뭐라고 감싸주지는 못했었다.
그나마 지금까지 이어진 판례의 동향 때문에 집행유예를 받은 것조차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에 발생했다.
떠들썩하게 판결 난 유죄판결 때문에 그 후 무고에 대한 취급이 조금씩 무거워지고, 조사 또한 충실해지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지금까지는 그냥 무죄 판결이나 못해도 집행유예로 판결 났던 사건들이 조금씩 형량이 무거워지게 된 것이었다.
단순히 사법적 정의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뿐이었지만 그녀들은 이걸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성 우월주의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는 여성에 대한 잘못된 탄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녀들이 민수에게 꾸준한 악플을 달아온 건 바로 그런 이유였다.
그리고 그녀들은 이번 기회에 아주 민수의 기를 꺾어 사과까지 받아낸 후 유린당한 여성의 인권을 되찾을 각오였다.
지금까지는 일부 여성들이 난리를 치고 그 결과 남성이 피해를 보게 되면 남성들은 자기들끼리만 불평을 내뱉는 상황이 계속되었지만 이번에는 일이 조금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남성들이 민수의 연예계 퇴출 성명과 영화 보이콧 운동을 보며 지금껏 당해 왔던 울분을 폭발시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여성 혐오자와 남성 혐오자 사이의 인터넷 배틀이 윤 엔터 홈페이지 정민수 게시판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민수는 연예인 주제에 SNS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녀들이 따로 욕설을 적어 놓을 곳은 회사 게시판뿐이었다.
이게 민수가 중국에서 열심히 시사회 및 영화에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을 때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한국으로 입국하기 전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해 들은 민수는 이제 짜증조차 나지 않았다.
솔직히 이제는 민수도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이 없어서였다.
민수가 지금까지 꾸준히 올라오는 자신의 악플을 보며 생각한 것은 우선 무언가를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들은 논리와 이성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소통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그냥 화가 나 있을 뿐이었고 그 화풀이의 대상이 우연히 자신인 것뿐이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이것 때문에 조금 피해를 받기도 했고 이런 문제가 계속되면 자신을 캐스팅하는 제작진들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지내보니 그건 또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전체 여성 중에 극히 적은 일부분일 뿐이었다.
앞으로 그들이 점점 늘어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소속사 측에서도 민수가 그냥 무시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건 민수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논리나 이성이 통하지 않았고 만약 민수가 강경한 대응을 하게 된다면 그들이 쓸데없는 동정심을 사며 더욱 기고만장해질 가능성도 있었다.
민수는 자신을 응원해주는 일부 남성들도 차라리 자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부 남성들이 가지는 무분별한 여성 혐오도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만약 그 남성들이 모든 여성이 다 저렇다고 오판한다면 그것도 참 가슴 아픈 일일 것이다.
민수가 그렇게 한숨을 쉬며 한국으로 출발한 시간, 이 일을 그냥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윤설아였다.
쉬는 날 인터넷을 살펴보던 설아는 계속 올라오는 민수에 대한 비방을 발견하고는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설아의 심기는 매우 불편했다.
바로 수정에게서 날아온 한 통의 문자 때문이었다.
“뭐야? 너 오늘 쉬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태준은 인터넷을 보며 살소를 짓고 있는 설아를 발견하고는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잡히기만 하면 머리채를 뽑아버리겠다는 살기가 느껴져서였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나나세 미유인가 그 여자 알아?”
“나나세 미유? 누군데? 아아.
이번에 민수랑 같이 쇼 프로에 나왔던 그 여자 말이지?
이름은 알지.
그 여자가 나름 유명한 그라비아 모델이라던가?
그러고 보니 그 여자 딱 민수 스타일이지 않냐?
큐티한 얼굴에 글래머러스한 스타일이니. 딱 그렇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태준의 말에 설아의 표정이 점점 흉악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쌓인 스트레스가 한방에 폭발한 설아는 흉흉한 눈으로 태준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진짜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예요?
그런 거죠? 오랜만에 진짜 전쟁 한번 갈까요?”
움찔한 태준은 지금이 정말 비상사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경우에 설아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태준은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설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 태준의 뒤통수에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이 몽글몽글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