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27화 (22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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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촬영이 진행되는 사이 민수는 자신의 대본을 확인해 보았다.

작가가 첨언 해 놓은 설정을 보니 피디가 설명했던 데로 가오를 살려줘야 하는, 즉 폼을 좀 잡아줘야 하는 배역이었다.

본부장 “주원” 이라는 이 배역은 직원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회사 오너의 직계 자손이며 수려한 외모에 신사적인 태도를 가진, 그야말로 다 가진 녀석이라고 설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 민수가 해야 하는 연기는 직원들 사이로 멋지게 폼을 잡으며 활보하는 것뿐이었고 나은과 동료들이 그런 민수를 보며 감탄하면서 잠깐의 접촉을 가지는 것으로 촬영이 종료된다.

지금 드라마에서는 나은이 겨우겨우 입사하여 힘겹게 회사 생활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은은 대학을 졸업한 후 여러 회사에 지원하고 인턴으로 생활하기도 하면서 온갖 횡포와 갑질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특히 면접관들에게 여러 가지 부당한 대우를 받는 모습과 인턴 생활을 하며 겪을 수 있는 수많은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연출해서 촬영했다니 확실히 다른 드라마와 분위기가 아주 달랐지만 이런 적나라하고 현실적인 표현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게 될 것은 분명했다.

“민수 오빠?”

민수가 대본을 확인하고 있는데 설아가 대기실로 들어섰다.

평소의 설아의 모습이 아닌 드라마 촬영을 위해 조금 분장을 더한 상태였는데 얼굴을 좀 칙칙하게 화장했고 몸의 라인을 죽이려고 그런 건지 허리에 무언가를 덧댄 모습이었다.

굳이 이렇게 꾸며놓고 촬영을 하려면 설아를 쓸 이유가 없었으니 나중에 무슨 반전을 주려고 하는 거 같은데 민수로써는 앞으로의 내용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촬영을 하는 거예요?

좀 답답해 보이는데 몸은 괜찮고요?”

“헤헤. 네 괜찮아요.

오늘 잘 부탁해요. 오빠.”

“그럼요. 설아 씨. 누구 드라마인데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요.”

그렇게 설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수정이 오늘 민수가 입을 옷을 들고 들어왔다.

오늘은 제작진 쪽에서 건네주는 옷을 입어야 하므로 의상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하더니 저 옷이 그 옷인가 보다.

민수는 수정이 들고 온 옷을 살펴보는데 심상치 않은 의상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수정아. 이거 무슨 옷이야?

그냥 평범한 의상은 아닌 거 같은데?”

“아, 이거 벨루로열이라고 고가 브랜드거든요.

이게 PPL이라고 꼭 입어 달라고 하네요.”

민수의 자신의 배역을 생각해 봤을 때 평범한 옷보다 이런 옷을 입는 게 당연하긴 했지만, 이 드라마의 전반적인 내용상 이런 옷이 PPL 들어온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카메오한테 PPL 의상을 맡긴다니 그건 그거대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민수가 의아한 눈으로 수정을 보자 수정은 자신이 인정받은 것처럼 으스대며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다 이게 배우 오빠가 잘나서 그런 거죠.

이거 배우 오빠 앞으로 꼭 집어서 PPL 온 거에요.

정민수 배우가 꼭 입어 주세요. 이렇게요.

오늘 배우 오빠가 그런 배역을 맡게 된 것도 다 이런 계산이 있었던 거죠.”

“내가 카메오 출연을 결정한 지 하루밖에 안됐는데 그게 된다고?

아니, 그보다 이거 괜찮은 거냐?

나 오늘 한 번만 나오는 건데 이런 PPL을 받으면….

아니지, 그것보다….

이거 지적할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어떻게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네.

원래 이런 일이 종종 있는 일이야?”

“아니요. 그럴 리가요. 카메오가 PPL까지 해주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이거 피디님이 무슨 말씀 없으셨어요?”

민수의 의문을 설아가 풀어주었다.

아무래도 자기 생각대로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피디가 딱 한 번만 도와달라고 하면서 만약 이번에 도와주면 나중에 잊지 않겠다고 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아마 이것 때문인 거 같았다.

피디가 그렇게 부탁할 정도면 가벼운 PPL은 아닌가 본데 민수의 의문은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냐는 것이었다.

“솔직히 벨루로열은 예전부터 배우 오빠한테 러브 콜을 제법 보낸 브랜드거든요.

오빠가 가진 섬세하면서도 남성적인 이미지가 자신의 브랜드에 딱 이라던가?

그런데 오빠는 남성 의류 쪽 광고는 다 거절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요?

게다가 이 드라마가 방영할 시기에 영화까지 개봉하니 잘하면 생각보다 광고 효과가 괜찮겠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영화가 잘되면 자연스럽게 이 장면도 같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테니 손해는 아니죠.

사실 PPL 넣는 돈 정도는 벨루로열 입장에서는 푼돈이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그리고 혹시 또 알아요?

배우 오빠가 이 옷 입어보고 마음에 들면 유니 때처럼 꾸준히 입어 줄지.

애당초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것도 우리 배우들이 유니 옷밖에 안 입어서 그런 거거든요?

“송포유” 찍을 때만 해도 유니가 배우 오빠한테 자선 사업했다는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죠.

오빠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유니 옷만 입고 있잖아요?

다른 곳에서 들어온 건 죄다 거절.

그래서 지금은 유니가 배우들 덕을 톡톡히 보는 상황이고요.”

“그거야, 유니 쪽에서 우리가 원하는 옷을 잘 만들어 주기도 하고 지금까지 쌓아온 관계도 있으니까 그런 건데.”

“어쨌든 유니가 배우님들 성격 때문에 지금 많은 이득을 보고 있는 건 맞죠.

그쪽에서 옷은 지원해 주지만 따로 CF를 찍거나 그런 건 아니잖아요.

아마 당장 벨루로열만 해도 CF 단가가 장난 아닐 텐데 그건 좀 아쉽네요.”

“결국 벨루로열이 보내는 러브 콜이라는 거네?

게다가 내가 한번 나오는 장면에 따로 PPL을 넣은 걸 보니 그쪽에서 날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대충 감은 오네.

이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상대가 원하니 입긴 해야겠어.

피디님도 그렇게 부탁했으니 거절하기도 좀 그렇고.

우리가 유니 전속모델은 아니니까 이렇게 입는 게 별 문제도 아니고 조윤희 선생님은 이런 일을 신경 쓰시는 분이 아니니 상관없겠지.”

민수가 지금까지 유니 옷을 입은 것은 그냥 자신의 위해주는 윤희의 정성이 너무 감사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따로 PPL이 들어온 것을 거절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행동은 유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윤희를 위해서였는데 윤희는 자신이 연기 중에 무슨 옷을 입는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수가 남성복 CF를 거절한 것도 단순히 평소에 윤희가 만들어 준 옷을 입고 싶어서였지 유니 에 대한 부채 의식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가 이 정도로 자신을 신경 쓴다면 윤희에게 물어보고 벨루로열의 협찬을 받고 CF를 받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하루 만에 PPL을 확정 짓고 들어 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에 행보에 꾸준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정아, 그나저나 이거 주연 배우가 기분 나쁘지 않으려나 모르겠다.

배우들 이런 거에 민감하다고 하지 않았냐?”

“그렇죠. 모든 배우가 배우 오빠 같은 분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서명주 씨는 그럴 상황이 아닐 걸요.

드라마에 들어온 PPL도 아니고 배우를 꼭 집어서 들어온 거잖아요?

그리고 기분 나쁘면 어쩔 거에요?

억울하면 자기가 더 뜨면 되죠.”

왠지 수정은 서명주에게 조금 유감이 있어 보였다.

“끙…. 야, 그래도 말을 해도 참.”

“갑자기 예전에 오빠가 옷 양보했던 게 생각나네요.

그때만 생각하면 내가 진짜!”

민수는 수정이 예전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자 얼른 말을 막았다.

수정이 종종 저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말이 길어졌기 때문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저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지 참 기억력도 좋았다.

“우리 조 코디. 알았어 알았어 내가 미안해.

내가 코디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고? 그래그래.

어쨌든 옷이나 입어보자.

이거 입고 연기해야 하니까.”

“씽~.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배우 오빠!”

수정이 옷을 건네주고 밖으로 나가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설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풋. 생각보다 더 사이가 좋으시네요.

전 오빠가 여자랑 저렇게 사이좋은 건 처음 보는 거 같아요.

그러고 보면 수연 언니랑 소희 언니한테도 친절하긴 했죠?

오빠 설마 사실은 모든 여자에게 따듯한 남자라든지.

그런 건 아니겠죠?”

말은 부드럽지만 묘하게 뼈가 있는 듯한 설아의 말에 민수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민수는 이런 대답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평정심이라는 사실을 예전에 수연과 태준의 다툼을 보면서 체득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형우가 말하길 이럴 때는 무조건 네가 최고야 신공을 시전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럴 리가요.

소희 씨랑 수연 선배는 소속사 식구라서 그냥 예의를 갖추는 거고요.

솔직히 왠지 수정이는 좀 편하긴 해요.

여동생 같아서 그런가?

그래도 제가 진짜 신경 쓰는 건, 설아 씨뿐이죠. 암요. 그렇고 말고요.”

“호…. 그래요? 그건 좀… 흠흠.

좋아요, 오빠 그럼 이따가 잘 부탁해요.”

“네, 설아 씨. 이따 봐요.”

설아가 웃으며 대기실을 나가자 민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면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빌미를 주지도 않고 충분히 잘 넘긴 거 같아서 스스로를 칭찬했다.

역시 형우는 믿을 만한 녀석이었다.

민수가 준비를 마치고 촬영장에 자리를 잡고 촬영을 바로 시작되었다.

장면이 간단한 만큼 따로 준비할 것도 많지 않았다.

민수가 지나갈 로비에 대기하고 있는 직원들 몇 명,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자리를 잡은 설아와 조연 배우 두 명.

이렇게 촬영 준비가 완료되었다.

“씬 6-3-X GO~!”

“야. 나은아. 저기 봐.

왕자님이다 왕자님.”

“얘는 왕자님은 무슨 왕자님이야?

요즘 세상에 왕자님이 어디 있어?”

나은의 입사 동기 유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은을 딱하다는 눈으로 잠시 바라본 후 다시 몽롱한 눈으로 로비를 통해 이쪽으로 다가오는 본부장 “주원”을 응시했다.

“왕자님이 별거겠니?

저 외모. 저 집안. 게다가 능력까지.

저 정도면 완전 백마 탄 왕자님이지.”

“실제로는 벤츠 탄 본부장님이고.”

나은은 옆에서 추임새를 넣는 주희의 말에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자신이 봐도 유나의 말대로 엄청나게 잘생기고 멋있긴 했다.

“그래. 잘생기긴 했네.”

“아~ 멋있다.”

“그래서 신경 끄는 게 나을걸.

어차피 우리랑은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이라.

저 사람이 입고 있는 저 옷 한 벌만 해도 우리 몇 달 월급은 날아갈걸?”

“그러게. 사람이 멋지니 옷도 멋있어 보이네.”

그리고 주원이 일행의 앞을 지나갈 때 일이 터지고 말았다.

뒤에서 급하게 지나가던 직원 하나가 나은을 실수로 밀치고 지나가면서 나은이 주원 앞에 털썩 넘어지고 만 것이다.

“어맛! 아야…”

“괜찮아요? 그러니까…. 이나은 씨?”

주원은 나은의 명찰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은에게 좀 더 다가갔다.

“네. 자재과 신입 사원 이나은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괜찮은가 해서요.

크게 넘어지던데 제 손 잡고 일어나요.”

주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어 나은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크게 넘어진 나은은 뭐에 긁혔는지 손목에 작은 상처를 입은 상황이었다.

“저런. 상처가 낫네요. 잠시만요.”

주원은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손수건 한 장을 꺼내 손목에 묶어 주었다.

그리고 얼마나 잘 묶었는지 정면으로 “벨루로열”의 로고가 너무나 뚜렷하게 잘 보였다.

“아. 됐네요. 이따가 꼭 치료를 받으세요.

그럼 이만.”

주원은 일행에게 상큼한 미소를 날려주고 다시 로비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주원을 주희와 유나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와.. 성격까지 좋아.”

“자상해~!”

감탄하는 두 동기를 보며 자신도 이번에는 저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은은 자신의 손목에 묶인 손수건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OK! 좋아요. 하하”

민수는 자신이 찍힌 장면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지었다.

아마 옷이 멋지다느니 몇 달 치 월급을 써야 살 수 있다느니 하는 말은 의상 PPL을 위한 문구였을 텐데 그래도 분위기에 맞는 대사라 확 티가 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이 묶어 놓은 손수건에 나타난 저 로고가 문제인데, 의도치 않게 직접 PPL을 한 기분이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평소대로 묶은 것인데 모양이 저렇게 되니 조금 찝찝했다.

“피디님, 저거 괜찮은가요? 너무 대놓고 PPL을 하면 문제가 된다던데요.”

“아아 괜찮아요. 아주 좋아요. 민수 씨.

역시 연기 잘하시는 분이 PPL도 참 잘하네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민수는 피디가 문제없다고 말하자 비로소 조금 마음이 놓였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민수는 배우들과 피디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촬영장을 떠날 수 있었다.

피디는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온 PPL도 깔끔하게 해결했고 기대했던 것보다 화면도 예쁘게 잘 나온 데다가 훗날 이 장면이 올려줄 시청률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져 크게 웃으며 민수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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