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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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체크아웃을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배에 무사히 탑승한 민수는 어젯밤 느꼈던 번뇌와 미망을 완전히 벗어 던진 듯 한껏 가뿐한 얼굴이었다.
왠지 조금 뚱해 보이는 설아의 표정과 완전히 상반된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이제는 영화에서 느꼈던 그런 절망과 암울함 마저 완전히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설아는 그런 밝은 표정의 민수를 보며 조금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분명 민수의 기분전환과 과몰입을 치료하기 위해서 여행을 온 것이었고 그 효과가 탁월했음에 만족해야 마땅했지만, 자신과 한방에서 숙박했음에도 저렇게 쾌면한 듯한 민수를 보니 알 수 없는 자괴감이 몰려와서였다.
그래도 자신이랑 같이 잤는데 최소한 잠이라도 설쳐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분명 자신을 여자로 안 보는 건 아닌데 이럴 때 보면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오빠는 왠지 숙면을 하신 거 같네요.
잠자리가 불편하시진 않았어요?”
“아… 네. 좋았어요. 정말.
솔직히 영화 말미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초조해서 잠을 잘못 잤거든요.
특히 마지막 촬영 날은 예전에 기억까지 머릿속에 맴도는 바람에….
아마 그대로 계속 집에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네요.
사실 여행 오는 날 새벽까지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고요.
그런데 어제는 정말 편하게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어요.
설아 씨가 옆에서 지켜줘서 그런 게 아닐까요?”
설아는 민수의 대답을 들으며 순간 부끄러움에 말문이 막혀 할 말을 잃었다.
민수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왠지 조금 치졸해 보이기도 하고 어젯밤에 자신이 느꼈던 답답함보다 훨씬 큰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힘든 민수의 상황을 이용하려고 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 맞지만, 자신도 항변할 말은 있었다.
이제 영화가 개봉하면 민수의 위치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민수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자신이 말하기는 일부 여성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그 여자들은 애당초 상종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고 여배우들, 특히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여배우들은 민수를 노리고 있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관능적인 부분에 약하다고 자신도 인정한 민수가 농염하고 매혹적인 여배우들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설아는 그게 가장 걱정되었었다.
동기야 어떻든 결과는 실패였고 자신에게 남은 것은 부끄러움과 자괴감뿐이었다.
“그래요? 푹 쉬셨다니 다행이에요.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또 이렇게 같이 여행을 다녀요.
저도 재미있었거든요.”
“네. 쉬는 타임에 종종 시간 맞춰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민수는 설아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냥 웃고만 있었다.
그리고 조금 가라앉아 있는 설아의 기분이 잠자리가 불편해 잠을 잘 자지 못하여서 그랬으리라고 혼자 짐작할 뿐이었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민수는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와 이번에 영화를 찍으면서 느낀 것들을 냉정하게 정리할 수 있었는데 역시 가장 큰 문제는 과몰입 문제였다.
민수는 과몰입 문제에 대하여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 바로 정신과 상담 의를 찾았다.
그리고 긴 상담 끝에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몇 가지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상담 의는 민수가 정상인과 같은 정서 상태를 회복했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배우들처럼 배역에 과하게 집중하는 경우 과몰입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마 지금까지는 감정을 느끼는데 무감각했던 것이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방해했던 모양인데 그 말이 맞는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한 연기는 연기라기보다는 그 배역을 흉내 내고 모방하는 것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다만 그 모방이 워낙 정교해서 특정 부류를 제외하고는 전혀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고.
많은 사람이 배우가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고 혼이 담긴 메소드 연기를 하는 것만이 진정한 연기이며 예술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물론 배역에 몰입하는 메소드 연기가 더 자연스러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연기의 단 한 가지 진리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윤 엔터의 배우들은 기본적으로 연기를 기예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더 강했다.
윤 대표의 철학이 그랬기 때문인데 연기를 하다 보면 배역에 어느 정도 몰입하는 것 자체를 피할 수는 없지만, 감정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분석과 표현의 기술적인 부분으로 감정적인 몰입과 배역에 매몰되는 것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배우의 행복을 위해서였는데 배우에게 계속 과몰입 문제가 반복되면 결국 연기를 오래 할 수도 없고 정신적인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가능하면 줄이자는 것이 윤 대표의 뜻이었다.
그리고 그런 윤 대표의 연기철학을 집대성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태준이었다.
태준은 그 뛰어난 이해력으로 배역의 특징을 완벽하게 파악하지만, 감정적인 부분은 조금 냉정하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었다.
배역 자체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여 표현하기보다는 이해와 포용이라는 단계를 거처 자신의 것으로 순화해 표현하면서 과몰입의 경계에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인데 이것도 어떻게 보면 아주 정교하게 계획된 모방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걸 쉽게 설명하면 기본적으로 메소드 연기를 최고의 예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연기는 배우 자체가 그 배역과 완전히 같은 사람이 되어 생각과 습관까지 완벽하게 연기하는 것이지만 태준이 추구하는 연기는 자신은 그대로 있고 자신의 인형을 자기 뜻대로 정교하게 조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인형을 얼마나 정교하고 실감 나게 조종하느냐는 그가 가진 이해력과 섬세한 연기 스킬에 달린 것이었는데 태준은 이 방면에서 누구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워낙 정교해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있는 태준의 스킬은 앞으로는 눈 높은 관계자들까지 완전히 속일 정도로 더 완벽해져 메소드 만을 최고로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마저 훔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민수는 어떨까?
민수는 기본적으로 아무려면 어떠냐 보기만 좋으면 되지. 라는 입장이었다.
솔직히 관객이나 대중들에게 공감만 줄 수 있다면 그 방법이 어떻든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이었다.
그래서 메소드만을 진리로 생각하고 다른 방법들은 전부 부정하던 전생의 편협한 연기 선생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전생에서 민수가 연기를 배우려고 이곳저곳을 전전할 때 만났던 연기 선생들은 민수에게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연기를 포기하라고 했었다.
일부 과격한 선생들은 민수에게 너같이 재능 없는 녀석은 처음이라며 폭언을 퍼붓기도 했으니 그 당시 민수가 느낀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감정에 둔감한 민수가 배역에 공감하고 배역과 하나가 될 수는 없었으니 그들이 보기에는 민수가 메소드 연기를 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을 것이다.
솔직히 민수는 지금 그때 그 선생들에게 태준의 연기를 보여주면 대단한 메소드 연기라고 치켜세운다는데 자신의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제대로 된 연기는 무조건 메소드로 보일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전생의 민수, 그리고 지금까지의 민수는 결국 강제적으로 태준과 같은 스타일로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 이런 방법을 선택하기에도 민수의 재능이 많이 부족했다.
아마 전생에서 민수가 감정연기가 미숙했던 것도 이런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래도 쉽지만, 감정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었으니 시간이 많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의 30년 동안 수많은 배우의 연기 영상을 보고 비로소 이해라는 영역에 발을 들였으니 민수의 이해능력과 재능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전생의 민수는 메소드 연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배역에 몰입하는 재능도 없었고 배역의 감정을 이해하는 재능도 없었으니 배우가 될 수 없는 재능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길을 잘못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정도로 준수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것은 결국 전생에 30년 동안 궁구하고 갈구하며 이해의 영역을 넓혀놓았기 때문이었지 민수에게 없던 재능이 생겼다든지 숨겨진 재능이 꽃피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경험한 배역에 몰입하는 능력은 그야말로 새롭게 얻게 된 능력이었다.
이 말은 민수의 연기가 지금보다 더 좋아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음….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왜 로맨스가 안 되는지도 이해가 가네.
애당초 내 이해 능력 자체가 수준 미달이란 뜻이군.
태준이처럼 느끼지 못한 것을 상상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고.
하…. 복잡하네.
그러면 내가 증오하던 연기 선생들의 말이 맞는 셈인가?
내가 재능이 없다는 건 맞는 말이었으니 그때는 연기를 포기하는 게 정답이었잖아?
그건 또 웃기네.
아니지.
만약 전생에 윤 대표님 같은 선생님을 만났으면 지금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겠지만, 어느 정도 좋은 연기는 할 수 있었을 거야.
그러면 결국 지금처럼 감정의 제한이 풀리면서 메소드 스타일의 연기도 할 수 있었을지도…..
그럼 지금의 민수는 없었겠군.”
처음에는 회귀한다는 사실조차 고통스러웠던 민수였지만 지금은 회귀하게 해준 연기의 신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만약 회귀하지 못했으면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지도 좋은 연기를 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정말 이 축복을 감사하면서 살아야 했다.
“이야기가 왜 또 거기까지 갔어?”
민수는 어차피 배우의 연기를 이렇다 저렇다 한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메소드니 모방이니 이해니 하지만 이건 단순히 기본적인 방향이 그렇다는 뜻이었고 사실 태준 역시 자신과 연기할 때나 “용의 울음”에서 연기했을 때처럼 배역에 몰입해서 연기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원래 이해하고 모방하는 것으로만 연기해야 했던 자신이 배역에 완전히 몰입해서 연기하는 방법도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번처럼 약간의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긴 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거 나중에 어떤 배우처럼 만나는 여배우마다 스캔들이 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민수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로맨스 연기였다.
배역에 몰입하는 방식이라면 어쩌면 로맨스 연기를 할 수도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아직 사랑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이었기에 만약 로맨스를 찍게 되면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방식으로 연기 할 수밖에 없었고 만약 그렇게 되면 상대 여배우를 배역으로 착각하게 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스캔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될 것이고.
배우가 같이 연기하는 상대 연기자와 작품 출연 중이나 출연 직후에 연애를 시작했다가 얼마 후 깨지게 되는 건 거의 이런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쓸 수 있을 만큼 써먹고 조심하는 수밖에 없군.
소희 씨나 윤 대표님한테 물어서라도 메소드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감정이 몰려온 게 처음이라 곤란했지만, 앞으로는 이 정도는 아닐 거라고 했으니 좀 덜하겠지.
어쩌면 내가 감정의 교류라고 이름 붙인 그 현상이 내가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면 나타나는 징후라고 생각해도 무방할지도…..”
민수가 상담을 마치고 자신의 연기 방향을 모색하고 있을 때 설아는 휴게실에서 파김치가 된 몸을 소파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최근 강행군으로 고생하다 겨우 휴식을 취하게 된 수연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실패?”
“네, 언니. 완전 실패요.”
“이상하네. 실패라니.
어떻게 그 계획이 실패할 수가 있어?
사람 새끼라면 실패할 수 없는 전략이었잖아?”
의아해하는 수연을 보며 설아는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없었으니 제삼자인 수연이 듣기에는 이게 뭔가 싶을 것이다.
“그러게요. 참 이상하죠?”
“대체 뭐가 문제였어? 계획이 틀어진 거였어?”
수연의 말에 설아도 자신의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그리고 어긋난 것이 하나라도 있었는지 꼼꼼히 따져 보았다.
“글쎄요….. 생각대로 안된 건 낚시 정도였는데. 그거 때문은 아닌 거 같아요.”
“낚시? 낚시도 생각했었어? 너 낚시 잘하잖아?”
수연의 말에 설아는 한숨을 쉬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설명이 이어질수록 수연의 표정이 동정과 기대, 감탄을 오가며 변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