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24화 (224/325)

#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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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는 오늘 온종일 돌아다니면서 단 한 명의 관광객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섬인 이곳에 들어올 다른 방법도 없어 보였는데 방이 대 예약되었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마 민수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예약이요? 그럴 리가요.

저희가 배를 타고 들어올 때도 관광객은 저희뿐이었는데요.

아! 혹시 며칠 전부터 기거하는 다른 손님이 있나요?”

“아뇨, 아뇨. 오늘 자로 예약된 방이에요.

저도 이상하긴 했거든요. 겨울에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

“좀 이상하네요.”

좀 이상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손님이 오지 않았으면 그건 안 오는 손님이라는 생각에 혹시 가능하면 방을 더 내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모텔 주인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

예약과 함께 계산까지 완료된 방이라서요.

돈까지 받았나 보니 저희도 마음대로 그렇게 해 드릴 수는 없을 거 같네요.

정말 죄송해요.”

방을 다 예약하고 돈까지 지급한 후에 안 올 가능성이 높은 손님이라…..

하지만 주인의 입장에서는 만약 다른 곳에 있다가 밤에라도 손님이 오면 방을 줘야 하므로 민수에게 방을 줄 수는 없었다.

주인의 사정을 이해한 민수는 어이가 없긴 했지만, 별일 다 있다고 생각하며 그냥 그렇게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방은 1개뿐이었고 이러면 차라리 다른 곳을 찾아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던 민수는 이어지는 주인의 말에 생각을 고쳐먹을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외통수였다.

“사실 겨울에 숙소를 운영하는 곳은 여기뿐이거든요.

펜션은 휴가철에만 운용하고요.

민박도 여름에만 손님을 받으니까요.”

“음….”

민수는 뭔가 자꾸 꼬여가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 3회 운행하는 줄 알았던 배는 1회였고 이 모텔의 모든 방이 예약된 상황.

그리고 어이없게도 딱 한 개의 방만 남아있었다.

뭔가 지독하게 인위적인 냄새가 났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결국 이곳에서 잘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민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얼굴로 설아를 바라보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설아의 마음부터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분명 자신보다 여성인 설아의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

“….일이 이상하게 됐네요.

아무래도 오늘은 같은 방에서 머물러야 할 거 같은데요. 괜찮을까요?”

“…..네. 괜찮아요. 오빠.

이럴 때는 오빠 믿지! 이런 거 한번 해주시면서 절 안심시켜 주시면 되는 거예요.”

“네? 하지만 그 말을 끝까지 지킨 오빠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지 않나요?

뭐. 어쨌든 설아 씨가 괜찮다면 빨리 들어가죠. 감기 걸리겠어요.”

다행스럽게도 설아는 크게 충격받은 거 같지 않았고 농담까지 하는 걸 보니 평소의 설아 그대로였다.

민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인에게 키를 건네받아 설아와 함께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와….. 아늑하다고 하더니 정말 아늑하긴 하네요.”

감탄하는 설아의 말대로 방은 아늑하고 깔끔했다.

다만…. 후기에 적혀 있던 대로 정말 좁았다.

욕실까지 완비된 방이 대체 왜 이렇게 좁은 걸까?

솔직히 방의 크기랑 욕실의 크기가 거의 비슷해 보였다.

이 좁은 방에 욕실은 또 저렇게 크다니 어떻게 생겨먹은 방인지 의아하기만 했다.

차라리 욕실을 좀 줄이고 방을 넓게 만드는 게 효율적이지 않았을까?

게다가 침대는 또 엄청나게 컸는데 방 대부분을 침대가 차지하고 있었고 침대가 아닌 부분은 사람이 다니는 통로 정도였다.

결국 이 방은 침대와 욕실로만 구성돼 있는 기형적인 구조였으니 정말 목적을 알 수 없는 방이었다.

민수는 누가 방을 이따위로 만들었는지 설계자의 생각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헤헤. 그럼 제가 우선 먼저 씻을게요.”

민수가 방을 보고 당황하고 있을 때 설아가 욕실로 쏙 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민수는 설아가 씻는 소리를 들으며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설마 온 우주가 나랑 설아 씨가 더 다정해(?)지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민수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래. 그럴 순 없지.

설아 씨는 이제 겨우 22살이고, 날 믿고 이렇게 한방에서 같이 자는 건데 내가 다른 오빠들처럼 제 입으로 두말하면 안 되겠지.

후……”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욕실에서 설아가 나왔다.

설아는 목욕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오늘 입고 있던 옷을 손에 들고 있는걸 보니 저 안에는 속옷 정도만 입고 있나 보다.

너무 무방비한 모습이라는 것은 둘째치고 목욕 가운이 너무 부드럽고 고급스러워 보였는데 은근히 색기까지 느껴지는 것이 대체 왜 저런 비싼 목욕 가운이 이곳에 있는지 점점 더 알 수 없어졌다.

혹시 이곳, 사람들이 단순히 잠을 자기 위해 머무는 곳이 아닌 건 아닐까?

그 연인들이 특별한 날의 거사를 위해…..

거기까지 생각하며 이제는 이 모텔의 정체(?)를 확신하게 된 민수는 설아의 저 무방비한 모습이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으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져 먹었다.

설아에 이어 가볍게 몸을 씻고 그녀와 같은 목욕 가운을 걸치고 나온 민수는 설아가 내미는 속옷을 받아 들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입은 속옷을 다시 입는 건 찝찝하니 갈아입으라는 것이었는데 모텔 주인에게 사들였다고 했다.

“고마워요.”

민수가 웃으며 속옷을 받아 들자 설아도 마주 웃으며 민수의 가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커플 잠옷 같네요.

그런데 여기 목욕 가운 되게 귀엽지 않아요?”

말을 마친 설아는 가볍게 한 바퀴를 돌아 보였는데 가운이 날리며 설아의 미끈한 허벅지가 슬쩍슬쩍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고 가운을 타고 묘하게 산뜻한 향기까지 풍겨와 민수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흠흠.

이따가 드라마를 할 테니 TV부터 틀어 볼까요?”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말을 돌린 민수는 빠르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TV를 틀어 겨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보통 이런 곳에서 TV를 틀면 으레 야릇한 교성이 튀어나와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데 다행히 신이 민수를 버리지는 않았는지 그냥 평범한 공중파 채널이 방송되고 있었다.

그리고 민수가 TV에 열중하면서 자신 쪽을 쳐다보지 않자 설아는 생각보다 민수의 회피능력이 준수하다고 생각하며 입을 삐죽 내밀고 민수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솔직히 밤은 아직 길었으니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었다.

방안에서 따듯한 온기를 느끼며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드디어 설아가 주연으로 출연하는 드라마 “햇살이 빛나는” 이 시작되었다.

민수가 영화로 소속사를 거의 비우다시피 했기 때문에 드라마가 어떻게 촬영되고 있는지 전혀 몰랐고 그래서 더 기대되었다.

“헤…..”

드라마 속 나은은 어쩌면 조금 소심한 대학생이었고 조금 더 풍족한 생활을 위해 안간힘을 쓰며 취업을 준비하는 일반적인 소시민이었다.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설아의 얼굴을 보면 솔직히 저 외모로 그게 말이 되냐는 생각도 들었는데 굵은 안경에 머리를 내려 촌스럽게 꾸미자 생각보다 그림이 괜찮게 나왔다.

“피디님이 얼굴을 드러내면 도저히 설정에 안 맞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한 게 저거예요.”

“괜찮네요. 작가님이 어떻게 스토리를 끌어갈지는 모르겠지만 후반에 깜짝 반전요소로 사용할 수도 있고요.”

[내가!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줄 알아? 나도 돈 쓸 줄 알아! 나도 놀 줄 안다고!

그런데 안 되잖아.

장학금을 받으려면 더 이상 알바를 늘릴 수도 없다고!

생활비에 교재비. 돈 나올 데는 없는데 쓸 데는 점점 많아지고.

내가 너희들처럼 집에서 손 벌리면서 대학 다니는 줄 알아?

난 내 손 잡아줄 그런 부모님도 없단 말이야!]

민수는 화면 속 나은이 울분을 터트리는 장면을 보며 조금 짠한 기분이 들었다.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학자금으로 빚쟁이가 되고 빚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만 있어도 나쁘지 않은 인생이라고 했던가?

아마 저게 요즘 평범한 대학생들이 흔하게 안고 사는 고뇌와 고통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청년들의 슬픔과는 상관없이 설아의 연기는 정말 보기 좋았다.

특히 참다 참다 저렇게 당당하게 소리쳐 울분을 풀어놓고 다음 날 친구들에게 미안해 전전긍긍 하는 모습에 헛헛한 기분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좀 찌질해 보이기도 했다.

민수가 그런 느낌을 받고 있다는 것만 봐도 설아가 배역을 아주 잘 소화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드라마의 1화는 그렇게 나은의 고단하고 힘든 일상생활을 이야기하며 잔잔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남주는 누구예요? 대충 드라마 분위기를 보니 유명한 배우는 아닐 거 같은데요.”

“아. 서명주 씨라고요. 이번에 데뷔하는 신인 배우예요.

음…. 좀 평범하게 생긴 은우 선배님이라고 해야 할까요?”

“서명주… 서명주라…..”

민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아무래도 민수가 알 정도로 그렇게 이름을 알린 배우는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설아의 평가를 분석해 보면 훈남 스타일의 밝은 남자 신인 배우인가 본데 드라마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어 보였다.

“자 어때요? 제 연기가.

민수 오빠를 감히 카메오로 초청할 정도는 되나요?

이 정도면 민수 오빠도 카메오로 나오고 싶어서 안달을 내야 하는데요.

그렇죠? 그럼요. 당연하겠죠.”

혼자서 묻고 대답하며 즐거워하는 설아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민수도 못 말리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설아의 드라마에도 일정만 맞는다면 당연히 출연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2월 말만 돼도 어떻게 될지 몰랐으니 가능하면 빠를수록 좋았다.

“좋아요. 하지만 가능하면 빠를수록 좋아 보여요.

중국 일정이 혹시 당겨지거나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서요.

아마 드라마 쪽도 초반 부분에 제가 들어가는 게 낫겠죠?”

“음 그러게요.

“귀의”에는 4월쯤에 출연하기로 하셨다죠?

그럼 빠를수록 좋겠네요. 촬영장에 복귀하면 바로 물어봐야겠어요.”

“그러세요. 그럼.

연락 오면 바로 제가 가는 거로 하죠.”

드라마도 끝나고 늦은 시간이 되자 오늘 종일 움직였던 설아가 많이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조금씩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이내 민수의 옆에서 스르르 자리를 잡았는데 둘이 붙어 있다가 잠이 들다 보니 생각보다 접촉면(?)이 넓은 상황이었다.

민수는 그렇게 자신의 옆에서 곤히 잠든 설아의 얼굴을 그윽한 눈으로 잠시 바라보고는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민수는 잠이 들어 자신에게 몸을 기대로 있는 설아에게서 조심스럽게 몸을 뺏는데 워낙 붙어 있었나 보니 움직임이 쉽지 않았고, 민수가 몸을 빼는 타이밍에 설아까지 몸을 뒤척여 안 그래도 헐거운 가운이 미묘하게 벌어져 있었다.

“으헥. 이거 정신건강에 조금 안 좋은데…. 좋은 생각. 좋은 생각을 해야지.

애당초 몸을 가리기보다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하늘하늘한 가운 사이로 설아의 뽀얀 속살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자 민수는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겨우겨우 가운을 정돈해 주었다.

그리고 정돈을 마치자 조용히 한숨을 쉰 민수는 잠이 들어 천사 같은 얼굴의 설아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이렇게 보니까 예쁘긴 진짜 예쁘네.

이 아가씨야. 이렇게 무방비하면 어떡해요.

원래 남자는 다 늑대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혀를 차며 설아를 바라보던 민수는 조심스럽게 침대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좋은 꿈 꾸세요. 설아 씨.”

혼자만의 인사를 남긴 민수는 조금 남은 미련을 그렇게 떨쳐 버리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잠을 청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민수마저 잠이 든 듯 방안에는 새근새근 조용한 숨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는데 그 순간 설아가 눈꺼풀을 살짝 올려 실눈을 뜨고 잠자고 있는 민수 쪽을 바라보았다.

“민수 오빠? 자요?”

설아가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데도 민수는 움직일 줄 몰랐다.

아마 정신적으로 피곤한 상황에서 음주까지 곁들였고 추운 날씨에 계속 움직이다 보니 민수도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하….세상에…. 진짜 그냥 잔다고?

이 상황에서?”

설아는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민수랑 같이 있다 보면 종종 자신이 빼어난 미인이라는 확신이 흐릿해지곤 했다.

바로 오늘 같은 경우에는 특히 그랬다.

“그래. 아껴주고 싶어서 그랬다고 생각하자.

분명 그랬을 거야.

그나저나 진짜 쉽지 않네.

쉽지 않은 남자야. 우리 민수 오빠.”

설아는 한숨을 쉬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정민수 공략 계획은 이렇게 대실패로 끝났다.

설아는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아서 그렇다고 애써 자신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리고 민수의 마음 자체는 편해진 듯 보였으니 수확이 없진 않았고 그걸로도 충분히 위안을 가질 수 있었다.

베스트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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