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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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민수와 설아는 밖으로 나가 섬 전체를 둘러 보았다.
마음이 푸근해지고 앙상한 겨울 풍경마저 정겨워 보이는 것이 역시 사람은 속이 든든해야 여유를 느낄 수 있나 보다.
그대로 바닷가 쪽으로 쭉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바닷가가 민수를 반겨 주었다.
서울이었으면 어딜 가도 사람에 치여 꼼짝달싹도 하기 힘들 텐데 이곳에서는 이렇게 마음껏 돌아다닐 수가 있었다.
그렇게 계속 걸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정처 없이 아무도 없는 곳을 계속 걷다 보니 마음속에 우울함도 어느새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거 같았다.
“오빠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배우가 되기 전에는 말이에요.”
“글쎄요. 배우가 되기 전이라……
사실 별 볼 일 없는 녀석이었죠.
솔직히 지금 생각해 보면 한심하기만 해요.
세상이 싫고…. 내가 싫고…. 그냥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 보였죠.
그래도 뭐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뎌서, 아무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군대에 간 거고요.
그런데 결국 군대에서도 제 자리를 못 찾고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죠.
솔직히 군대에서 진급 누락되고 전역 조치당했을 때는 좀 황당했어요.
생각도 못 했거든요.”
“예전에 그거 때문에 좀 떠들썩하긴 했었죠?
그때 뭐라고 했었지? 사회성 부족. 맞나요?”
“네. 그랬죠. 사회성 부족.”
민수는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 자신에게 다가와 준 동료들도 제법 있었다.
그런 동료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자신이었으니 자신의 전역에는 확실히 이유가 있었다.
동료들과 신뢰를 쌓지 못하는 군인이라니 정말 쓸데없지 않은가?
그때는 정말 억울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나 당연하였다.
“군에서는 형우 빼고는 친한 사람이 전혀 없었어요.
그때는….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죠.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었지만…
형우랑 그나마 친하게 지낸 것도 그 녀석이 저한테 달라붙어서 그런 거였고요.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그때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저랑 같이 있으면 떡고물이 떨어져서 그랬다네요.
그놈도 참….”
“풋. 그래요? 너~무 솔직한 게 참 형우 씨답네요.
그런데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다니 그게 형우 씨의 성격이나 행동 때문이겠죠?”
“그렇겠죠?
저로서는 흉내도 못 내는 일이죠.”
설아는 민수가 형우 생각에 실소를 머금자 좀 더 자신이 평소에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분위기도 호젓해서 감수성에 촉촉해지고 술도 적당히 올라 기분 좋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몰랐다.
“음…. 그전에 민수 오빠는요? 사고가 나기 전에는 어떤 아이였을까요?”
“사고가 나기 전이라…..
너무 까마득한 일이네요.”
민수도 평소에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라 기억해 내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상으로는 대충 10년 전쯤이었지만 실제로는 40년도 더 지난 기억들이었다.
“음…. 특별한 녀석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그냥 놀기 좋아하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기본적으로 다 그렇잖아요?
하지만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어떤 녀석이었는지. 어떤 녀석이었을까요?”
“민수 오빠가 밝고 구김살 없는 사람이었다네요.
제보자 친구 A의 말에 따르면 붙임성도 괜찮았다고 하고요.
친구 B는 오빠의 외모가 너무 피어나서 놀랐데요.
예전 얼굴이 남아있고 이름도 본명이라 겨우 알아보긴 했는데 완전 용 됐다면서 신기해했어요.”
민수는 예상치 못한 설아의 말에 놀란 얼굴이 되었다.
게다가 자신도 기억 안 나는 친구의 제보라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설아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에휴~ 가끔 오빠 친구라면서 댓글 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말들이 다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하는 뉘앙스가 정말 실감 나는 사람도 있거든요.
솔직히 몇십 년도 아니고 이제 겨우 10년 정도 지난 일이니 오빠를 기억하는 친구들이 없는 게 이상하죠.
뭐 오빠는 자기 기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 몰랐겠지만요.”
“그래요. 겨우 10년이네요.
그나저나 친구라…. 그렇네요. 저도 친구란 게 있었겠죠.”
자신은 수십 년이 지나 완전히 잊은 일이었는데 설아는 10년 전이라고 이야기한다.
게다가 자신은 완전히 다 잊었는데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친구들이 아직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왠지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동창회 같은데 라도 한번 나가 보세요.
아! 혹시 내가 정민수 첫사랑이라면서 나오는 여자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요즘 방송에서 은근히 잘나가는 소재거든요?
오호… 생각해보니 그건 좀…..”
설아가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무조건 헛된 기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민수는.
“아마 그럴 리는 없을 거 같아요.
전 남중 남고 거기다 군대까지…. 한 10년은 남자랑만 지냈거든요.
초등학교 때 나도 모르는 첫사랑이 있었다면 신기하긴 하겠지만 그건 설아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닐 테니까요.”
“세상에…. 요즘도 그런 망테크(?)를 타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설마 했는데 정말….”
설아는 민수를 아주 짠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동정받을 일인가 싶어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설아의 저 불쌍한 강아지 보는 듯한 눈은 묘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이건 이유 모를 불쾌함이었다.
“다 사는 환경이 다른 거잖아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우리 집 주변에 있는 남고는 그거 하나뿐이었고 거기로 떨어졌을 때 다른 친구들도 저런 눈을…..
아 젠장. 뭔가 불쾌한 기억이 떠오르네요.”
설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예전 기억들이 희미하게 떠오르고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민수는 아련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을 반추하면서 그렇게 계속 걸어갔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다시 상기하며 자의식을 회복한다.
설아는 소희의 조언을 철저하게 잘 따르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민수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은 덤이었다. 분명 덤일 것이다.
“그나저나, 그럼 요즘 다른 식구들은 어때요?
수연 선배 드라마가 대박치고 있다는 건 들었고요.”
“아, 우선 드라마는 최종화 시청률 32%로 잘 끝났죠.
그런데 웃긴 건 분당 최고 시청률은 정호랑 준호랑 다투는 장면이었는데 그때가 아마….37% 였던가? 하여간 그랬거든요.
그 장면 보고 사람들이 그놈 연기가 진짜 물이 올랐다고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거 있죠.
그거 때문에 언니가 며칠 동안이나 썩소를 계속 짓고 있었다니까요.”
“로열”에서 최고시청률을 기록한 장면은 민수와 창민이 갈등하는 장면이었다.
사람들은 정말 실감 나게 무너지는 창민의 모습에 찬사를 거듭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멋진 배역만 고집하며 연기 스펙트럼이 좁다는 비난을 달고 살았던 창민의 완벽한 연기 변신이었고 속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하여간 지금은 언니한테 몰려오는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 되나 봐요.
적당히 이것저것 빼고 있지만, 그것도 쉽지 않겠죠.
아! 그리고 화장품 CF를 결국 하나 한다고 하던데요.”
“화장품이요? 품위유지 때문에 신경 쓰인다고 다 까지 않았나요?”
“그랬는데 “G-ON”에서 그런 잡스러운 조건은 다 빼고 찍어만 달라고 했대요.
“G-ON”이 요즘 점유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나 본데 수연 언니를 새로운 대안으로 세우려나 봐요.
게다가 언니가 화장품 광고에서 손을 놓은 지가 1년도 넘었잖아요.
그때는 이미지도 지금이랑 달랐고요.”
“하…. 조금 식상했던 모델이 신선한 매력을 가지게 된 셈이네요.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광고할 수 있으니까요.”
“네. 맞아요. 수연 언니는 그 정도고요.
또 어디 보자….. 그리고 우리 바보 오라버니는 드라마 촬영에 삼매경인데….
아! 그러고 보니 민수 오빠 그쪽 드라마에 카메오 들어가신다면서요?
그럼 저는요? 어떻게 그런 편애를 하실 수가 있어요?
편애를 받는다면 오라버니가 아니라 저여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민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설아를 보며 끙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카메오를 한 건 더 뛰어야 하나 보다.
이건 완전 바가지(?) 긁히는 각이었다.
“음… 좋아요. 우선 드라마부터 보고요.
오늘 첫 화보고 마음에 들면 도와 드릴게요.”
설아는 민수에 말에 볼을 크게 부풀리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서운한데요. 오라버니랑은 드라마 시작도 하기 전에 약속하셨잖아요?
우리 사이가 이거밖에 안 되는 건가요?”
민수는 투정 부리는 설아의 말에 예전에 기억이 떠올라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잊고 있었는데 생각만 해도 왠지 짜증이 몰려왔다.
“그게 사실은…..”
뽀로통하게 있던 설아는 민수의 설명에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 수연에게도 그렇게 당하더니 태준에게도 똑같이 당하고 말았다는 민수의 순진함(?)이 귀여워서였다.
그리고 설아는 태준의 만행이 겨우 이 정도로 끝날 거 같지 않았다.
시작 전부터 민수를 카메오로 확정 지은 태준이라니.
냄새가 많이 났다. 심각한 음모의 냄새였다.
“정말 윤 배우 진짜 내가 어이가 없어서….”
“호호. 오빠 안심하지 마세요.
제가 오라버니를 잘 아는데 그게 끝이 아닐걸요?”
“음…..”
민수는 설아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빈약한 상상력을 가진 민수의 한계였다.
하지만 저 남매가 남을 놀리는 데는 특화되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설아의 말대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절 부르세요.
제가 도와 드릴 테니까요.”
그나마 설아가 도와준다니 든든하긴 했다.
장난 부분에서는 설아와 태준의 능력이 용호상박이었으니 언젠가 그녀의 조력이 꼭 필요한 순간이 있으리라.
그렇게 배우들과 소속사 가족들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는 저녁을 먹고 숙소를 잡을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돈독한 사이만큼이나 시시콜콜하게 할 말이 많아서였다.
민수는 설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이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흔들리고 혼란스러웠던 자신의 정체성이 완전히 제자리로 돌아와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이었다.
만약 설아에 곁에 있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쉽게 정신을 차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저녁까지 먹은 민수와 설아는 이제 숙소를 잡고 쉬다가 설아가 출연한 드라마를 시청하기로 했다.
아직 제법 쌀쌀한 날씨였고 바닷바람은 녹록지 않았으니 해가 져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자리를 잡기로 한 것이었다.
“어! 저기 숙소가 있어요!”
설아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조금 아담하지만 깔끔한 외형의 건물이 보였고 온천기호가 빛나고 있었지만, 목욕탕이나 온천 같지는 않았으니 아마 설아의 말대로 모텔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헤…. 서해 용궁? 특이한 이름이네요.”
“무슨… 동해 용궁이란 말은 그래도 종종 들어 봤지만, 서해에 무슨….”
횟집이나 음식점에 자주 붙는 용궁이라는 단어를 모텔에 붙여 놓은 것도 좀 웃겼지만 그게 서해라는 것이 더 어이없었다.
만약 서해에 용궁이 있다면 그 꼭대기가 물 밖으로 삐죽이 솟아 나오지 않았을까?
여기는 그리 깊은 바다가 아니었으니 용궁의 규모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민수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설아는 재빨리 핸드폰으로 서해 용궁을 검색하고 있었다.
“으엑. 무슨 용궁이라는 모텔이 엄청 많네요.
바닷가에는 다 하나씩 있는 모양이에요.”
“아…그래요?”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한 설아의 말에 민수는 순간 뜨끔하며 딴청을 피웠다.
설아가 만약 자신의 속마음을 들었으면 무식한 남자라고 오해했으리라.
“음… 서해 용궁.
오 여기 평가가 좋네요.
성수기에는 예약 못 하면 방이 못 잡는 다네요.
방이 조금 좁은 게 흠이지만 워낙 아늑하데요.
그래서 더 찾는 사람도 있고요.”
“이상한 사람들이네요. 굳이 좁은 곳을 찾는다니.
어쨌든 여기가 좋다고 하니 들어가 보죠.”
이곳으로 결정되자 민수는 앞장서서 “서해 용궁”으로 들어섰다.
설아의 말대로 입구부터 아늑한 것이 따듯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민수는 카운터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년 여성에게 다가가 방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혹시 예약하신 분인가요?”
“네? 아 그건 아니고요.”
이 모텔의 주인이라는 중년 여성은 방을 물어보자 대뜸 예약한 사람인지부터 물었다.
아무래도 방을 예약한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나 보다.
“그래요? 두 분인가요? 203호로 가시면 돼요.”
“음…. 사장님. 방을 2개를 잡고 싶은데요.”
“어머….. 지금은 방이 1개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민수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어이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설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설아도 무척 당황한 채 민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