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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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민수는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원래대로라면 촬영이 마치고 스태프들에게도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고 끝까지 좋은 연기를 보여준 “뿌리”의 선배들의 노고에도 감사를 전했음이 마땅했는데 태원에게만 인사를 건네고 도망치듯 촬영장을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과 뼛가루를 뿌리는 장면에서 느껴졌던 좌절과 고통은 쉽게 진정시킬 수 있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특히 장례식 장면에서는 예전에 허무하게 부모님을 잃었던 기억까지 자연스럽게 오버렙되면서 가슴을 미친 듯이 옥죄어 왔으니 아마 그 자리에 계속 있었으면 무슨 사고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하… 그래, 시작부터 신파라 그랬으니……. 재활 마치고 어머니랑 룰루랄라 행복하게 잘 살면 그게 무슨 산파야?
애초에 결말은 정해져 있는 거였네.
하하. 내가 바보 같은 녀석이었네.
내가 멍청했어.”
민수는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자신을 괴롭히는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며 깊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쉽게 잦아 들어갈 거 같지 않아서였다.
처음에는 분명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일이 이렇게까지 됐는지 한탄스럽기까지 했다.
그나마 촬영이 일찍 마무리되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이 촬영을 2월 말까지 계속했다면 3월에 다른 스케줄을 소화하는 데 큰 지장이 있었을 것이다.
“후… 어쨌든 잘 진정시켜 봐야지.
오랜만에 의사 선생님도 찾아뵙고.
우선은 진정부터 하자고.”
그렇게 한참 동안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데 크게 노크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문이 슥 열리면서 설아가 고개를 쏙하고 내밀었다.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던 민수였지만 갑작스럽게 고개를 쏙 내밀고 배시시 웃는 설아의 모습이 너무 귀엽다 보니 순간 맥이 탁 풀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실없는 미소가 새어 나왔다.
아마 내일부터 방영되는 드라마 때문인지 설아는 전혀 꾸미지 않은듯한 모습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욱더 귀여워 보였다.
그렇다고 설아가 진짜 전혀 꾸미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 안 꾸민 듯한 저 모습이 실제로는 꾸밀 때부터 더 정성 들여 꾸민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원래 화장이란 게 티 안 나게 하는 게 가장 어렵다고들 하지 않는가.
“헤헤. 민수 오빠 오랜만이에요?”
“풋. 억양이 왜 그래요? 그런데 진짜 오랜만이긴 하네요.
설아 씨, 잘 지냈어요?”
민수는 설아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면서 부정적인 감정 역시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평안하게 지냈던 기억이 은연중에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설아는 민수에게 있어서 새로운 인생의 상징 같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설아는 민수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와 민수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영화는 잘 마치셨어요?
선생님은 병원으로 가셨다고 하더라고요.
단순한 과로라고 해서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몰라요.
오빠는 괜찮으세요?”
설아도 소식을 들었는지 윤숙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냈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영화를 찍다가 과로로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으니 아마 설아도 전해 듣고 많이 놀랐을 것이다.
“네, 전 괜찮아요.
전 중반부터는 점점 몸이 괜찮아지는 배역이었으니까요.
선생님은 반대라서 그랬던 거고요.
정말 그 정도였기에 망정이지…. “
설아는 민수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호응해 주었다.
민수는 시종일관 웃음을 멈추지 않는 설아의 밝은 모습에 점점 더 마음이 풀어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오빠. 혹시 기억나세요?
저번에 여행 가려다가 못 가고 그때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무조건 같이 가신다고 했었죠?”
예전에 해외로 쉬러 가려다가 갑작스러운 예능 출연 때문에 불발이 되었을 때를 이야기하는 모양인데 물론 민수도 그때 자신이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 그랬었죠.
앞으로 시간 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요.”
“그래서 말인데요.
내일 가면 어떨까요?
아. 멀리는 아니고요. 당일치기로 잠깐요.
내일 드라마 첫 방 들어가는데 촬영 진척 상황이 나쁘지 않아서 내일이랑 모래는 통으로 휴식이거든요.
뭐, 최후의 만찬 같은 거지만요.
어때요? 인제 와서 두말하시지는 않겠죠?”
설아의 말에 민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쁘진 않지만 원래 첫 방은 드라마 출연진이랑 같이 보는 게 관례가 아니었나 싶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하긴 오전 오후에 쉬고 밤에 나가서 첫 방을 보는 것도 가능하니 상관없을 수도 있었다.
“첫 방은 드라마 식구들이랑 같이 안 보시고요?”
민수의 말에 설아는 전혀 아니라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에이~ 요즘에 첫 방을 누가 같이 봐요?
드라마가 잘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요.
그렇게 다들 모였다가 드라마 첫 방송 시청률 망하면 그 분위기 어떻게 감당하게요.
그래서 요즘은 잘되면 막방에서나 같이 모여 축하하고 첫 방은 각자 알아서 보는 분위기에요.
예전에 오빠 드라마 할 때도 첫 방은 저희랑 같이하셨잖아요.”
“아… 그랬었죠.”
그러고 보니 민수도 예전에 소속사 식구들이랑 같이 드라마 첫 방을 시청했었다.
일이 그렇게 되면 내일 나들이를 간다고 해도 모래를 통으로 쉬면 되니까 촬영에는 큰 지장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자신에게도 마음 추스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는데 여행은 가장 좋은 힐링 방법 중 한 가지였다.
문제는 이제 어딜 가나 사람들이 알아본다는 것인데…..
“그런데 막상 쉴 수나 있겠어요?
사실 이제 우리가 무명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한국에서는 쉽지 않을 거 같은데.”
민수가 겸손하게 이야기했지만 설아도 민수도 그냥 무명이 아닌 정도가 아니었고 어딜 가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엄연한 스타였다.
게다가 비주얼이 워낙 준수한 둘이다 보니 같이 있기만 해도 포스가 남달랐고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어도 주변에 모든 시선을 강탈할 것이 분명했다.
“헤헤. 그러면 섬으로 가면 된다는 말씀이죠.
인천 부두에서 배로 2시간 정도 가면 섬이 있는데 비수기에는 사람이 거의 없데요.
조용히 쉬다 올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첫 배가 8시에 출발한다니 저희도 빨리 준비를 해야겠지만요.
게다가 하루에 세 번씩 배를 운항한다니 당일치기로는 딱이죠.”
“음…섬이요?”
설아의 말을 들어보니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한 티가 났다.
확실히 조용하고 한적한 섬이라면 별다른 문제 없이 편히 쉴 수 있으리라.
민수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이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좋네요. 그럼 그렇게 해요.”
민수가 승낙하자 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득의에 미소를 지으며 일을 빠르게 진행시켰다.
그리고 그 기세가 자못 날카로운 것이 마치 민수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몰아붙이는 거 같았다.
“우선 음식점이나 목적지는 제가 다 생각해 놓을 테니 오빠는 몸만 오시면 돼요.”
“아…”
“나름 맛있다고 유명한 해물탕집이라든지 괜찮은 곳들이 많거든요.”
“아…네….”
“가는 김에 겨울 낚시도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예? 이 날씨에 그건 좀 무리가…”
“에이~ 그냥 재미니까요.”
“그거야…뭐…”
“차는 제 차로 가기로 해요.
민수 오빠는 따로 자차를 구입하시진 않으셨죠?
그렇다고 그런 곳에 매니저 오빠를 데리고 가는 건 마음에 안 내키고요.”
“네, 운전은 제가 할게요.
아무래도 설아 씨에게 운전대를 맡기는 건 마음이 안 편하네요.”
“뭐, 그러세요.
저도 운전에는 자신 있지만, 오빠가 정 그렇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어요.”
설아의 박력에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있던 민수는 그나마 운전대를 잡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겨우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급물살을 타면서 순식간에 여행 일정이 확정되었다.
민수와 이야기를 마친 설아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향하였다.
가벼운 발걸음이 요즘 드라마 촬영에 지친 배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 경쾌하고 리드미컬했다.
“후후후. 충격이 가장 좋다고 했었지.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도움이 되고.
딱 좋네! 딱 좋아.”
설아는 소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소희는 배역에 몰입해서 자신의 자아가 흐릿해지는 것도 결국 심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가장 빠르게 몰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바로 충격 요법이라고 말했었다.
“솔직히 자아니 뭐니 하는 소리도 정상적인 상황에서나 하는 소리지.
충격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그런 게 다 뭐겠어?
아마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까?”
충격 요법이라니 참 황당한 발상이긴 했지만 말 자체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소희 자신도 처음 연기 연습을 할 때 자꾸 배역과 동일시되는 바람에 한창 힘들었는데 갑자기 소속사에서 나오게 되고 생활이 엉망이 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으니 나름대로 신뢰가 가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관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정상적이고 온건한 조언도 있었는데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설아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아마 자신의 욕심도 차릴 생각이 만만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설아는 분명 당일치기라고 못 박은 주제에 우아한 속옷까지 챙기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민수는 설아의 차를 처음으로 구경할 수 있었다.
민수의 앞에는 정말 단단해서 버스랑 충돌해도 멀쩡할 거 같은 터프한 외형의 지프형 SUV가 그 위용찬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민수는 설아가 자신의 차라고 소개한 흉물(?) 앞에서 잠시 말을 잃고 차량의 이모저모를 살펴본 후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바흐렌(가상) 이네요. 세상에…..”
바흐렌은 2차 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군용 차량을 전문적으로 제조하던 독일의 업체로 지금은 안전함을 모토로 단단한 차량만을 제조하는 업체였는데 자동차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특수 제작하지 않은 차량 중에서는 가장 튼튼한 차량을 만드는 회사로 이름이 높았다.
다만 튼튼함과 안전함만을 강조하다 보니 모양이 다소 투박한 데다 가격도 높은 편이었고 가장 중요한 연비가 완전 꽝이었다.
그래도 워낙 안전한 차량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사는 사람은 꾸준히 구매하고 있었으니 완전히 전망이 안 좋은 회사라고 볼 수는 없었다.
“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아버지가 이게 아니면 운전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셔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아뇨.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는….. “
민수는 이렇게 우락부락한 외형에 색도 칙칙한 회색이라 위압감까지 느껴지는 차량을 설아가 운전한다고 생각하니 그 갭에 조금 어이가 없었다.
아마 설아가 차를 사고 싶다는 말에 윤 대표가 설아의 안전을 위해 강압적으로 구입한 차가 아닐까 싶었다.
설아의 나이라면 샤방하고 귀여운 차를 몰고 싶을 만도 한데 차량선택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설아가 조금 안쓰럽기까지 했다.
하긴 윤 대표라면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윤 대표 입장에서 차량의 가격이나 연비 따위는 고려의 대상이 전혀 아니었을 것이다.
안전, 오로지 안전.
딸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하는 윤 대표의 마음이 보이는 거 같아 조금 짠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차종조차 아주 생소한 것이 그중에서도 가장 튼튼한 놈을 골랐나 본데 아마 저 차를 살 돈이었으면 같은 사이즈의 SUV 두 대는 족히 사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윤 대표의 생각대로 안전만을 생각한다면 이놈보다 더 적합한 녀석은 찾기 힘들 것이다.
민수의 생각보다 이 괴물 같은 녀석은 승차감이 나쁘지 않았다.
묵직하게 나가는 것이 기분 좋은 무게감이 느껴졌고 연비는 조금 안 좋아 보였지만 그만큼 튼튼하다면 나쁘지 않은 교환이었다.
설아는 민수가 출발하자 콧노래를 부르며 음악을 틀었는데 바로 “이카루스”의 노래였다.
작년에 전성기를 찍은 이카루스는 올해가 시작되면서 바로 새로운 앨범을 들고 왔는데 이번 노래도 발매하자마자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민수가 기억하기로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카루스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으니 아마 당분간은 어딜 가든 이카루스의 노래가 끊임없이 울려 퍼질 것이다.
“이카루스네요?”
“네, 이번에 신곡을 발표했더라고요.
이왕이면 모르는 사람 노래보다는 같이 작업했던 아는 사람 노래가 좋잖아요?
게다가 솔직히 아이돌 중에서는 이카루스가 제일 낫죠.
링 언니나 하이유 언니 신곡이 있으면 좋겠지만 근래 발표한 앨범은 없어서요.”
“하긴, 그건 그렇죠.”
이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출발한 설아와 민수는 시간에 맞춰 배에 탑승하고 차가운 바닷바람을 즐기며 목적지를 향한 순조로운 여정을 계속하였다.
오전에 항구는 한산했고 배에도 손님이 거의 없어서 눈치 볼 사람도 없었으니 확실히 설아의 말대로 한가로운 여행을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