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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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정말 빠르게 촬영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불이 붙어 버린 상황.
주연들의 NG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그런 모습에 기합이 잔뜩 들어간 “뿌리”의 단원들도 대사 하나에 온 힘을 기울였다.
춘천댁의 진심 어린 고백으로 마음을 열기 시작한 정수는 그 뒤로 이어지는 계속적이고 열성적인 간호에 결국 항복하고 마음을 완전히 열게 되었다.
그리고 몸이 나은 후에 돈은 다시 벌 수 있다는 춘천댁의 간곡한 설득에 정수는 마음을 바꿔먹고 수술을 결심하게 된다.
수술이 성공적이라고 해도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겹고 고통스러운 재활 과정이 있었으니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영화가 순조롭게 촬영되고 있었지만 정작 문제는 민수 자신이었다.
자신이 과목입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점점 몰입이 심해져 이제는 자신이 민수인지 정수인지 가끔 착각할 때도 있을 정도였다.
가장 치명적으로 작용한 것은 바로 수술 전 고백 씬이었다.
수술에 실패하게 된다면 이제는 정말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고 고백하며 몸을 떨던 정수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에 춘천댁이 그의 손을 잡아주며 어렸을 때 불러주던 자장가를 불러주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촬영할 때 예전에 태준이랑 연기할 때만 아주 가끔 느껴졌던 검정의 교류가 일어나는 바람에 민수는 윤숙에게서 쏟아져 들어오는, 자신이 거의 잊고 살았던 모성애라는 감정에 완전히 매몰되었고 그 뒤부터는 윤숙과 같이 연기할 때마다 감정이 교류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감정의 교류가 주는 특성상 그 장면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완벽하게 마무리되었지만 민수의 몰입도가 과하게 높아져 이제는 종종 정수와 자신이 동일시되어버리는 문제까지 생겨난 것이었다.
요즘은 가끔 자신의 다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종종 빨리 재활을 마치고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가야겠다는 등 자신이 정수인듯한 착각마저 드는 바람에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감정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적은 단 한 번뿐이었는데 그때가 바로 “서쪽 해변”에서 태준과 연기했을 때였다.
그때 겨우 두 씬을 그렇게 찍고 후유증에 시달렸는데 이 영화가 끝나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런 증상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장면은 더욱 아름답고 완벽해졌다.
사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정말 걱정되는 건 윤숙이었다.
태준에게 얼핏 듣기론 자신의 감정교류는 상대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나 본데 지금 자신이 계속 감정교류가 되는 상황이었으니 자신에게 윤숙의 감정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윤숙도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배우로서 연기하기에는 정말 환경과 조건이었지만 그 후유증이 어떨지는 전혀 알 수 없었으니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저런 모습을 보면 인제 와서 뭐라고 할 수도 없잖아.”
배역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 건 윤숙도 마찬가지.
이제는 아예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신들린 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감정의 교류가 주는 버프(?)를 받은 것은 민수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민수와 윤숙이 촬영하고 있는 부분은 정수가 재활을 계속하는 장면이었는데 가끔은 고단한 재활에 짜증을 내기도 하고 울분을 터트리는 정수를 춘천댁이 아주 포근하고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그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야위어가고 화장이 짙어지고 있는 춘천댁을 보며 연기를 하는 민수도 영화 속 정수도 의아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민수는 윤숙이 정말 건강이 안 좋아지나 싶어 걱정스러운 것이었고 정수는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하는 것이었다.
대본을 나눠줄 때 배우의 마음마저 같이 배역에 묻어나 표현되었으면 좋겠다더니 이런 것을 보고 그런 말을 했나 보다 싶을 정도였다.
자신에 재활에 온 정신이 팔려있던 정수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생 수수한 민낯으로 지내던 어머니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화장을 하기 시작하더니 요즘에는 조금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옷도 조금 화려해졌다. 두껍고 화려한 옷이라니 어머니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종종 사라졌다가 한참 있다 나타나는 게 조금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어? 엄마 요즘 화장을 자주 하네.
게다가 요즘은 가끔 사라지기도 하고…. 이거 좀 의심스러운데.”
정수의 물음에 살짝 움찔하던 춘천댁은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휠체어에 앉아 있는 정수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이 녀석아.
원래 여자란 동물은 죽을 때까지 여자인 거야.
그래서 가끔은 화장도 하고 싶고 그런 거란다.”
“그래요?”
어머니의 말에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던 정수는 잠시 후 이어지는 엉뚱한 말로 춘천댁을 안심시켰다.
“그렇겠죠? 엄마도 여자니까.
혹시 만일이지만 만나는 사람이 생기면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전 반대할 생각 전혀 없으니까요.”
춘천댁은 심각한 표정으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정수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원 녀석도. 못 하는 소리가 없어요.
다 늙어서는 무슨.”
춘천댁은 가볍게 피식 웃어넘겼지만 정수는 조금 심각했다.
혹시 아버지가 생기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빨리 자신이 나아서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보리라.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줄 그런 사람인지가 가장 중요하니 성품을 알아보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렇게 동상이몽을 속에 정수의 재활은 계속되었고 정수의 몸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OK!”
자신의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민수는 다시 대본을 살펴보았다.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윤숙은 계속 추가 촬영을 해왔다.
그리고 자신의 대본은 이제 재활이 끝나면서 그렇게 끝나게 되어 있었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화가 그렇게 끝날 리는 없었다.
“이 영화가 그냥 그렇게 끝난다고? 그럴 리가 있나.
하, 설마 이거…..”
민수는 혼자서 가만히 영화의 끝을 상상해 보았다.
“정수가 몰라야 더 연기가 자연스러울…..
그리고 배우가 알게 되면 연기가 무뎌질 수 있는 그런 장면이라……”
민수가 고민을 계속하는 사이에도 촬영은 계속 진행되었고 결국 빠르게 진행된 영화는 민수가 찍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게 되었다.
재활에 성공해 완쾌를 확진 받은 정수가 자신의 집에서 축배를 들고 행복한 잠자리에 들게 되는 그 장면이었다.
민수의 대본에서는 “두 모자는 그렇게 행복한 잠에 빠져들고 이제 자신이 어머니를 모실 생각에 가슴 부푼 정수는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라고 마무리되어 있었다.
완벽한 재활을 거쳐 완쾌되어 이제는 걸을 수 있게 된 정수는 지금까지 자신을 뒷바라지한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조용히 누워있었다.
“이제는 제가 다시 일할 수 있으니 곧 이 작은 집에서도 나갈 수 있을 거예요.
한 1년 쉬었지만 제 경력이 그리 간단하지 않거든요.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제가 모실 테니까요.
앞으로는 좋은 것도 많이 먹고 놀러도 다니고 그렇게 지내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춘천댁은 웃으며 아들의 말을 받았다.
자애롭고 따듯한 그리고 아련한 미소였다.
“그럼. 우리 아들 믿지.
우리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그리고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하던 정수가 조용히 잠이 들자 춘천댁은 그런 정수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중얼거린다.
“우리 아들, 이제는 꽃길만 걸어.
항상 행복하고, 그럴 수 있지?
이 어미가 계속 지켜볼게.
사랑하는 우리 아들….….”
그렇게 자애로운 미소를 짓던 춘천댁의 눈이 슬며시 감기면서 장롱에 기댄 몸도 힘이 슬며시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던 손마저 서서히 바닥으로 미끄러지며 이제는 한치에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춘천댁은 만족감이 깃든 따듯한 미소를 지은 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OK!”
촬영을 마친 민수는 득달같이 달려 태원에게 다가왔다.
“이거였어요? 제가 모르는 게 나을 거라는 말이?”
분노한 듯 열이 잔뜩 오른 민수를 바라보며 태원은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죽었다고 저렇게 화를 낼 이유가 없으니 아직 민수가 정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 눈에 뻔히 보여서였다.
곤란하긴 했지만 어쩌면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기에 이보다 좋은 상황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말하느냐인데.
“정신 차려 이 녀석아.
아직 촬영 안 끝났어.
짜증은 촬영 끝내고 내고 이거부터 받아.
정수의 마지막 장면이야.”
대본으로 자신의 머리를 살짝 내려친 찬진의 말에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민수는 찬진이 내민 대본을 받아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마지막 장면의 촬영을 위해 차에 올라탔다.
민수도 자신이 이상하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차라리 그냥 촬영부터 빨리 마무리하는 것이 나으리라.
이제 내일이면 촬영이 끝나게 될 테니까.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사망을 받아들이지 못한 정수는 며칠 동안 폭풍 오열을 쏟아냈지만 그런다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멍하게 장례식을 지낸 정수는 화장한 어머니의 뼛가루를 들고 예전에 자신과 어머니가 지내던 강경 근처, 금강으로 향했다.
그냥 농담처럼 자신의 죽으면 금강에 뿌려 달라고 말했던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강 근처에 도착한 정수는 천천히 어머니의 뼛가루를 강에 뿌리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 자신도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는데, 왜 지금이어야 했을까?
왜 난 그걸 몰랐을까? 왜 자신은 끝까지 그렇게 이기적인 아들이었을까?
수없이 되물어 봐도 이젠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눈물을 흘린 정수는 금강이 보이는 언덕에 앉아 저 멀리 도도하게 흐르는 금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수는 어렸을 때 잠 못 이루는 자신을 위해 어머니가 불러주었던 자장가, 자신이 수술에 들어가기 전 자신을 진정시켜준 그 자장가를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엄마가….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이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
“OK!”
“후…..”
촬영이 끝난 민수는 끌어 오르는 마음을 겨우 지정시킨 후 감독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없이 감독이 내미는 대본 전체를 받아 들고 자신이 몰랐던 부분들을 살펴보았다.
“췌장암….말기…. 세상에.”
정수의 어머니 춘천댁은 이미 정수가 재활에 들어갈 때 췌장암 말기로 치료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발병하게 되면 발견도 어렵고 치료는 더욱더 어려운 췌장암.
춘천댁은 그저 죽음만을 기다리기보다 그 시간을 정수를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점점 말라가는 몸을 감춘 두꺼운 옷과 마찬가지로 두꺼워지는 화장은 정수에게 자신의 상황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사용한 장치였을 것이다.
“하…. 일까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모아놓은 돈으로 치료비를 감당했지만, 재활 비용도 만만치 않았으니 춘천댁은 틈틈이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종종 사라지는 것은 결국 일을 해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민수가 없이 윤숙 혼자 촬영한 부분에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부분, 그리고 진통제로 억지로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무는 장면들, 그리고 지친 몸으로 다양한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장면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도 민수 씨랑 찍는 장면이 워낙 빨리 끝나서 선생님도 수고를 덜었어요.
점점 야위어 가는 몸을 표현하기 위해 식단관리를 하고 계셨거든요.”
“하… 그랬겠죠.
그럼 혼자 찍으시는 장면도 다 끝난 건가요?”
“네 얼추 마쳤어요.
선생님은 지금 병원에 계시고요.”
“네!? 병원이요?”
“네, 어제 마지막 장면 마치고요.
오늘 민수 씨 촬영이 남아 있어서 알리지 말라고 하셨고요.
다행히 평범한 과로라고 하시네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민수는 고함을 터트렸다.
촬영이 빠르게 진행되는 바람에 의도치 않은 강행군이 계속되었고 식단관리까지 하고 있던 윤숙은 사망 장면까지 찍은 후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한다.
그 상태에서도 마지막까지 웃는 연기를 놓지 않는다니 윤숙의 집념도 정말 놀라웠다.
“선생님이 민수 씨한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지금까지 이런 기분은 처음이셨데요.
자신의 몸이 회복되면 그때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지금은 서로 만나도 별로 좋지 않을 거라고요.”
“그렇죠. 아직 둘 다 배역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민수는 태원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계획과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어쨌든 영화는 무사히 촬영되었다.
윤숙도 민수도 후회 없는 연기를 하였으니 이제 남은 건 태원의 몫이었다.
그렇게 2월 중순. 처음에 계획했던 것보다 한 달 빠르게 영화 “Mama”의 촬영이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