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5
민수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될까?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한참 동안 궁리를 거듭하던 민수는 눈을 감고 자신의 몸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무슨 무협 소설 같은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주 엉뚱한 행동은 아니었는데 예전에 발성 연습을 할 때 호흡과 심장을 자의대로 조절할 수 있었던 것에서 착안한 선택이었다.
“…..된다.”
강하게 의식하고 그러기를 바라자 몸이 조금씩 시든 미역처럼 비리비리해지는 느낌이었고 거기에 지금 정수가 느끼는 그런 절망과 좌절 허무함을 강하게 떠올리자 점점 초췌해지는 기분이었다.
다만 점점 자신과 정수가 완전히 같은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문제라만 문제였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것을 따질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배역에 더 몰입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 테니 그건 그거대로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좋아. 이걸 이런 식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군.
심리적으로는 좀 타격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조금 특별한 상황이니까.”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나자 민수는 완전히 피폐해진 완벽한 정수가 될 수 있었다.
허약해진 육체와 초췌한 얼굴, 그리고 피폐한 정신상태가 절망한 정수 그 자체였다.
그렇게 완벽하게 변신한 민수가 촬영장에 도착하자 태원은 할 말을 잃고 스태프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태원은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이게 될까? 진짜 힘들겠는데 라고 생각했던, 그리고 자신이 생각해도 최소 며칠은 더 걸릴 거라고 예상했던 사전준비가 단 이틀 만에 완료되자 놀랍긴 했지만, 너무 완벽한 모습에 차라리 두려움이 느껴졌다.
저렇게 되기까지 배우가 무슨 짓을 했을까 혹시 너무 급격한 변화에 건강을 해치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러워서였다.
“민수 씨 괜찮아요? 대체 어떻게……”
민수는 당황한 태원을 보며 고개를 저으며 설명을 피했다.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기도 했고 그런 시간 낭비를 하는 것보다 빨리 촬영에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태원도 민수의 의도를 눈치챘는데 촬영을 서둘렀다.
그렇게 절망한 정수와 춘천댁이 다시 만나는 장면에 대한 촬영이 바로 시작되었다.
혜연이 떠나고 정수는 완전히 폐인이 되었다.
세상에 완전히 홀로 남겨진 기분.
걷지도 못하는 불구의 몸으로 이렇게 살다가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사그라질 거 같았다.
그렇게 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먹지도 않고 보낸 며칠.
서서히 죽어가는 정수의 집 문이 열리고 한 여성이 집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익숙한 모습, 그러나 자신이 지금까지 애써 잊어왔던 그 사람이었다.
“어…..엄마?..”
지금 이게 현실인가? 왜 저 사람이 여기에? 어떻게 알고?
내가 지금 죽는 건가? 이건 주마등?
그래도 죽을 때는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정말 나쁘지 않아.
“OK!”
장면이 마무리되고 바로 다음 정면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어지는 장면은 정수가 병원에 다시 실려 가는 장면, 그리고 춘천댁이 의사와 정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 이어지고 그 후에 춘천댁의 간호 아래 정수가 정신을 차리는 장면을 촬영하게 되었다.
정수의 병실, 춘천댁은 정신을 잃은 정수의 손을 놓지 못하고 계속 정수가 무사하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아이고, 이 녀석아….. “
“ㅇ…으…..”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정수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에는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신이 든 정수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을 붙들고 서럽게 펑펑 울고 있는 저 여성은 자신이 어머니라고 불렀던 그 여성이었다.
자신이 꿈이라고, 주마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인 모양이었다.
자그마치 10년 만이었다.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어느새 흰머리가 하나둘씩 늘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변한 것이 전혀 없었다.
여전히 추레한 몰골에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대체 자신이 보내준 그 돈은 다 어디다 쓰고 저렇게……
그리고 대체 왜 날 붙잡고 저렇게 서럽게 울고 있을까?
내가 뭐라고.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정수는 정말 혼란스러웠다.
특히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혜연과의 관계가 그렇게 파탄 난 뒤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OK!”
태원은 우선 한고비를 넘긴 기분이었다.
민수가 가장 안 좋은 몸 상태에서 찍는 장면이 무사히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 민수였는데 연기 자체는 너무 깔끔했다.
특히 병원으로 실려 가기 직전 모여준 미묘하고 섬세한 미소가 자신의 의도와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졌다.
“하… 저런 배우들만 데리고 영화를 만들면 진짜 만들 맛 나겠네.
이래서 상업영화 쪽으로 넘어가면 다시 독립영화판으로는 못 돌아온다는 건가?”
민수와 윤숙의 연기를 볼 때마다 욕심이 났다.
다음에도 저런 배우들과 다시 영화를 찍고 싶다고.
찬진은 태원의 표정에서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용의 울음”을 찍을 때 느꼈던 그런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이 바닥 돌아가는 것에 정통한 자신도 욕심을 느낄 정도였으니 저렇게 젊은 감독이라면 당연히 욕심이 날 것이다.
“저거, 저런 배우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
김 감독, 그러니 저런 배우들하고 계속 영화를 찍고 싶으면 이름값부터 올려.
그리고 시나리오 보는 눈도 기르고.
투자자는 김 감독의 이름값이 올라가면 알아서 붙을 테니 상관없으려나.
어쨌든 제일 중요한 것은 이름값과 명성이야.
저런 배우들은 아무 감독이랑 같이 작업하지는 않거든.
이번이야 아주 특별한 경우였고.”
찬진은 이 햇병아리 감독의 소질과 감각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경험만 조금 받쳐주면 좋은 감독이 될 수 있을 거 같았다.
기본적인 스킬과 구도를 잡는 능력은 명장이라고 큰소리치는 어떤 감독들보다 차라리 나은 면도 있었다.
그래서 이 감독이 찍을 다른 영화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좋은 배우와 시나리오를 만난다면 정말 명작을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굳이 시나리오 보는 눈을 기르고 명성부터 올리라는 충고를 해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름값…. 명성. 그리고 시나리오.”
찬진의 충고를 들은 태원은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계속 찍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도 높아져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깨닫고 있었다.
그냥 독립영화나 찍으며 살고 싶다던 김태원에게 강한 열망과 새로운 목표가 생기는 그런 순간이었다.
감독의 결심과는 상관없이 촬영은 계속되었다.
정수와 춘천댁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중요한 씬.
앞으로 극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하는 중요한 장면이었다.
정수는 정신을 차리고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럴 마음이 전혀 안 들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하지만 춘천댁은 아무 말 없이 그런 정수를 꾸준히 간호했다.
아예 병원에서 살면서 살뜰하게 정수를 돌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이러다가 말겠지 생각했던 정수도 춘천댁의 간호가 계속 이어지자 더는 참지 못하고 춘천댁을 몰아붙였다.
정수는 이런 어정쩡하고 의미 없는 관계가 계속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 도대체 왜 이러세요.
언제까지 이러실 거에요?”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정수였지만 춘천댁은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차라리 따듯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춘천댁의 모습에 정수가 기운이 빠질 지경이었다.
“뭘 언제까지니?
당연히 우리 정수가 다 나을 때 까지지.”
“나아요? 어떻게요? 하반신 마비가 어떻게 나아요?
차라리 그냥 절 내버려 두세요.
이렇게 맨날 오시지 마시고요.”
“정수야. 그러지 말고 우리 수술 다시 받자.
이번에 새로 들어온 공법으로 수술받고 재활하면 걸을 수도 있데.
우리 희망을 잃지 말고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 응?”
정수는 춘천댁의 말에 실소를 내뱉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 했더니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나 보다.
자신도 신공법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많은 돈이 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남은 돈을 모두 합해도 한참 모자라는 큰돈이었다.
아마 혜연에게 쓴 돈까지 합친다면 가능했을까?
그런 생각이 드니 또 어이가 없었다.
“돈은요? 수술비가 얼마 인지나 알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응, 나도 계산해봤어.
지금 네가 살던 집하고 재산, 그리고 네가 예전에 보내준 돈,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모아놓은 돈까지 하면 수술비하고 재활 비용까지 얼추 맞을 거 같아.”
“허…. 제가 보내준 돈을…. 안 쓰셨다고요? 아니 왜요?”
춘천댁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보내준 돈은 하나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놓은 모양이었다.
거기다 자신이 모아놓은 돈까지 다 쏟아붓겠다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세요.
전 이제 어머니께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돈도 못 벌고요.
수술을 받아도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왜냐니. 이게 무슨 이유가 필요해?
네가 내 아들이고 제 아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게 어미야.
네가 어떤 아들인데 널 포기해?
난 그렇게는 못 해.”
춘천댁의 말에 정수는 맥이 탁 풀렸다.
피도 섞이지 않은 우리가 무슨 모자 관계란 말인가.
“아들이요? 제가 왜 아들이에요?
우리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그냥 남이라고요!
그러니 이제 제 일에 신경 쓰지 마시고 자기 인생이나 챙기세요.”
지금까지 어떤 말을 해도 인상을 구기지 않았던 춘천댁도 이번만은 참기 힘들었는지 지금까지 쌓인 울분을 터트리며 울부짖었다.
“남이라고?! 우리가 왜 남이니!
넌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야.
넣은 어미만 어미라니?
키운 어미도 어미인 거야!
넌 무조건 내 아들이야. 난 절대 포기 못 해!
이번만은 절대 포기 못 한다고!”
“하…..”
“정수야. 넌 내 아들이야.
넌 누구의 대신도 아니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고.
네가 내 친아들이 아니라고? 그게 뭐가 중요해?
내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우리가 살아온 그 시간이 모두 사라지는 거니?
그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야?
내가 사랑하는 아들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정수 너였어.
그러니 제발…. 제발 네 옆에 있게 해주렴.
엄마로서….. 가족으로서…..”
정수는 순간 할말을 잃었다.
10년간의 울분과 후회가 가득 들어있는 어머니의 말.
그 말은 제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말이었지만 어쩌면 10년 전에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신은 그냥 도망쳤던 것이 아닐까?
어머니의 인생을 위한다는 핑계를 대며 먼저 버림받을까 봐 그게 두려워 스스로 벽을 쌓아 버리고 결국 자신만을 위했던 그런 이기적인 생각.
자기가 없어도 어머니가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결국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도주에 불과했다.
정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OK 좋아!”
태원은 이번 장면도 마음에 들었다.
혈연이 이어지지 않은 모정을 믿지 못하는 정수의 혼란함도, 다시 아들을 놓을 수 없다는 춘천댁의 절박함도 모두 완벽하게 잘 표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촬영 속도였다.
말도 안 되는 진행 속도는 태원이 근심하는 모든 문제에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었다.
다만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배우들의 상태였다.
그나마 괜찮았던 민수조차 몸을 망친 다음에는 심상치 않은 낌새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촬영 속도가 빨라진 건 저런 배우들의 상태 때문이었으니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나저나 저건 괜찮을지 모르겠네.”
찬진은 고민하는 태원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초보 감독의 고뇌가 느껴져서였다.
“왜? 배우들 때문에 걱정돼서?
김 감독은 저런 거 처음 보나?”
“네? 아, 예. 저거 지금 완전히 몰입해서 저런 거죠?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로 본건 처음이라…..”
“그래? 독립영화 찍을 때도 배역에 완전히 휘말려서 연기하는 애들이 있던데 김 감독은 그런 애들을 아직 못 만나봤나 보네.
흠…. 그런데 저건 어쩔 수 없어.
저기다 데고 뭘 어쩔 거야?
당신의 상태가 걱정되니까 정신 좀 차리십시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거 같아?
배우들도 자기 상태 다 알고 있어.
그러니 빨리 서둘러 찍기나 하라고. 빨리 끝내주는 게 배우들 도와주는 거야.”
“그래요?”
“배우들이 전부 저 상태가 돼 버리면 솔직히 저건 못 말리지.
못 말리고말고. 그러니 우리 김 감독은 카메라 위치나 잘 조정하라고.
앞으로 김 감독이 할 일이 많지 않을 테니까.”
예언 같은 찬진의 말에 태원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실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