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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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 모정이라.
민수는 인형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윤숙의 손끝에서 진한 모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를 여의고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민수가 잠시 잊고 있었던 그런 포근함이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자신을 존중하고 아껴주는 조윤희 선생님이 자신에게 보내는 그런 잔잔함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민수는 이 장면이 편집을 거치고 스크린에 올라오면 어떤 느낌일지 자못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느낌을 받을지도 의문이었다.
영화에는 많은 단역 배우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단역 배우들이 어느 정도 연기력을 가지고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자 강환 선생님이 저번처럼 극단 “뿌리”에 여러 배우를 데리고 촬영장을 방문했다.
아마 윤 대표의 부탁으로 배우들을 직접 모시고(?) 온 모양이었다.
“아이, 참. 이 형님은 진짜 툭하면 날 부른다니까.
저번에 재미를 톡톡히 보더니 이젠 나한테 연락하는 게 완전 자동이네.
내가 없었으면 어쩔뻔했어?”
조금 툴툴대면서 퉁명스럽게 이야기하지만 강환의 표정은 별로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민수가 전해 듣기로는 저번에 크게 한몫 챙긴 강환과 “뿌리”팀은 그 돈으로 제대로 준비한 연극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했다고 한다.
자신의 극장을 떠나 더 큰 규모의 공연장에서 자신들의 극을 공연한 건 처음이라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그래도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고 하니 참 고무적인 일이었다.
민수의 전생에선 “천지”팀이 다른 공연장에서 공연한 적이 없었으니 이는 결국 민수가 만든 작은 나비효과인 셈이었다.
그리고 저번 공연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뿌리”팀은 이제 예술의 전당 공연을 목표로 극을 만든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면 강환도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오늘 강환이 데리고 온 배우들은 연극을 배우면서 영화나 드라마 연기에도 관심이 있는 그런 배우들이었는데 극단 전체가 쉬는 타이밍이라 시간상 여유가 있는 배우들은 다 끌고 온 모양이었다.
촬영장 분위기도 익숙해지고 연기도 배우고 두둑한 일당까지 챙길 수 있는 일이었으니 배우들도 별로 불만은 없었을 것이다.
민수 자신도 전생에 이런 기회가 생기면 고맙게 생각하며 감사히 참가했었다.
“요~ 민수 요즘 잘나가던데.
우리 애들 좀 잘 봐줘. 영화 쪽 연기는 서툰 애들이 많아.”
강환은 민수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나가긴요. 여기저기에서 무시당하는 입장인데요. 뭘.
그리고 제가 선배님들한테 잘 부탁드려야죠.
저분들 중에 저보다 후배가 누가 있다고요.”
강환은 변함없는 민수의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에 눈이 삔 놈들이 많아서 그래.
걔들은 한심하게도 진짜랑 가짜를 전혀 구별을 못 하거든.
그러니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야. 그리고 원래 잘나가는 놈이 형님인 거야 인마.
어쨌든 우리 애들 잘 부탁한다?”
언제나처럼 쾌활한 강환의 말은 민수의 어깨를 조금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와 동행한 배우들도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민수는 강환이 데려온 배우 선배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천천히 촬영장소로 이동했다.
민수의 첫 촬영은 고등학생이 된 “정수”가 얼마나 싹싹하고 착한 청년으로 자라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냥 평범하고 무난한 밝은 모습을 연기하면 되었기 때문에 전혀 어렵지 않은 장면이었고 아무 문제 없이 순탄하게 촬영되었다.
친구들과 즐겁게 웃는 모습과 방과 후 놀러 가자는 친구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빨리 돌아와 어머니의 일을 돕는 정겨운 모습까지.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구김살 없는 모습이었다.
이 장면만 봐도 춘천댁이 정수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며 키웠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정수가 우연히 어머니의 혈액형을 알게 되면서 상황이 점점 달라지게 되었다.
정수는 어머니가 없는 집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작지만 어머니의 온기가 서린 따스한 방이 정겹기 그지없었다.
가난한 작은 단칸방이었지만 정수는 지금까지 궁핍한 살림을 원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웃으며 방을 정리하던 정수는 우연히 한 장의 문서를 발견하게 되었다.
“응? 뭐지?”
그것은 어머니의 진료 기록이었다.
홀몸으로 아이를 지금까지 키우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젊을 때 넌지시 재가 의사를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어머니는 꿋꿋이 혼자 자신을 키웠다.
정수는 그 점이 고맙기도 했고 정말 미안하기도 했다.
아마 이 진료 기록도 알게 모르게 고생하는 어머니의 흔적일 것이다.
자신이 빨리 커야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줄 텐데.
“후…. 혹시 많이 아프신 건 아니겠지?”
정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료 기록을 살폈다.
혹시 큰 병이면 어떡하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어머니의 증상은 단순 과로에 가벼운 감기였다.
억척스러운 어머니가 병원까지 간 일인데 감기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던 정수의 웃음은 어떤 한 부분에 이르러서 급격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혈액형이…O형? 어? 그럴 리가……
내가 AB형인데 엄마가 O형이라고?”
정수의 눈빛은 급격히 흔들리고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놀라 바닥에 주저앉은 정수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서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대체….뭐지? 왜…..”
정수는 지금까지 은연중에 자신이 외면했던 모든 사실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쳐 갔다.
커갈수록 점점 어머니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라나는 자신.
그저 친탁했거니 하며 넘어갔었지만, 솔직히 이상하긴 했다.
술을 잔뜩 먹고 떠들어대던 상인들의 거친 말들.
그래, 내가 갓난아이 때 남편을 잃고 나만 겨우 살렸다고 했던가.
“하…..그래….. 그랬던 거였어. 하하….
난 엄마의 아이가 아니었던 거구나. …. 그걸 이제야 알다니…..
그리고 난 결국 누구를 대신해 이 자리에 있는 거였고…..”
그리고 이날 이후 정수는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었다.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집에 있는 시간도 점점 짧아졌다.
또한 염려하는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말을 해도 그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괜찮다며 말을 줄였다.
어머니에게 살갑고 다정하게 대하던 착한 아들은 이제 없었다.
다만 어머니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상처 입은 아이가 그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OK!”
태원은 찬진과 함께 조금 전에 마무리된 민수의 단독 씬 영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표정 연출과 순간적인 분위기 전환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하…. 감정의 깊이가 상당하네요.
극적인 분위기 전환도 괜찮고요.”
“그렇지. 원래 기초가 잘 잡힌 녀석이었거든.”
“들리는 말로는 이름있는 감독들이 민수 씨를 쓰는 걸 조금 꺼린다고 하더라고요.
독이든 성배라던가?
인기는 있는데 연기는 불확실하고 한창 거품만 잔뜩 차올라 있어서 비싸기만 하다나 뭐라나.”
찬진은 태원에 말에 코웃음을 쳤다.
하긴 자신도 얼핏 그런 소리를 듣기는 했다.
아무래도 비싼 돈을 들여서 민수를 쓰기에는 불안하다는 여러 감독의 평가를 들으며 찬진은 굳이 설명을 늘려놓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이제 그 돈으로도 민수를 쓸 수 없을 게 뻔했고 저 배우의 위치는 점점 높아져만 갈 테니 말이다.
“흥.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는 놈들이 보는 눈들이 다 그 모양이라서 그래.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걸.
자. 이제 선생님의 연기를 한번 보자고.
민수 녀석이 불을 잘 지펴 놓았으니까.”
정수의 어린 시절 장면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금 전에 촬영한 정수가 자신이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과 고등학교를 떠나며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인사하는 장면이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씬이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촬영을 시작하는 정수가 떠나는 장면은 처음으로 민수와 윤숙의 감정 대립이 일어나는 장면이기도 했다.
특히 민수의 일방적인 감정 표현이 주를 이루는 장면이다 보니 그걸 받아주는 윤숙의 역량이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정수는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따듯하고 다정한 눈빛이었다.
과연 저 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신일까 아니면 원래 자신의 자리에 있어야 했던 그 누군가일까.
예전에는 그것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였다.
이건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어머니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자신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대용품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비참했으니까.
그리고 어머니도 예전에 떠나버린 자식에 대한 미망과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정수는 오늘 자신과 어머니 사이에 걸려있는 어긋난 사슬을 완전히 끊어 놓을 생각이었다.
“제가 서울에 가면 이제 저를 잊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인생을 사세요.
전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요.”
“대체….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춘천댁은 정수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말수도 줄어들고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아들을 보며 춘천댁도 매우 걱정스러웠지만 좀 늦은 사춘기가 왔겠거니 하며 이해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이런 말을 하다니.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아들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 거 같아 불안하기만 했다.
“저, 다 알고 있어요.
전 당신 아들이 아니고 누군가를 대신해 이곳에 있었다는 걸요.
제가 지금까지 받은 사랑도 다 제 것이 아니었겠죠?”
자조 섞인 정수의 말에 춘천댁의 눈이 크게 떨렸다.
그리고 뒤이어 손끝까지 떨려온다.
갑작스럽게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춘천댁은 떨리는 자신의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정수의 말에 막혀 갈 곳을 잃고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아..아니야. 정수야. 그게 아니야.”
“저도… 이제 제 인생을 살고 싶어요.
누구의 대용품이 아니라 제 인생을요.
그러니 어머니도 인제 그만 하세요.
예전에 떠난 아들은 이제 잊고 새 인생을 시작하시라고요.”
정수의 말에 춘천댁은 억지로 소리를 질러댔다.
“그게 아니야. 정수야.
넌 내 아들이야.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아들이라고!
넌…. 대용품 같은 게 아니라 정말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고…..”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정수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정수는 차라리 자신이 떠나주는 게 어머니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친자식도 아닌 아들을 키운 모정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정말 아니라고요?
가슴에 손을 얹고 절 보면서 한 번도 다른 아이를 생각한 적이 없으세요?
정말 그래요?”
계속 부정하던 춘천댁도 그 부분에서는 할 말을 잃고 말문이 막혔다.
춘천댁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바로 아니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정말 아니었나? 갑작스러운 의문에 춘천댁 자신도 그 해답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그건….”
정수는 말문이 막힌 춘천댁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은혜는 잊지 않고 꼭 갚을게요.
항상 건강하세요.”
정수는 멍하니 앉아 있는 춘천댁에게 마지막으로 절을 올리고 그렇게 집을 떠났다.
춘천댁은 정수가 나가는 걸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문을 잃은 춘천댁은 그렇게 한동안 계속 정수가 나간 그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OK!”
민수와의 촬영이 끝나고 윤숙의 개인 촬영이 바로 이어졌다.
정수가 없는 집에서 정수의 옛 물건들과 추억이 깃든 사진을 보며 정수를 그리워하는 춘천댁의 모습이었다.
춘천댁은 정수가 떠나자 자신이 정말 정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자신이 사랑한 아들이 죽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정수였다는 걸 깨닫는다.
처음 정수를 만난 날 정수의 몸을 감싸고 있던 포대기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던 춘천댁은 그날 정수를 바로 잡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하며 깊은 오열을 내뱉었다.
이 장면에서 보여준 윤숙의 오열에는 정말 가슴 저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김태원 감독도 남들 몰래 슬쩍 눈가를 훔치며 한숨을 쉬었다.
“하…. 어머니도 저 때 저러셨을까? 저렇게 먹먹하게 말이야…..”
태원은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왠지 쉽게 잠들지 못할 거 같았다.
평소보다 어머니가 더 그리운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