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16화 (216/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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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화 제작사의 행태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많은 사람의 질타를 받는 중에도 김태원 감독의 영화 제작 준비 과정은 거칠 것이 없었다.

상업 영화를 제작해 보지는 않았지만, 독립영화를 제작하며 혼자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던 깜냥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특히 찬진의 영화사 스태프들이 제작 준비 과정에 투입되면서 찬진까지 힘을 보태자 준비 과정의 진행 상황은 순풍을 탄 듯 평안하기만 했다.

찬진에게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자처했냐고 묻는다면 당장 할 일이 없어서, 배우들의 연기가 궁금해서, 스태프들이 일을 잘 해주나 확인 차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윤 대표의 당부 때문이었다.

[어차피 당장 할 일도 없는데 손 좀 보태는 게 어때?]

[뭐? 이 사람아. 나도 쉴 때는 좀 쉬어야지.

사람이 어떻게 맨날 바쁘게만 살아?]

[그 휴식이 너무 길었잖아? 어차피 스태프들 다 빠졌으니 촬영은 못 할 테고.

그러니 인심 좀 쓰라고.

김 감독이 아직 모르는 게 많아. 그거야 당연하겠지. 제대로 영화를 찍어 본 적도 없으니까.

그러니 선배로서 좀 잘 봐줘.]

[와. 이놈 보게…..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제수씨가 그러더라. 고맙다고 말이야.

이번에 감독상 타면서 처가에 가서 어깨 좀 세웠다지?]

[그….그건 그렇지만….]

[제수씨가 부탁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하시던데. 제수씨한테 말하면 되려나…..

찬진이가 거절하더라고 말하면 제수씨가 별로 안 좋아 할 거야. 그렇지?

은혜를 입고 안면몰수하는 사람을 제수씨가 그렇게 경멸했지 아마?]

[와…. 야! 윤강철 너 이런 놈 아니었잖아?]

[그러게나 말이다. 기획사 이끌어 가다 보니 사람이 변하더라고.

이용할 수 있는 건 가능하면 이용하는 쪽으로 말이야.]

[허….. 에이씨. 알았어. 간다. 가!

와이프한테 입도 뻥긋하지마 너.]

말은 이렇게 했지만 찬진도 강철에게 입은 은혜를 가볍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감독상을 타면서 와이프가 얼마나 신나 했던가.

장인어른까지 자신을 다시 봤다는 듯이 자랑스러워했으니 그 은혜를 갚긴 갚아야 했다.

그리고 사실 민수와 윤숙이 이 영화를 어떻게 찍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 장면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김 감독?”

“고민이네요. 엑스트라를 쓰기에는 조금 걸리긴 하죠.

아이 같은 경우는 더 애매하고요.”

찬진이 합류하면서 태원에게 가장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이렇게 장면 구성에 대한 조언을 받을 수 있다는 거였다.

독립영화의 터줏대감이자 상업 영화도 몇 번 찍어본 찬진은 아직 경험이 적은 태원에게는 정말 대단한 선배이자 본받고 싶은 멘토였다.

“차라리 그냥 그래픽으로 대체하면 어때?”

“CG요? 이런 것도 되나요?”

“안될 건 없지. 요게 많이 들어서 그렇지.

쏟아 넣는 만큼 퀼리티가 나오는 게 CG니까.

하지만 솔직히 웬만한 엑스트라를 세워 놓고 목소리 더빙을 하는 거보다는 그게 더 나을걸.

아마 관객들도 놀랄 테고.

완성도가 완전 다르다니까.”

태원은 놀란 눈으로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고 손을 슬쩍 흔드는 찬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예산이…….”

“아, 예산.

그래 예산은 중요한 문제지.

그런데 이런 영화에서 예산 잡아먹는 건 일정 때문 아닌가?

배우들이 감정 노동에 지치니까 중반 가면 흐지부지해지고 그러면 늘어져서 촬영 기간 늘어나고 덩달아 예산까지 잡아먹고.

그런 거면 걱정하지마.

모르긴 몰라도 촬영 엄청나게 빨리 진행될걸.”

“그래도 그럴 수야 있나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다 고려해야죠.”

“허허, 이 사람 참…..”

찬진은 예산에 구애받는 태원의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평소에 자신이 영화를 찍을 때마다 예산 때문에 벌벌 떨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였다.

하긴 영화감독이라면 당연히 예산 무서운 줄은 알아야지.

하지만 윤강철이랑 작업할 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봐. 김 감독. 뭘 그리 걱정해.

지금 이 영화 예산이 40억이던가?

민수가 20억. 강철이가 20억.

홍보비로 한 10억 잡고. 대충 영화는 30억 안에서 해결해야겠네.

그럼 CG로 한 10억 끊어 줘도 되겠네.

우리 스태프들이 쥐어짜서 20억에 맞춰 찍어 줄 테니까 말이야.

1월 2월, 두 달 촬영하면 20억에 되긴 하겠어.”

“예? 앞에 그 몇 분 때문에 10억을 쓴다고요?”

“사람 참. 놀라긴. 원래 CG가 그래.

씬 전체가 아니라 사람 위에만 입히는 거라 그 정도지, 만약 그 장면 전체가 다 들어가 갔으면 그걸로도 턱도 없을걸?

아, 그리고 이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으니까 첫날 편집해서 바로 넘겨.

이게 빨리 나와야 숨통 트일 테니까.”

“네, 그건.….알겠습니다. 하지만 두 달이라니요.

너무 촉박하지 않나요?”

“아니 충분해. 그리고 두 달 넘어가잖아? 그럼 그냥 강철이 찾아가서 돈 더 달라고 해.

내가 저번에 강철이랑 작업해 보고 느낀 건데.

그 친구 완전 도라에몽이야.

달라고 하면 바로 돈이 나와요.

캬~세상에. 난 남의 돈으로 영화 만드는 게 그렇게 편하다는 걸 처음 알았어.

딱 가서 작품 퀄리티 때문에 CG 작업을 넣다 보니 예산이 초과했다.

그러니 10억만 더 내놔라. 이러면 강철이가 두말없이 내줄 거야.

여기서 중요한 건 무조건 당당해야 한다는 거야.

맡겨놓은 내 돈을 가져오는 거처럼 당당하게 그리고 꼭 작품의 퀄리티 때문이라는 말을 빼놓지 말고.

아, 대신 배우의 연기가 어쩌고 하면서 일정이 늘어나서 그렇다는 이딴 소리는 하지 마.

그건 완전 마이너스니까.

그러면 무난할 거야.

윤강철이 그거 완전 쉬운 남자거든.

뭐 못 믿겠으면 나랑 내기해도 좋아.”

찬진은 순진한 태원에게 강철의 돈을 뜯는 방법부터 가르치고 있었다.

아마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강철에 대한 사소한 복수심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눈을 빛내고 듣고 있는 태원을 보니 강철이 제작비를 추가로 투입하는 건 불가피해 보였다.

“그럼 이 부분은 차라리 흑백으로 처리하는 게 더 느낌 있을 거 같은데요.

과거라는 느낌이 확 들어서 직관적이기도 하고요.”

“그건 좋은 생각이네.

그런데 나중에 민수가 병상에 눕는 건 어떻게 할 생각이야?

민수가 슬림한 체형이긴 하지만 워낙 활기 넘치는 느낌이라 연출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나자빠져서 다 죽어가는 애가 활기 넘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있잖아?

화장이나 분장으로 해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글쎄요….. 그건 배우랑 이야기해 봐야죠.

촬영 도중에 바뀌는 거라 미리 어떻게 하지도 못하겠네요.

민수 씨 혼자라면 몰라도 정윤숙 선생님도 그건 마찬가지거든요.

두분 중 한 분이 무슨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그래. 그건 첫 촬영 때 이야기 하자고.

배우들도 생각이 있을 테니까.

그래도 웬만하면 노령의 선생님보다야 젊은 민수가 희생해야겠지.”

“네. 그래서 지금 계획표는 선생님의 상황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촬영 일정이 정말 두 달이라면 중간에 선생님이 쓸데없이 고생하실 필요도 없겠구먼.”

“맞습니다. 그러면 정말 더는 바랄 게 없겠죠.”

그렇게 찬진과 태원이 계획을 착착 세우고 있을 때 민수 역시 온 신경을 자신이 연기할 “정수”에 맞춰놓고 세부적인 연기 방향을 조율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편의 영화를 다 액션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편하게 찍은 감이 있어서 이번 영화가 민수가 찍는 첫 영화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등장인물도 중심인물은 자신과 정윤숙 둘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정윤숙의 원맨쇼 같은 영화였지만 자신에게 오는 부담도 적지는 않았다.

민수가 특히 눈 여겨 보고 있는 부분은 바로 잘나가던 정수가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며 완전 폐인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만약 이 부분을 가장 먼저 촬영한다면 촬영 전에 충분히 준비를 할 수 있었지만 지금 나온 촬영 계획표로는 촬영 중간에 그 부분을 찍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걸 바꾸자고 말하지도 못한 것은 지금 촬영 일정표가 영화의 시간적 흐름에 맞물려 있기 때문이었다.

이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니만큼 분명 이렇게 구성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음…. 갑자기 폐인이 되어 버린다라. 이걸 어떻게 한다.

이게 될까?”

민수도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원래 사람이 한두 끼만 굶어도 어느 정도 초췌한 연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치명적인 몸뚱이는 생각보다 효율이 너무 좋아서 그 정도로는 턱도 없었다..

“에휴. 별수 있나.

며칠이라도 시간을 달라고 하는 수밖에.”

하루 이틀 정도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안 자면 어느 정도 맞출 수는 있어 보였지만 그런 생각을 하니 영화 촬영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치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촬영 날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영화의 제목은 “Mama”.

“엄마” “어머니” “Mother” “모정” 등등 수많은 제목이 나왔지만, 그냥 편하게 “Mama”로 결정되었다.

특별한 의미는 없었지만, 이 영화의 모델이 되어준 태원의 어머니를 태원이 어렸을 때는 마마라고 불렀다고 해서 그렇게 결정된 것이다.

게다가 어감도 나쁘지 않아서 별다른 반대조차 없었다.

“Mama” 제작팀은 1월 초순에 신속하게 촬영에 들어갔다.

날씨가 추운 것이 나름 장애가 되었지만, 배우들과 태원이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올해는 평년보다 눈이 적게 온다고 해서 촬영 자체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사실 실외 촬영 자체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민수는 촬영장에 들어서는 윤숙을 발견하고 인사를 하러 가려다가 멈칫하게 되었다.

윤숙의 표정을 보니 섣불리 접근할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첫 주연작, 어쩌면 마지막 주연작이라는 부담감은 윤숙에게도 엄청나게 긴장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굳어 있던 윤숙이 민수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고 애틋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마치 친한 후배가 아니라 자기 아들을 따듯하게 바라보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와….. 세상에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차라리 윤숙이 긴장하고 있었으면 조금 마음이 편했을 텐데 저건 단순히 긴장한 것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벌써 기합이 완전히 들어간 윤숙의 모습을 보니 촬영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등골이 싸한 기분이었다.

민수는 크게 한숨을 쉬며 오늘의 첫 촬영인 “정수 엄마”가 정수를 줍는 장면이었다.

이번 영화의 주연인 윤숙은 정확한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정수 엄마” 혹은 “춘천댁”이라고 불리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는데 시나리오상으로 그랬고 감독이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에 민수도 윤숙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첫 장면은 추운 주택가를 정처 없이 헤매던 춘천댁이 어떤 가정집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아이를 발견하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위해 갓난아이의 모습과 젊은 시절이 윤숙의 얼굴을 교묘하게 CG로 편집하기로 했다는데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 장면에 대충 10억가량이 돈이 들어간다는 걸 알게 되면 민수도 뒤로 넘어갔을 것이다.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인 법이었다.

한 여인이 정처 없이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다.

비틀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겨우겨우 발걸음을 내딛는 모습이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세상을 잃은 듯한 허탈한 표정과 허무함과 절망감으로 가득한 눈빛이 그녀가 최근 아주 큰 일을 겪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을 내딛던 여성의 귀에 아련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기 울음소리를 들은 여성의 눈이 형용하게 빛나기 시작하고 몸에는 힘이 들어갔다.

여인이 걸음이 빨라지고 허겁지겁 주위를 살핀다.

애타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참을 찾았을까.

어떤 집 앞에 이불보로 둘러싼 무언가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누군가가 버려놓은 아기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갓난아이.

여성은 아이 앞에 주저앉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한참 동안 아이를 쓰다듬던 여성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무언가 결심한 여성은 그대로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는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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