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15화 (215/325)

#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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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만연해 있는 갑질 행태. 갑질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힘없는 시나리오 작가, 무명 감독에게 행해지는 무형의 폭력.]

[자신을 믿어준 무명감독을 위해 제작사에 맞선 영화배우.]

[구두 약속 믿고 주연 배우까지 섭외 마치자 바로 감독 교체.

신뢰란 덕목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다음 날 바로 자극적인 기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이 이번 일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이 일이 사람들에게 민감한 갑질의 행태로 알려지게 만든 메이저 언론의 사회면 기사들은 이번 일을 그저 단순한 연예계 가십거리가 아닌 거처럼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었는데 정말 누가 봐도 와, 이건 너무한데 라고 생각할 만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인터넷 기사를 읽고 있는 설아와 태준도 기사와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있었다.

“헤…. 영화 하나 찍는다더니 결국 이렇게 되네.

왠지 민수 오빠답다고 해야 하나.”

소파에 엎드려 발만 까닥거리면서 휴대폰으로 기사를 살펴보던 설아는 민수와 관련된 기사들을 보고도 별로 놀리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건 그렇지. 그냥 조용하게 영화만 찍으면 그게 민수겠냐.

괜히 윤 엔터 최고의 사고뭉치가 아니라니까.

게다가 보면 자기한테 뭐라고 하는 건 별로 신경 안 쓰는 거 같은데 주변 사람들이 피해받는 건 정말 득달같이 달려든다니까.

그게 민수의 매력이긴 하다만.”

태준도 민수가 이번에 벌인 일을 보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의례 한 번쯤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런 일이 생겨도 항상 작품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니 걱정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왠지 이런 일로는 민수에게 별 영향이 없을 거 같은 근거 없는 믿음도 그런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하긴….. 저번에 수연 언니 껀도 그랬고……

나한테 이렇게 문제가 생겨도 직접 나서 주려나? 히힛.”

“수연이 껀이면 그 양아치 녀석이 달라붙는걸 민수가 정리해 준 거 말이지?”

“어? 들었어? 수연 언니가 결국 말했나 보네.”

“죽상이던 애가 민수가 간 다음부터 확 밝아져서 내가 대충 낚아 봤는데 바로 파닥파닥 낚여 올라 오더라고.

그래서 알았어.

수연이가 참 거짓말을 못 해요.

뭐, 그래서 귀여운 거지만.”

설아는 피식 웃는 태준의 모습에 알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능청스러운 태준의 연기에 수연이 한방에 낚여갔을 것이다.

겉으로는 수연이 태준을 잡고 사는 거처럼 보이고 수연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 사실 은근히 실속은 태준이 다 챙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설아가 알기론 지금까지 수연이 태준에게 이긴 건 저번에 그 걸그룹 노래로 말도 안 되게 트집 잡은 일과 이번에 은우를 소속사로 데려온 것뿐이었다.

“어이구…. 그 언니가 오라버니한테 비밀이 있을 수가 없지.

순진한 우리 언니.”

잠시 수연을 애도하던 설아는 문득 예전에 녹음기로 들었던 민수의 빈정거림이 생각나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번에 언니 건으로 민수 오빠가 그놈한테 빈정거리는 걸 들었는데 그게 상당했거든.

그런데 이번에도 또 그렇게 했다네.

그러니까 음…… 준성 모드?

제작사 사장이 민수 오빠가 막 빈정대니까 열이 얼굴 끝까지 올라서 뻥 터지려고 했다는데?”

“준성 모드는 무슨…. 근데 넌 또 그 얘기를 어디서 들었어?”

“어디긴 당연히 선생님이지.

선생님 말씀 들어보니 민수 오빠가 짜증 날 만도 했더라.

정작 선생님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뭐라고 화도 잘 못 내시니까.”

“끙, 선생님이랑도 연락하고 지내는구나.

차라리 정 배우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랬어?

아~ 너 지금 민수 안 보고 있지? 언제까지 안 볼 거야?

캐릭터는 잡을 만큼 잡지 않았나?”

“어쩔 수 없어.

궁상맞고 조금 찌질하게 연기해야 하는데 아직 완전히 몸에 익지가 않았으니까.

그래서 지금 민수 오빠 앞에 서면 또 캐릭터가 망가진단 말이야.

그러니 조금 참아야지.

완전히 몸에 익을 때까지는.”

태준은 조금 의기소침한 동생을 보며 왜 저렇게 사나 싶었다.

“그래그래. 민수 앞에선 연기해야 하니까 당연히 캐릭터가 망가지겠지.

두 가지 전혀 다른 연기를 동시에 할 능력은 아직 안 되시니까.

그러게 차라리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대했으면 좀 좋았겠냐?”

“됐거든.

그리고 오라버니도 아는 걸 민수 오빠가 모를까.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거지.

내가 내숭인 거 대충 알고 있을걸.

민수 오빠가 오라버니 같은 줄 알아?”

“그럼 대체 뭐가 문제야?”

“됐네요. 내가 알아서 하니 신경 꺼 주시죠?”

“하….”

태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의 엉뚱한 동생이 하는 짓은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간악한 동생이 평생 동안 민수 앞에서 내숭을 떨 수도 있는 그런 여자라는 거였다.

참 무서운 동생이었다.

“그런데 너 은근히 민수 앞에서는 나한테 존댓말 하더라 소름 끼치게.”

“헤헤. 오라버니랑 나랑 5살 차이인데 내가 반말 찍찍하면 너무 버릇없어 보이잖아.”

“그래서 집에선 반말 찍찍하고 민수 앞에선 조신을 떠시겠다?

와, 미치겠네. 정말 이걸 민수가 봐야 하는데.”

태준의 말에 설아가 고개를 휙 돌려 태준을 노려보았다.

“이제 겨우 분위기 좀 타고 있는데……

오라버니 입만 열어봐.

내가 수연 언니한테 오빠 굴욕 사진만 모아서 한 백 장 보내 버릴 거니까.

누가 더 손해일까?

우리 오라버니 똑똑하잖아.”

“환장하겠네! 진짜.”

태준은 자신을 협박하는 동생을 볼 때마다 어이가 없었다.

저걸 빨리 민수가 데려가야 하는데.

제 동생이지만 너무 되바라졌다.

가끔 보면 도대체 누굴 닮은 건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예쁘니 절세 미녀니 떠들어대지만, 자신에게는 그냥 성격 나쁜 여동생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여동생을 소개해 달라고 다른 배우들이 조를 때마다 소름이 끼치곤 했다.

한때는 그냥 아무한테나 소개해 줄까 했었지만 그건 그 사람한테 너무 몹쓸 짓을 하는 거 같아 지금까지 계속 거절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소개해줬다고 저 앙칼진 여우가 상대의 사정을 봐줄 거 같지 않아서였다.

아마 조금만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상대를 넝마로 만들 것이다.

그러니 설아의 마음에 딱 들어버린 민수가 놀라울 수밖에.

민수에게는 왠지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민수 오빠가 영화에 넣은 돈이 20억이라는데 오라버니는 어떻게 생각해?

사람들은 조금 과하다는 말도 있네.

오라버니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설아의 물음에 태준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별로 생각할 거리도 아니라는 듯 즉답이 나온 것이다.

“뭘 어떻게 해?

부족한 돈 같이 넣고 영화 들어가는 거지.

어차피 통장에만 들어가 있고 쓰지도 않는 돈인데 그게 20만 원이면 어떻고 20억이면 어때?”

“헤… 그걸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야.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어차피 내가 찍으면 투자금 20억이 문제일까?

무슨 짓을 해도 원금은 보전될 텐데 고민할 게 뭐 있어?

저게 한 200억 들어가는 영화라면 몰라도.

어차피 원금은 보전. 잘하면 이익.

그리고 선생님이랑 같이 영화에서 연기.

이거 그냥 거저먹는 장사인데?

뭐 민수가 나랑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나라면 그렇다는 뜻이야.”

“음…..”

“그런데 이번에는 민수도 쉽지는 않을걸.

민수가 지금까지 영화에서 제대로 연기해 본 적이 없잖아?

“용의 울음”이나 “My Uncle, Joe”나 둘 다 감정 씬은 깔짝깔짝 이었고 그거 빼면 기껏해야 드라마인데.

드라마는 영화랑 완전 다르니까.

게다가 첫 상대가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정윤숙 선생님이란 말이지?

쉽지 않지. 나도 저번에 엄청나게 식겁했는데.”

태준의 말에 설아의 의구심을 느꼈다.

소속사 모든 식구가, 그리고 태준도 인정했던 민수의 감정 표현을 태준이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분석이 누구보다 예리한 태준의 말이었기에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왜? 민수 오빠 감정 연기 잘하잖아.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어?”

“이게 참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따지고 보면 민수나 나는 너처럼 그렇게 캐릭터를 완전히 잡고 들어가는 스타일은 아니야.

나는 머리로 캐릭터를 이해하고 그걸 표현하는 스타일이고 민수는… 음… 그러니까 캐릭터를 모방한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게 캐릭터에 몰입한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거든.

그런데 선생님 같은 분이랑 계속 연기를 하다 보면 그 경계를 넘어서게 되는 경우가 생겨.”

태준은 “용의 울음”을 촬영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윤태준과 천의 경계가 불분명하게 변했던 그 느낌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조차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배우로서는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배우들이 배역이 끝난 후 극도의 허무감을 느끼거나 정신적인 치료를 받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그런 경계를 넘어 자신과 캐릭터를 완전히 동일시하면서 생기는 문제 때문이었다.

그리고 태준은 배우 생활을 오래 하기 위해선 그런 문제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렇게 되면 연기 자체는 보기가 좋아지지.

그래서 나쁜 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민수 오빠가 배역에 과몰입해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네.

배역이 끝난 다음에 생기는 우울증이나 이런 거 말이야.

특히 민수 오빠처럼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 거고.”

설아는 민수의 정신적 문제가 완쾌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더 위험한 상황인 줄은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배우가 배역에 너무 몰입하는 경우에는 작품이 끝나고 다시 본연의 모습을 찾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음….”

“사실 “용의 울음” 때는 정말 좋았지.

민수 같은 경우에는 그 경계의 언저리에서 연기한 거처럼 보였거든.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마지노선이 바로 거기고.

그런데 예전에 처음 민수를 봤을 때는 완전히 몰입되어 있었어.

그때야 당연히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었고 다른 방법이 없어서 캐릭터 자체에 몰입하는 걸 선택한 모양이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때도 민수가 조금 힘들어 보였거든.

연기 마치고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단 말이야.”

“그런데 솔직히 감정연기는 그때가 제일 좋긴 했으니……”

“완전히 몰입했으니 감정 자체는 당연히 좋았지.

난 왠지 이번에도 민수가 그렇게 할까 봐 걱정되는 거야.

배역도 그렇고, 선생님하고 하는 연기니까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나.”

“그런데 보면 진짜 연기 잘하시는 선생님들도 다 그렇게 연기한다고 하던데.

그분들은 괜찮은 거야?”

“그분들이야 어느 정도 요령이 있겠지.

기본적으로 경력도 많고 그런 경험도 많으니까.

그리고 그분들도 항상 그런 식으로 연기를 하시진 않아.

씬에 따라 종종 몰입하고 빼고 이런 식이지.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아니잖아.

게다가 민수는 더하지.

보통 배우들은 아무리 몰입해 들어가도 감정 표현의 기복이 그렇게 크지 않는데, 민수는 그 좋은 감정 표현 때문에 그 기복이 엄청날 테니까.”

“조절도 안 되는데, 한번 들어가면 엄청나게 데미지가 있을 거라는 말이네.

상대적으로 연기는 정말 좋아질 테고.

그리고 연기가 좋아지니 민수 오빠 성격상 당연히 그걸 막지 않을 거고.”

“내 생각은 그런데.

확신은 아니야. 봐야 알지.

그리고 애초에 몰입 증후군이란 게 한 가지에 엄청 몰입한다는 거 아니야?

만약 그 대상이 배역이 되면 엄청 피곤할 거란 말이지.”

“아….. 그건 또 그렇네.

게다가 요즘 민수 오빠 말로는 감정 자체가 예전보다 더 잘 느껴진다고 했으니…..”

이건 정말 예삿일이 아니었다.

배역에 빠져서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오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니.

태준의 말을 들은 설아는 자신이 어떻게 하면 민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전에 배역에 너무 몰입한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교육받았던 소희에게 배역에 완전히 몰입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 후유증을 줄이는 방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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