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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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거칠게 시나리오를 덮은 민수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고 감은 두 눈 사이에 자리 잡은 미간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민수는 눈을 뜨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 우선 알아봐야겠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굳은 표정의 민수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윤 대표와 민 여사가 티타임을 즐기는 대표실이었다.
윤 대표에게 대강의 상황을 듣고 앞으로의 일을 어떤 식으로 진행 시킬지 이야기를 마친 민수는 정확한 사정을 알기 위해 윤숙을 찾아갔다.
민수가 찾아갔을 때 윤숙 역시 갑자기 변해버린 상황에 당황했는지 이곳저곳 연락을 해서 정확한 상황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시나리오 때문에 온 거니?”
“네 선생님.”
민수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지만 윤숙의 얼굴만 봐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열의에 불타는 그녀의 모습이 실의와 낙담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온 자신이니만큼 정확한 상황파악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시나리오의 출처는 제작사라고 하는구나.
정확히는 투자자 쪽에서 제작사로 넘긴 시나리오고.
제작사는 새로운 시나리오를 더 마음에 들어 하는 상황이라네.”
여기까지는 민수가 윤 대표에게 들은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요? 우선 피아식별부터 정확하게 하죠.
가장 중요한 건 시나리오를 가진 감독님이겠네요.
감독님은 알고 있는 일인가요?”
민수의 말에 윤숙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제작사 쪽에서 아예 다른 감독을 쓸 생각이야.
정말 어이없는 일이지.
크랭크인에 들어가기 전에는 감독이 바뀌는 일도 비일비재하다지만 어떻게 사람들이 그러는지…..”
윤숙의 말을 들어보니 민수도 그녀의 한탄이 이해되었다.
처음에 김태원 감독이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사를 찾아갔을 때 당연히 제작사 쪽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배우를 구해 오면 한번 생각해 보겠다는 제작사의 말에 김태원 감독은 자신이 생각한 이미지와 가장 비슷하고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따듯한 느낌을 주는 윤숙에게 여러 번 찾아가 매달리게 된 것이다.
윤숙도 처음에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지만 태원의 간곡한 부탁과 굳은 의지가 마음에 들어 자신의 마지막을 한번 불살라 보겠다는 생각으로 영화에 뛰어든 건데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니 크게 낙담하게 된 상황이었다.
“웃기네요. 진짜.
가만히 앉아있다가 배우들이 들어오니 갑자기 욕심이라도 생겼나 봐요?
지금 아무도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았다는 걸 잊었나 보네요.”
윤숙의 말을 들어보니 피아를 확실히 구별할 수도 있었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알았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준비해 주마.
뒷일도 걱정하지 말고.
윤숙 누님한테 지금까지 뭐 하나 제대로 해준 적도 없었는데 차라리 잘 됐구나.]
대화를 마치고 대표실을 나설 때 윤 대표가 해준 말을 상기하며 민수는 이번 일에 열쇠가 될 감독과 시나리오의 향방부터 챙기고 나섰다.
“김 감독님도 아세요? 지금 이 상황을?
그럼 시나리오는 어떻게 됐어요?
설마 그쪽이랑 계약으로 묶여 있는 건 아니겠죠?”
“김 감독도 완전 넋이 나간 상태야.
그리고 쓰지도 않을 시나리오를 계약했을 리가 있겠니?
김 감독도 참, 사람이 순진하지.
설마 계약도 안 하고 배우부터 찾아다니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니?”
민수는 시나리오가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괜찮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시나리오 계약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니 다행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작사가 더 가증스러워졌다.
아예 처음부터 김 감독을 이용할 생각만 했던 제작사의 검은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대충 알만하네요.
우선 김 감독님한테 시나리오나 잘 챙기라고 하세요.
그리고 우리는 제작사를 만나보죠.
당사자의 말은 들어보고 나서 판단해야지, 안 그러면 또 이상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그래야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번 들어나 보자꾸나.”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계속 윤숙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민수도 그런 윤숙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났을 때 윤숙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거니?”
“……”
“요즘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아무리 시대가 바꿔도 나 같은 배우는 주연이 될 수 없다고.
서울 거리를 걷다 보면 아마 동네에 한두 명씩은 있을 거 같은 그런 얼굴로 주연 배우라니.
참 가당치도 않지.”
“선생님…..”
“아직도 조연으로 날 원하는 곳은 많더구나.
하긴 어디가 갖다 붙여도 주변과 잘 묻어 나니 나만한 조연은 찾기 힘들겠지.
그렇게 아무런 색도 없으니 당연히 주연은 힘든 거고.
송충이는 뽕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더니……”
민수는 윤숙을 위로할 수 있는 어떤 말도 생각해 내지 못했다.
민수는 그저 윤숙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리고 도착할 때까지 기운 빠진 윤숙의 넋두리는 계속되었다.
제작사에 도착하자 사장이 환하게 웃으며 민수와 윤숙을 반겨 주었다.
민수는 그런 사장의 모습에 더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하. 민수 씨, 계약하러 오셨군요.
어때요? 바뀐 시나리오가 훨씬 산뜻하지 않나요?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신파를 본답니까?
그런 시나리오로는 투자자를 모을 수가 없어요.
투자자가 없으면 영화도 없는 거죠.
그럼 계약 조건부터 이야기해 볼까요?”
민수는 혼자서 김칫국부터 들이키는 사장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 시나리오랑 감독님이 마음에 들어서 출연을 결심했는데 이건 완전히 다른 영화네요.
그럼 감독님도 바뀌는 건가요?”
민수의 말에도 사장을 웃음을 잃지 않고 청산유수처럼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김 감독이요?
그 사람 독립 영화판에서만 뒹굴던 친구인데 어떻게 상업영화를 맡기겠어요?
이번에 제대로 된 감독님을 모셨으니까 그분이랑 찍으시면 됩니다.
민수 씨가 잘 모르나 본데.
원래 이 바닥에서 시나리오가 바뀌는 일이야 비일비재하죠.
지금 시나리오가 훨씬 나은 시나리오니까 그냥 따라오시면 될 거예요.
그리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독립 영화판에서만 일하던 감독은 액션을 몰라요.
그러니 그런 감독하고 찍어 봤자 민수 씨에게 남는 게 없다는 뜻이죠.
다 민수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민수는 사장의 말이 점점 길어지자 더는 들을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장의 말을 들어보니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만했다.
지금 저 사장은 자신이 아직 경험이 적은 신인이니 적당히 어르고 달래면 영화를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윤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점이 더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가지는 더 물어보고 싶었다.
“그럼 정윤숙 선생님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원래 주연으로 이야기되다가 갑자기 제가 주연이 되는 바람에 조연이 되셨는데요.”
사장은 민수가 윤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크게 인심 쓴다는 듯이 으스대며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하하. 정 선생님이요?
아아. 걱정하지 마세요. 물론 배역은 조연이지만 주연급으로 개런티가 나갈 테니까요.
원래 주연으로 모셨으니 그 정도 대우는 해 드려야지요 하하.”
일그러지는 윤숙의 얼굴을 보며 민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곳에 온 소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민수는 사장의 말을 듣고 자신의 행동 방향을 확실하게 결정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그럼 전 다른 영화를 알아봐야겠네요.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민수가 일어서려고 하자 사장은 황급히 민수를 붙잡았다.
민수는 자신이 이럴 줄 몰랐다는 듯 놀라는 사장의 표정이 더 어이없었다.
“아니, 민수 씨 분명 우리랑 영화를 찍는다고 하셨잖습니까?
투자금도 많이 모였는데 이러시면 안 되죠.”
“네 분명 영화를 찍는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그 영화가 아니잖아요.
전 이 영화를 찍는다고 말씀드린 적은 없는데요.”
“하…. 구두계약도 엄연히 계약이죠.
지금 돈이 얼마가 왔다 갔다 하는지 알고서 하는 소리예요?
이거 정민수 씨가 책임질 수 있어요?
이런 이야기가 다른 곳에 흘러 들어가면 민수 씨한테도 별로 좋지 않을 텐데요.”
“그러게요. 구두계약도 계약인데 참 잘 안 지켜지네요.
이래서 사람들이 계약서부터 쓰나 봐요.
누구는 사장님 말만 믿고 배우들한테 발품 팔아서 겨우겨우 약속을 받아 냈는데 결국 일이 이렇게 되네요.
이거 다른 사람들이 알아도 괜찮을까요?”
민수의 말에 사람 좋게 웃던 사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더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민수를 쏘아보았다.
“하. 정말 어이가 없어서.
이봐. 영화 한두 편 찍고 자네가 무슨 대단한 스타라도 된 거 같아?
이런 식으로 계약을 파투 내면 누가 자네를 믿고 쓰겠나?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니까 무슨 대단한 스타라고 생각하나 본데.
자네는 그냥 신인 배우일 뿐이야.
그따위로 행동하면 이 바닥에서 오래 못 가지.
두고 봐라.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아마 오늘 일이 두고두고 네 발목을 잡을 거다.”
상대가 화를 내고 막말을 하고 있는데도 민수의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작게 미소를 머금으면서 감사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 사장님이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멍한 표정으로 민수와 사장의 말다툼을 바라보던 윤숙도 민수가 나서자 바로 뒤따라 나섰다.
윤숙은 자신이 화를 낼 틈도 없이 이야기를 끝내버린 민수가 어이없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대신해 사장을 상대해준 점이 고맙기도 했다.
게다가 일부러 빈정거리면서 상대를 화나게 한 것은 아마 자신 때문일 것이다.
“네. 대표님. 결국 그렇게 됐네요.
네네. 그럼 바로 그렇게 하죠.
아니요. 주연 개런티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던걸요.
맞아요. 네.
그럼 스태프들은요? 네네. 아 그렇게요?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아뇨.”
제작사를 나와서 차에 타자마자 민수는 윤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하고 예정대로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윤숙은 그런 민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민수는 그런 윤숙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따지고 보면 결국 저 때문에 영화가 엎어진 셈이네요.
제가 영화에 안 들어왔으면 저 제작사에서 그런 식으로 욕심을 부리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니 제가 책임질게요.”
처음에 민수가 윤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상황의 원인으로 생각한 것이 바로 민수의 합류였다.
다른 배우였으면 상황이 달랐을 수도 있는데 민수가 영화계에서 액션 배우로 이름을 날린 것이 이 변화의 가장 큰 요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어떻게 해결할지 해결책에 대한 논의를 마친 후였다.
만약 제작사 측에서 시나리오 계약까지 마치고 감독을 그대로 둔 상황에서 투자자의 요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나리오를 수정한 것이라면 윤 엔터에서 투자하는 방법으로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만약 제작사 측에서 갑작스러운 욕심으로 시나리오를 바꾼 것이라면 민수가 빠질 거처럼 하면서 투자금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던져줄 계획이었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감독 쪽을 설득해서 시나리오 계약 파기 후 새로 제작사를 찾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놓은 여러 가지 방법들이 무색하게도 상대는 아예 시나리오 계약조차 해 놓지 않았다.
시나리오 계약도 없이 배우부터 찾아 나선 김태원 감독의 무지와 순진함이 이득으로 돌아온 경우였다.
상업영화에 대하여 웬만큼만 알았어도 김태원 감독이 시나리오 계약 없이 배우를 찾아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나리오 계약이 없다는 것은 상대가 이 시나리오를 쓸 전혀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제작사는 시나리오를 계약하면서 지급하는 푼돈조차 아끼려다가 계약 자체를 놓친 셈이었다.
아마 제작사는 투자자도 모아 놓은 상황에서 민수가 다른 말을 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장 큰 착각은 민수가 제작사와 대립각을 세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정말 스타가 아닌 한 제작사들과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다들 꺼려하고 투자자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한발 물러서는 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연이던 민수를 은근히 주연으로 올려주고 적당히 달래면 민수도 못 이기는 척 승낙을 할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민수가 왜 조연을 자처했는지 전혀 이해를 못 한 행동이었다.
더불어 자신이 내밀었던 영화와 비슷한 무수한 액션 영화들을 민수가 거절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무지의 소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