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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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오자 드디어 둘은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민수도 솔직히 지금 자신의 배역에 대해 확신이 안 섰기 때문에 태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윤 배우. 지금 죽어 나가고 있겠네?”
민수의 장난스러운 말에 태준은 세상을 잃은 표정으로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래 봤자 하얀 천장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정말 하늘을 보며 한탄하는 거처럼 보였다.
참 쓸데없는 연기력 낭비였다.
“벌써 후회가 돼서 미치겠다.
혈소판감소증(thrombocythemia)이니 담석증(cholelithiasis) 관상동맥우회술(CABG-Coronary Artery Bypass Graft)이니 막 이런 게 나오기 시작하니 답이 없어.
저번에 “일리걸” 때도 법률용어 때문에 조금 성가시긴 했는데 그때 그건 그냥 장난이더라고.
이거 무르진 못하겠지?”
“아마? 윤 배우가 떡하니 가서 사인을 샤샤삭 하셨으니 그 책임은 윤 배우가 지셔야지.
그래도 배역도 괜찮고 내용도 마음에 들어서 들어간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
원래는 조금 순둥순둥한 모습인데 수술만 시작하면 딱 냉혹한 외과의에 영혼이 들어와서 환상적인 수술 실력을 뽐낸다는 캐릭터가 딱 마음에 들긴 해.”
“아 그러고 보니 수술 장면도 있군.
그건 어쩔 건데? 대역 쓰기로 한 건가?”
“수술 씬이 한두 개도 아닌데 대역을 쓸 수야 있나. 몹시 어려운 거면 몰라도…..
아직 시간 충분해.
진짜 수술하는 것도 아니고 겉으로 볼 때 멋있게 꾸미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불가능하진 않을 거야.
그나저나 정 배우 이번에 들어가는 영화에서 윤숙 선생님이랑 같이 한다며?
그건 좀 부럽네.
저번에는 윤숙 선생님이 나오는 장면이 그렇게 많지 않았었잖아?”
“아. 그랬지. 그래서 나도 지금 기대하는 중이야.
저번에 윤 배우가 진성 선생님이나 대표님한테 배운 것처럼 이번에는 나도 많이 배울 수 있지 않겠어?”
태준은 밝은 표정으로 기대하는 민수의 모습을 보며 작게 입맛을 다셨다.
원로 배우의 연기를 살펴보는 것이랑 정면으로 직접 부닥쳐서 연기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고 자신이 진성이나 강철에게 배운 것이 적지 않은 만큼 민수가 이번에 얻을 것들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그건 아깝네.
내가 진작 알았으면 드라마에 들어가지 않았을 텐데……”
“이봐요. 윤 배우.
만약 그랬어도 이번 영화는 내가 들어갔을 거예요.
이 사람이 참 욕심이 많단 말이야.”
민수는 태준에게 이번에 자신이 연기할 배역에 대하여 설명을 늘어놓으면 자신이 태준보다 더 적합하고 저번에 태준이 강철과 연기했으니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고 이야기했다.
“하긴 그런 배역이면 나보다는 정 배우가 더 적합하긴 하겠네.”
“그래서 말인데. 내가 혼자서 이 배역에 대하여 생각을 좀 해봤거든.
그런데 좀 어려운 거 같아.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결국 어머니를 밀어낸단 말이야.
난 이걸 자신 때문에 인성을 허무하게 보내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실제로 친자라도 미안할 일인데 친자가 아니니 더 죄송스러웠겠지.
그리고 앞으로라도 그러지 않기를 바랐을 테고.
그리고 만약 나라면 이 상황에서 나 자신에 대한 미움이 점점 커질 거 같아.
그 미움이 점점 자신을 갉아 먹고 종래에는 뭐가 중요한지 잊게 되는 거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자신이 어머니를 위해서 떠난 건지 아니면 어머니가 미워서 떠난 건지조차 잊어버리는 거야.
어쩌면 그때부터는 원망의 대상을 찾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넌 어떻게 생각해?
내 해석이 괜찮을까?”
태준은 민수가 말하는 내내 민수의 말을 곱씹으면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조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여는데 진지한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엉뚱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흠…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하지만 내가 공짜로 가르쳐 줄 수야 없지.
어때 정 배우, 나랑 거래를 해보는 게.”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거래를 제안하는 태준.
민수는 왠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 익숙한 장면에 어이가 없어졌다.
이거 설마 또 당하는 건가?
이번에도 또 속는다면 이 커플 사기단을 결코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허 참…. 이거야 원……”
태준은 민수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민수에게 물어보았다.
민수가 자세히 살펴봤지만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짓는 태준의 속마음을 짐작하기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니. 왠지 상황이 익숙해서 말이야.
그래. 내가 뭘 해주면 되는데?”
“뭐 별거 있나.
자네가 3월에 중국 일정을 마치면 아마 시간이 좀 있지 않겠어?
대충 말을 들어보니 이번에 들어가는 영화에서 정 배우 촬영분은 한 달 남짓이면 충분히 촬영이 끝날 거 같은데.
그 뒤에는 선생님이 혼자 하실 테고.”
“그럴 수도 있지. 크게 문제만 없다면야.
그런데 그게 왜?”
“그러니까 우리 드라마가 5월까지 방송을 하니 4월 중에 한번 카메오로 나와 달라는 거지.
어때? 이 정도면 별로 비싼 게 아닌데.”
“카메오? 뭐 좋아. 피디님이 허락하시면 그때 가서 일정 보자고.”
카메오라는 말에 민수도 그냥 쉽게 허락했다.
아무리 의학 드라마라도 어차피 그냥 환자나 가벼운 역을 맡으면 다른 드라마랑 다를 바가 없었으니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다.
피디가 제정신이라면 당연히 카메오 배우에게 어려운 배역을 맡길 리가 없었다.
물론 태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지 못한 민수의 패착이었다.
그렇게 민수와의 거래가 성사되자 태준은 흠흠 거리며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민수에게 이야기했다.
무슨 위험한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말이야.
내 생각에는 정 배우의 말이 맞는 거 같아.”
“뭐?”
민수는 할 말을 잃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태준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이건 수연보다 한술 더 뜨지 않는가.
그래도 수연은 뭐라고 설명이라도 했지만 태준은 진짜 거저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순간 멍하니 있던 민수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자 태준은 급하게 민수를 진정시키며 설명을 이었다.
이대로 그냥 있다가는 정말 저 흉악한 친구에게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워워. 진정해.
어차피 정 배우도 그냥 확신이 필요한 거였잖아.
정 배우의 해석이 나쁘지 않아 보였을 뿐이야.
물론 선생님이랑 연기하다 보면 조금 다른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거야.
정 배우가 생각한 설정 하고 선생님이 표현하는 어머니가 다를 수도 있으니까.
그럴 때는 선생님이 주는 그 느낌 그대로 가면 돼.”
“음….”
화를 내려고 했던 민수도 뒤이은 태준의 설명에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속은 건 속은 거였으니 나중에 반드시 복수하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자신만으로는 모자랄 거 같으니 이번에는 설아를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태준과 수연 모두 설아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였으니 무슨 수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카메오 나오는 거다?
오오. 기대되는 군.”
“하….. 좋아 약속은 약속이지. 나중에 말해.”
민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상을 향한 태준의 미망을 벗겨 주었는데 카메오로 보답하다니 참 바람직한(?)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다음날 민수는 윤숙과 함께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김태원을 만나러 갔다.
감독인 김태원은 지금까지 독립영화만 찍어왔던 감독인데 상업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늘 미팅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미팅으로 민수와 윤숙 그리고 태원 셋만 참여했다.
이후 영화 제작에 대한 직접적인 미팅은 투자자가 확정된 후 제작사와 같이 자리를 하게 될 것이다.
수더분하지만 묘하게 지적으로 보이는 김태원 감독은 30대 후반의 젊은 남자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민수는 이 남자가 이 영화에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설명이 계속될 수록 태원이 가지는 애착이 너무나도 가슴에 와닿았다.
이 영화는 태원이 자신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작성한 시나리오였다.
버려진 아이로 한 여성에게 거두어져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자신의 뿌리를 찾아 헤매기만 했던 어리석은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그 남자에게 항상 변함없이 사랑을 주었던 어머니.
언제나 곁에 있을 거 같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서야 정말 소중하게 뭔지 깨달았다는 태원의 말은 민수의 가슴 한구석에도 묵직한 울림으로 남았다.
물론 극적 재미를 위하여 참가한 부분도 많았지만, 기본적인 베이스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요.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를 그리며 사죄하면서 만드는 영화였으니 그 애착이 남다를 수밖에.
그리고 심지어 상업영화를 전혀 만들 생각이 없었던 태원이 만들 마지막 상업영화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원래 그냥 독립영화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아무래도 독립영화보다는 상업영화로 만들어야 한 명이라도 더 영화를 봐줄 거 같더군요.
그런데 이런 배우님들이 제 영화에 나와 주신다니…..”
태원은 민수와 윤숙이 자신의 영화에 나온다는 사실부터 감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의 배경에 대하여 이야기를 마친 태원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나리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원은 작가와 감독의 입장에서 또 이 이야기의 직접적인 당사자로서 각 장면 장면에 대한 솔직한 느낌과 자기 생각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민수와 윤숙도 감독의 설명에 자기 생각을 덧붙이면서 어떻게 장면을 꾸며갈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민수와 윤숙이 함께 촬영하는 장면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태원은 민수에게 작별을 고했다.
“민수 씨의 연기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윤숙 선생님의 단독 장면은 민수 씨가 모르는 게 연기하기 더 편할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 대본을 드리지 않았어요.
전 민수 씨가 촬영 중에 느끼시는 의구심과 고민까지 다 화면에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어쩐지 대본이 좀 짧다 했더니 대본 일부를 일부러 공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태원은 민수가 결말을 알고 나면 연기 도중에 예상치 못한 다른 감정이 씬을 침범할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민수 입장에서는 왠지 자신을 조금 무시하는 거 같기도 했고 괜한 걱정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아직 민수가 젊은 데다가 영화 자체가 감정 연기 빼고는 아무것도 볼 게 없는 영화이다 보니 감독의 걱정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를 대하는 감독의 태도가 너무 경건해서 그런 사소한 불만을 내뱉기에는 얼굴이 조금 화끈거리기도 했다.
아마 자신이 정말 만족할 만한 연기를 보이고 자신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된다면 그때는 시나리오의 마지막 부분을 보여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리라.
집으로 돌아온 민수는 다시 오늘 들었던 모든 이야기를 종합해서 자신만의 캐릭터로 만들어 갔다.
그리고 그렇게 캐릭터에 집중하다 보니 점점 더 “정수”의 마음과 생각이 이해되었다.
연기 연습을 마치고 혼자 쉬면서 오늘 만났던 태원과 윤숙을 생각하니 이번 영화가 정말 잘 될 거 같았다.
감독과 주연 배우 둘이 한마음으로 집중하는 데 실패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영화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둘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영화를 성공시키고 말리라.
하지만 그런 민수의 각오는 며칠이 지나기 전에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처음과는 너무나도 다른 수정된 시나리오가 민수의 손에 쥐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