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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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대표님?
저를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그냥 문득 어떻게 지내고 있나 궁금해서 한번 찾아와 봤다.”
윤 대표는 민수의 방을 한번 쓱 하고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민수를 바라보았다.
민수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언제나처럼 점잖고 차분했으며 실망한 기색조차 없었다.
영화 캐스팅 건으로 마음이 많이 상했을 텐데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모습에 윤 대표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녀석, 남자 혼자 사는 방인데도 잘 정리해 놓고 사는구나.”
“아… 하하. 이게 제가 혼자 사는 방인데 제 방이 아니에요.”
“그건 무슨 엉뚱한 소리냐?”
“다른 배우들이 수시로 찾아오는데 어떻게 이게 제 방이겠어요?
배우들 쉼터지요.
그러니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고 할까요?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청결을 강요당하고 있다고요.”
윤 대표는 민수가 웃으면서 억울하다는 듯이 강요당하고 있다고 말하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재미있게 사는구나.
“쓰나미”는 진룡이 투자자로 들어갔더구나.
그래서 그쪽에서 장진영을 쓴 거니까. 기분 나빠하지 말아라.”
평소였으면 자신을 불렀을 윤 대표가 자신의 방에 찾아오자 민수는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뒤이어 “쓰나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윤 대표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에이~ 사람 일이란 게 원래 그렇게 원하는 데로는 안 되잖아요.
그리고 3월 스케줄 때문에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차라리 4월 이후에 들어가는 작품부터 알아봐야겠어요.”
민수의 말에 윤 대표는 웃으면서 시나리오를 하나 내밀었다.
“이건 다음 달에 크랭크인 계획 중인 영화인데.
윤숙 누님 단독 주연 영화야.
배역은 거의 주연에 가까운 조연이고, 어때? 한번 해보겠니?”
민수는 윤 대표가 건네주는 대본을 낚아채듯이 받아 들고 빠르게 내용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제가 3월에 자리를 비우는데 괜찮다고 하세요?
이거 정윤숙 선생님이 가져오셨을 거 아니에요?”
“감독님하고 말해 보겠다고 하는데 아마 괜찮을 거야.
누님이 3월에 자신의 개인 장면들을 다 몰아서 찍으신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다른 조건은 생각하지 말고 네 생각부터 말해보렴.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 말이야.
그래서 넌 어떠니?”
“저야 좋죠.
정윤숙 선생님인데요.
“용의 울음”에서는 선생님 장면이 별로 많지 않아서 아쉬웠었거든요.”
자신의 예상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대답을 하는 민수를 보며 윤 대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물론 개런티, 제작비 투자자 같은 외부적인 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바로 OK를 하는 모습은 조금 미련해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예전과 다름없는 민수의 모습이어서 차라리 더 보기가 좋았다.
“좋아. 그럼 그렇게 알고 있어라.
촬영 일정이 확정적으로 나오면 바로 알려주마.
아마 금방 촬영이 시작될 거다.”
“네,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윤 대표는 자신은 배웅하는 민수의 말을 듣고 실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녀석아. 한 층만 내려가면 되는데 뭘 또 조심히 가라는 게냐?”
“하하하. 그렇네요. 그냥 습관적으로…..”
윤 대표는 멋쩍어하며 웃는 민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는 자신의 사무실인 대표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민수는 그런 윤 대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민수는 다시 대본을 살펴보았다.
버려진 아이를 주워 자기 아들로 키운 어머니와 그 아이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사고를 당한 아들이 재활 치료를 받는 내용과 그 아들을 극진히 보살피는 어머니의 모습이 극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모정이라….. 그나저나 선생님이 드디어 자신의 단독 주연 영화를 만나셨네.
한창 작품 활동을 하실 때도 그런 작품을 못 만나셨는데…. 하긴 시기가 시기였으니….”
예전 윤 대표나 진성, 윤숙이 한창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할 때는 여주를 내세운 영화를 만들 환경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영화의 주제가 다양해지고 여주의 티켓파워가 인정되었지만, 예전에는 전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의 권익과 사회적 위치가 점점 상승하면서 이제는 그런 변화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자 드라마와 영화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모습 또한 더욱더 다채롭고 입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었으니 시기는 참 적당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거 왠지 이 시나리오는 조금 짧은 느낌인데.
따로 시나리오가 더 있는 건가? 흠....”
민수는 대본을 살펴보며 자신이 연기할 “정수”라는 인물을 상상해 보았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랑받고 커 가다가 우연히 자신이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어머니의 존재를 피하게 되었다.
자신에게 정성을 다하고 자신을 위해 희생하던 어머니가 친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의 기분은 어땠을까?
혼란, 허무함?
친자도 아닌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를 냉정하게 대하는 아들의 마음.
아마 그가 어머니에게 품고 있는 마음은 단순히 미움이나 고마움 같은 단순한 감정은 아닐 것이다.
고맙기도 했지만, 자신의 인생을 돌보지 않은 것이 안타깝기도 했겠지.
어쩌면 자신의 존재를 잊고 어머니가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쉽지 않네 이거.
아마 촬영이 끝날 때까지 계속 감정 노동이겠군.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영화이긴 하지만…..”
민수는 이 배역의 연습부터 쉽지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연습실에서 연기연습을 마치고 휴게실로 들어온 민수는 멍한 표정의 태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태준도 다음에 들어갈 드라마에 대한 분석으로 한창인지 엄청 피곤해 보였다.
원래 윤 대표도 태준이 영화를 마치고 잠시 쉬길 바랐는데 대상 수상 실패 이후에 묘하게 힘이 들어간 태준이 말을 듣지 않고 바로 스케줄을 잡아 버린 것이니 그건 자업자득이었다.
“윤 배우. 표정이 왜 그래?”
민수가 옆에서 말을 걸자 그때야 태준은 민수의 등장을 눈치챘다.
평소에 저 멀리에서부터 민수에게 인사를 건네던 태준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아. 정 배우네.
이번에 영화 들어간다며. 축하해.”
태준은 이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축하해 주는 건 고마운데 왜 그렇게 다운됐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이번에 들어가는 드라마가 좀 피곤하네.
게다가 이걸 드라마로 찍을 생각 하니 갑자기 머리가 멍해서 그래.”
“아…… 하긴……”
이번에 태준이 들어가는 드라마는 2월 중순부터 방영하는 “귀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메디컬 드라마였다.
그리고 메디컬 드라마는 항상 배우들에게 지옥을 선사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대사의 양과 의학 용어였다.
아무리 대사 습득이 빠른 태준이라도 생소한 의학용어를 빠르게 습득할 수는 없을 것이고 만약 저 드라마에 쪽 대본이 난무하게 된다면 정말 말 그대로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태준이 맡은 배역은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귀신 들린 의사였으니 평소에 보여주는 연기와 귀신이 들렸을 때의 연기가 완전 달라야 하니 그 고난 역시 두 배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게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드라마를 찍겠다는 거야?
원래 한동안은 영화만 취급하겠다고 했었잖아?”
“아~ 그거.
솔직히 인기를 더 올려야 할 거 같아서 말이야.
영화도 좋지만, 장시간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드라마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게 인기를 끌어올리는 지름길이지.
최소한 내 이름값만으로 천만은 끌어모을 수 있는 배우가 될 거야.
“맙소사. 너 설마…..”
예전에 시상식에서 수연과 민수가 웃어넘겼던 대상과 관객 동원능력 간의 상관관계를 태준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굳이 드라마 출연을 결정한 것이고.
사실 영화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은 배우가 드라마로 돌아오기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그건 그만큼 영화가 주는 매력이 강렬하기 때문이었는데 태준이 굳이 드라마에 들어온 것을 보니 생각보다 대상에 대한 열망이 커 보였다.
하지만 요즘 부쩍 정말 부질없는 것이 대상이라는 생각이 드는 민수는 태준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 태준도 서른이 넘어 첫 대상을 받을 때까지 모든 작품 활동의 방향을 대상을 받는 것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한곳을 향해 달리던 태준이 대상을 받은 후에는 큰 후유증에 시달렸는데 나중에 진지한 예능에 나와 이십 대 후반부터 대상을 받을 때까지 몇 년의 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윤 배우 너 은근히 대상에 집착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내 생각이 틀린 건가?”
“글쎄…. 집착이라……”
“수연 선배는 뭐래? 그리고 윤 대표님도 뭐라고 했을 거 같은데.”
“수연이는 뭐 요즘 정신없지.
아버지는 그거 진짜 별거 아닌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고.
그런데 처음에는 괜찮은 거 같았는데 왠지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이상하더라고.
내가 알게 모르게 은근히 기대했던 모양이야.”
태준이 씁쓸한 표정을 짓자 민수를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수연에게 그런 케어를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
그나마 윤 대표가 자신의 경험을 빗대어 그렇게 이야기한 모양인데 왠지 태준을 보니 별로 효과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민수는 왠지 태준에게 와닿는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거 같았다.
“윤 배우.
이건 그냥 내 짐작이라 틀릴 수도 있는데.
그냥 우스갯소리로 생각하고 한번 들어봐.”
“응?”
“지금까지 대상을 받은 배우 중에 가장 어린 배우가 누군지 알아?”
“….. 글쎄…… 누구더라?”
“김주민 선배. 올해 32이지 아마?”
“어? 그랬어? 그러고 보니……”
“나도 위원회에서 대상을 주는 기준은 전혀 모르겠어.
아마 아무도 모를 거야.
공식적인 코맨트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대상을 주는 기준에 경력이 분명히 들어간다는 거야.”
“경력이라…..”
“지금까지 대상을 받은 배우들을 떠올려봐.
한해 진짜 대박을 터트려서 반짝한 스타는 아무도 대상을 받지 못했어.
최소한 몇 년 이상 꾸준히 활동한 배우 중에 그 해 큰 활약을 한 배우가 있으면 대상을 줬지.
그놈들이 조금 엉뚱하다 싶은 배우에게 대상을 줬는데도 사람들이 왜 별다른 불만이 없는지 생각해봐.
그건 대상 수상자가 꾸준히 준수한 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그래도 이 사람 정도면? 이런 생각을 사람들이 하고 있기 때문이잖아.
김주민 선배도 그렇잖아.”
“음……”
“윤 배우가 찍은 영화에 더 많은 관객이 오길 바라는 건 좋은데 그게 대상 때문은 아니었으면 좋겠어.
나도 솔직히 이번에는 윤 배우가 대상 받을 줄 알았어.
한국 최대 관객을 기록한 것만 해도 이미 대상을 받을 업적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아니었잖아.
솔직히 이 이상 무슨 업적을 세워?
이번에 못 받은 것만 봐도 대상은 그해 무슨 활동을 잘해서 받을 수 있는 상은 아니란 거야.
아. 그래.
차라리 대상을 공로상처럼 생각하자고.
공로상이 한 해 잘한다고 받는 상이 아니잖아.
지금처럼 찍고 싶은 영화 찍으면서 살다가 주면 좋고 안주면 말고.
어때? 괜찮지 않아?”
대상은 공로상과 같다는 민수의 말에 태준도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왠지 대상이 그해 활동만 보고 주는 상이 아니라는 민수의 설명에 솔깃한 기분이었다.
솔직히 민수의 말이 틀리다면 거의 2천만을 찍고도 자신이나 민수가 대상을 받지 못한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관객 수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2천만을 찍어 버렸는데 그게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한다면 정말 어이가 없어서 돌아버릴 거 같았다.
차라리 민수의 말대로 자신이 세운 2천만의 업적이 자신의 커리어에 합산돼서 다음 경쟁에서 유리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으리라.
“야. 정 배우. 넌 억울하지도 않아?
난 남우 주연상이라도 받았지만 넌 그냥 신인상 받고 끝이었잖아.
네가 연기한 걸 생각하면 나보다는 네가 더 억울할 거 같은데.”
“억울? 뭐가 억울해?
신인이 신인상 받았는데.
잘 봐.
내가 신인상 받고 네가 주연상 받은 것만 봐도 딱 내 말이 맞지 않냐?”
“결국 경력이 어느 정도 좌우를 한다는 말이렷다?”
“그래. 그러니까 적당히 하자고.
어차피 계속 연기 활동하다 보면 언젠간 받을 테니까.
뭐 당장 2천만을 넘을 수는 없겠지만 천만이야 여러 번 넘을 거 아니야?
김주민 선배도 천만 찍고 받았으니 너도 나중에 적당히 천만 찍으면 받겠지.”
“쿨하네 쿨해. 쿨네가 풀풀 풍겨.”
태준은 민수가 대상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모습이 조금 멋있게 느껴졌다.
윤 대표가 말하는 것과 민수가 말하는 것, 둘 다 결론은 같았지만 느낌이 좀 달랐다.
어쩐지 민수의 말을 들으니 왠지 좀 더 납득이 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전생에서 태준이 방송에서 했던 말을 민수가 많이 인용했다는 것은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