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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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배우의 자존심에 둔감한 민수에게는 그냥 기분 나쁘다는 정도로 넘어간 일이었지만 윤 대표는 정확한 상황 파악을 위해 당장 드림 픽쳐스에 전화를 걸었다.
만약 단순히 저울질하려고 두 배우에게 제안을 넣은 것이라면 윤 대표도 참을 생각이 없었다.
[아이고 윤 대표님 하하.
죄송합니다. 일이 갑자기 그렇게 되어서요.]
윤 대표가 전화를 걸자 드림 픽쳐스 쪽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민수의 예상대로 처음에 주연으로 노리던 인물이 정진영이었는데 아직 투자자가 확실하지 않았던 탓에 정진영이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고 한다.
투자자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영화를 계약했다가 괜히 일만 질질 끌릴까 싶어 상황을 지켜본 것이었는데 정진영 이름값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아마 정진영 측도 두 개나 세 개의 작품 사이에서 고민 중이었을 것이다.
반면 제작사 입장에서는 주연이 결정되어야 투자자를 모으기가 더 쉬웠기 때문에 차라리 정진영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민수와 접촉을 시도했다는 것인데 하필 그날 투자자가 확정되면서 정진영 측에서 OK 사인이 나와버린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흐름이었지만 그 투자자가 이상한 요구를 하면서 드림 픽쳐스를 곤란하게 하고 있었다.
[상황을 못 알려 드린 건 정말 죄송합니다.
원래 당연히 먼저 알려 드리고 사과를 드리는 게 맞았죠.
하지만 투자자 쪽에서는 마케팅에 이용하려고 했는지 확정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하니 일이 더 이상하게 꼬일 거 같아서 몰래 기자들에게 캐스팅 소식을 뿌리게 된 겁니다.]
“….. 알리지 말라고 했다고요?
지금 그 영화 투자자가 어디죠?”
[진룡 미디업니다. 액수는 밝힐 수 없지만, 전체 투자금의 50%를 정도를 투자했고요.
그러니 제가 말을 안 들을 수가 있나요.]
“하….. 투자자가 진룡인데 민수한테 캐스팅 제안을 했다고요?”
[하하. 그때는 당연히 투자자가 결정되기 전이었죠.
어디 우리가 투자자를 가릴 수 있답니까?]
“…….”
[그리고 이건 사족이지만 사실 전 정진영 씨보다 정민수 씨를 더 원했습니다.
투자자가 정진영 씨로 아예 못 박지 않았으면 아마 정진영 측에 거절 메시지가 갔을 수도 있고요.
어쨌든 이번 일은 저희 쪽이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사과를 받고 전화를 끊은 윤 대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룡이 메인 투자자로 결정되었으면 어차피 민수가 합류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보면 차라리 드림 픽쳐스가 진룡의 말을 슬쩍 어겨 준 것에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었다.
최악의 경우 민수가 아주 불쾌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 대체 왜 여기저기서 시비야?
가뜩이나 요즘 짜증 나 죽겠는데.
진룡이 투자자로 들어가면서 장진영으로 결정했다는 구만.
그래서 장진영이가 미적거리다가 OK 한 거고.
원래 장진영이는 투자자가 확정된 작품 아니면 안 들어가니까.
일이 참 더럽게 됐군.
진룡은 지금 완전히 우리한테 이를 갈고 있으니까 말이야.”
“확실히 진룡이라면 그럴 만하죠.
올해 드라마 농사가 완전히 망했잖아요.
솔직히 그게 우리 잘못은 아니지만……”
민 여사의 말대로 올해 진룡이 투자한 드라마의 성적은 형편없었다.
가장 많은 투자를 퍼부었던 “현대 달기전”은 생각도 못 한 미국 드라마에 완전 덜미를 잡히더니 그 뒤에 투자한 드라마들도 “미스 신데렐라” 에 밟히고 “로열”에 맥을 못 추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드라마마다 가장 돋보였던 게 윤 엔터의 설아와 수연이었으니 진룡에서 윤 엔터에 더 이를 갈고 있는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되라고 하는 건지 참 악연은 악연이었다.
“솔직히 그놈들은 말이 너무 많아.
드라마 망한 것도 다 자업자득이지.
투자만 했다 하면 이상한 요구 조건이 많아서 드라마든 영화든 산으로 간다는데 잘 될 리가 있나.
그쪽도 전문가가 있을 텐데 대체 왜 그 모양인지….”
“글쎄요.
내부적인 문제라 뭐라고 말할 순 없지만, 기본적으로 예리한 인물들은 저번에 진시첸이 떠날 때 대부분 자리를 비웠다는 말도 있어요.
남은 사람 중에서도 괜찮은 인물은 있다는 거 같은데 사내 정치에 밀리는 느낌이고요.
그리고 아무리 바른말을 해줘도 위에서 안 들으면 말짱 꽝이잖아요.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건 투자 규모와 비교하면 진룡의 지배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거예요.
원래 같으면 우리 쪽에 저런 사실을 말해주지도 않을 거잖아요?
진룡의 눈치가 보였을 테니까요.”
“하긴 그건 그렇지.
하지만 진룡보다 더 짜증 나는 건 드림 픽쳐스 김 사장이야.
어차피 생각도 안 했으면서 립 서비스는….. 솔직히 자기도 정진영이 쓰려고 민수를 이용한 주제에 참 뻔뻔하기도 하지.”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김 사장이 민수를 이용한 거야.
만약 민수를 진짜 원했으면 애당초 정진영이 말고 민수에게 먼저 연락을 했겠지.
아마 정진영이 자꾸 미적대니깐 끌어당기려고 민수랑 접촉하고 은근히 흘렸을 거야.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민수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니 정진영이도 움찔했을 거고.
그리고 진룡하고 우리 사이를 적당히 이용했겠지.
투자 쪽은 진룡하고 미리 이야기되고 있었나 본데 분명 진룡도 이 영화가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을 거야.
다만 투자에 시간을 끈 건 아마 조건 때문이었겠지?
그리고 진룡이 투자에 시간을 끄니 김 사장이 머리를 써서 민수가 영화에 들어올 수도 있다고 액션을 취한 거고.
확실히 진룡 입장에서는 될 영화에 민수가 들어가는 게 못마땅할 테니 어차피 할 투자를 더는 미루지 못했겠지.
아무리 투자자라도 계약까지 끝난 주연을 바꾸는 것은 어려우니까 말이야.
게다가 정진영의 자존심 문제도 있고.”
결국 진룡하고 윤 엔터의 관계를 알고 투자를 좋은 조건에 빠르게 받기 위해 생각도 없었으면서 민수에게 제안한 것이니 민수를 이용했다는 윤 대표의 표현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
“정말 그랬으면 김 사장도 대단하네요.
짜증 나긴 하지만 확실히 능력은 인정할 만해요.”
“잔뼈가 굵은 인물이야.
우리랑 진룡이 어떤 사이인지 모를 리가 없지.
어쩌면 우리보다는 진룡의 사정에 빠삭할 가능성도 크고.
그냥 적당히 이용하려고 했는데 진룡이 완전히 죽자고 달려드니 우리랑 완전히 척을 질까 봐 급하게 기사 뿌린 걸 거야.
거기다 진룡을 핑계로 슬며시 원망도 피하고 말이야.”
김 사장의 능청스러운 수작에 혀를 차던 윤 대표도 아까 민 여사가 지적하듯이 요즘 진룡의 장악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드라마 시장에서 제작 과정에 개입해 제작사에 손해를 입히면서 제작사들의 눈총을 사고 있는 진룡은 영화 쪽에서는 MJ에 압박을 넣으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요구가 자꾸 이어지자 결국 MJ도 한국지부를 포기하고 중국 본사 쪽에 선을 댄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요즘 진룡이랑 MJ 쪽도 묘하게 삐걱대는 모습이긴 하지.
정확히는 한국지부와 MJ 사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이야.
저번에 태준이 작품에 MJ가 스크린 몇 개 열었었지?”
“1200개 중에서 400개가 MJ 것이었죠.
MJ도 요즘에는 아예 한국지부 보다 진룡 본사 쪽과 직접 대화하는 모양이에요.
중국 내 스크린 사업을 아예 본사가 책임지고 있으니까요.”
“한국지부가 MJ를 압박할 수단이 하나 사라졌군.
아마 본사에서 그 일을 맡고 있는 게 분명 진시첸 일 거야.
원래 MJ랑 진시첸은 관계가 괜찮았거든.
그래도 이번 영화는 그럭저럭 잘 될 테니 진룡 쪽도 한숨 놓긴 하겠군.
이기민 감독에 정진영이라.
중국에서도 어느 정도 먹히겠어.
정진영이 괜히 한류스타가 아니지.”
투자자와 배우를 모두 잡기 위해 민수의 이용한 김 사장이 괘씸했지만, 투자자로 진룡이 끼어든 이상 마땅한 대안은 없었다.
다만 가슴 속에 묻어 두기로 했다.
몇 달 동안 기다렸다가 MBS 예능국에 복수한 태준의 성향이 그냥 저절로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민수의 스케줄이 점점 애매해지는 시기에 윤 대표는 자신을 찾아온 정윤숙을 만나게 되었다.
굳은 얼굴로 찾아온 윤숙은 대뜸 윤 대표에게 배우 한 명을 요구했다.
“윤 대표. 긴말하지 않을게.
예전에 “용의 울음”에 들어갈 때 나랑 약속한 게 있을 거야.
기억나지? 이번에 내가 들어가는 영화에 남자배우 한 명을 보내줘야겠어.”
“음….”
윤 대표는 윤숙이 내민 시나리오를 살펴본 후 고개를 끄덕이면서 윤숙을 바라보았다.
굳은 얼굴의 윤숙은 정말 사생결단을 낼 기세였는데 그 단호한 표정 뒤에 느껴지는 열정과 열망이 너무나 뜨거워 정말 마음을 제대로 먹고 온 사람 같았다.
그리고 윤 대표는 지금까지 윤숙을 오래 봐왔지만 저렇게 열망에 불타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대본을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지금까지 윤숙이 꿈꿔왔던 자신의 원탑 주연영화였기 때문이다.
윤 대표도 윤숙이 지금까지 자신의 단독 주연영화를 얼마나 꿈꿔왔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 약속이 없더라도 가능하면 최대한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녹록하지가 않았다.
“주조연 급 남자 배우가 필요한 거네요.
결국 민수나 태준이 둘 중 하나인데.
혹시 따로 원하는 배우가 있나요?”
“내가 지금 누구라도 가릴 때니?
아무나 좋으니 내주기만 하렴.”
“에이. 누님이랑 찍는 영화인데요.
우리 회사가 아니라도 배우들이 줄을 설 텐데요. 뭘.”
윤 대표의 말에 윤숙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이 영화가 주연급 배우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영화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립 서비스는 됐어.
떠보는 것도 사양이야.
요즘에는 30억 들어가는 영화도 저 예산이라고 꺼린다지?
여주 원탑에 신파극 인 데다가 제작비 때문에 제값도 주기 힘들어.
그러니 연기력에 인지도까지 있는 애는 엄두도 못 내고.
상황 안 좋은 건 내가 더 잘 알아.
사실 여기 온 것도 태준이나 민수 둘 중에 하나 잡으면 어쨌든 투자자는 나올 거니까 그런 거야.
그러니 쓸데없이 재지 말고 누가 되는지만 말해 봐.”
윤숙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윤 대표도 더는 말을 늘이지 않았다.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태준이는 좀 힘들어요.
조금만 빨리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이 녀석이 지금 드라마를 계약했거든요.
그것도 2월에 방송되는 거로요.”
“그래? 그럼 민수는?”
“민수는….음….. 우선 스케줄이 없긴 해요.”
“그럼 그 녀석으로 해줘.”
“그런데 이 녀석이 3월에 중국에 가야 해요.
아마 한두 주는 있어야 할 거예요.
예산도 그렇고 내용을 봐도 이 영화는 5월 8일에 개봉하는 것이 베스트일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음…..”
3월중에 스케줄이 두 주나 있다면 그야말로 촬영 도중에 자리를 비운다는 것인데 윤 대표의 말을 들어보니 왜 뜸을 들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윤숙은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OK 이해했어.
그럼 민수한테 잘 말해줘.
난 감독부터 다시 만나볼게.
아마 괜찮을 거야.
내 개인 촬영분이 많으니까 내 것을 3월에 다 찍으면 돼.
초반에 민수랑 같이 찍는 걸 다 촬영하면 3월에는 홀가분하게 중국으로 갈 수 있을 거야.”
“민수에게 말해 놓겠습니다.
아마 녀석도 반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누님이랑 찍는 거니까요.
물론 저도 찬성이고요.”
윤 대표의 말에 굳었던 윤숙의 표정도 조금 부드러워졌다.
아무래도 남자 배우를 확보했다는 안도감이 그녀의 마음을 조금 풀어준 듯 보였다.
아무리 예전에 약속했다고 하더라도 윤 대표가 흔쾌히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주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차라리 갑작스러운 기회 때문에 말도 없이 찾아와 배우를 내놓으라는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 셈이었다.
“원 녀석. 끝까지 아부는….”
그렇게 잠시 대화를 나누었지만 윤숙이 감독을 찾아가 봐야 했기 때문에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였다.
윤숙이 떠나가자 윤 대표는 바로 대본을 챙겨 민수가 머무는 방으로 이동했다.
민수에게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대표는 민수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윤숙과의 연기를 민수가 거절한다는 건 정말 상상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