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06화 (206/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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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아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확실히 자신에게 갑작스러운 영화 제의가 오는 바람에 잠시 혹하긴 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드라마와 영화 중에 사람들은 영화를 더 쳐주기 때문이었다.

    가혹한 촬영 환경과 급하게 나오는 쪽 대본 때문에 드라마의 경우 배우의 연기를 조금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말은 일정이 촉박하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기만 하면 피디도 바로 OK 사인을 내린다는 뜻이었다.

    반면 영화의 경우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십 번이라도 NG를 때리는 감독이 세고 셌다.

    그런 환경의 차이 때문에 영화감독들 중에는 드라마에서만 연기해 왔던 배우를 제대로 된 배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완고한 부류도 있었다.

    제대로 된 연기를 해보지 못한 배우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런 분위기이다 보니 설아도 은연중에 이왕이면 영화에서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흔들렸던 것인데 민수의 말대로 아직 자신은 어리고 여러 가지 연기를 경험할 필요성이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들려준 민수의 볼멘소리도 조금 마음에 쓰였다.

    민수의 말대로 자신의 외모를 생각해 보면 아마 저런 비슷한 연기를 원하는 감독은 앞으로도 엄청 많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민수도 별로라고 하지 않는가.

    사심이 들어간 평가라도 해도 다른 배역이 들어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민수가 귀엽게 거부하는 배역을 굳이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조금 밍밍한 스토리도 잔잔하게 느껴졌고 조금 찌질하고 안타깝다고 느껴지던 나은이라는 인물도 왠지 친근하고 정이 가는 거 같았다.

    솔직히 지금까지 자신이 연기했던 연화 공주나 제니는 둘 다 너무 멋있는 인물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런 멋있는 배역보다는 저런 조금 부족한 인물을 연기할 때 배우의 연기력이 더욱 빛나는 법이니 저 배역은 민수의 말대로 분명 좋은 경험이 되어 앞으로 자신의 연기 인생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좋아요. 결심했어요. 오빠.

    “햇살이 비추는”으로 할게요.

    오빠의 말대도 앞으로 윤 마담 같은 배역은 흔하게 들어 올 테니 아쉬워할 필요가 없을 거 같아요.

    이제 두 작품밖에 못 한 저에게 주연을 제안했으니 이런 기회를 놓칠 필요는 없겠죠?”

    설아가 드라마로 차기작을 결정하자 민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설아의 결정을 응원해 주었다.

    영화가 조금 인기가 있더라도 그런 배역으로 이미지를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매혹적인 모습은 다음에 주연으로 출연하는 영화에서 보여줘도 충분했다.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드라마가 망하면 주연 배우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지만 그 말도 주연배우로 자리를 잡은 배우들에게나 통용되는 이야기예요.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아직 설아 씨는 그 정도가 아니잖아요.

    우선 주연급으로 올라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죠.

    만약 저 드라마가 잘 안된다고 해도 설아 씨가 준수한 연기력만 보여준다고 하면 그건 설아 씨에게 플러스가 될 거예요.”

    설아도 민수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주연으로 연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저한테 주연을 제안했을까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요?”

    “문제가 있으면 저 대본을 대표님이 받지도 않았겠죠.

    아마 특별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닐 거예요.

    다만 제작사 입장에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민수의 설명에 설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수의 생각은 이랬다.

    저 배역이 특징은 어리고 조금 궁상맞다.

    멋진 연기보다 저런 연기가 더 어려운 법이었으니 적어도 20대의 여배우 중에 연기력이 어느 정도 받쳐주는 배우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는데 확실히 이 배역은 20대의 여배우들에게는 이미지 때문에 조금 꺼릴만한 배역이었다.

    어느 정도 연기력을 인정받고 인지도가 있는 어린 여배우들은 대부분 CF의 꽃이라고 불리는 화장품 CF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화장품 CF를 찍어서 고급스럽고 우아한 이미지를 어느 정도 유지해야 하는 여배우들이 저런 궁상맞은 배역을 선택하기는 힘들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버리는 순간 CF가 떨어지거나 계약 조건에 따라서는 소송에까지 휘말리지 않을까?

    아마 배우 본인이 하고 싶어 해도 회사에서 저런 배역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결국 제작사 입장에서는 연기가 되는 신인 연기자를 써야 한다는 뜻인데 사실 그런 배우가 그리 많지 않았다.

    반면 설아는 지금 한창 떠오르고 있는 스타이긴 했지만, 특유의 마이웨이 때문인지 CF를 거의 찍지 않았다.

    화장품이나 고급 의류의 CF를 찍을 때 상대가 복잡한 요구를 붙이기 때문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유지해야 하는 이미지도 없었고 배역을 꺼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미지를 걱정해서 배역을 제한하는 소속사도 없었으니 제작사 입장에서는 인지도도 상당하고 연기력도 어느 정도 인정받는 설아가 가장 좋은 목표인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제 나이 때는 기본적으로 예쁜 배역에 더 눈이 가는 법이니까요.

    사실 저도 그랬고요.”

    “하지만 진짜 인정받는 연기자가 되려면 이런 배역에서 더 힘을 보여줘야 할 거예요.

    그리고 이 드라마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대본대로 잘 찍히기만 하면 어느 정도 공감을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지금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니까요.

    그러니까 방송국에서도 편성을 허락하지 않았을까요?”

    “음….. 그럴까요?”

    민수가 기억하기로 청년 실업과 고용 안정화,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회적인 문제로 남게 된다.

    지금도 그렇고 갈수록 그런 경향이 심해진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 드라마가 제대로 제작만 된다면 그저 그런 드라마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많은 청춘들이 이 드라마에 공감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공감은 시청률로 우리 눈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예쁜 척과 우아함은 버리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셔야 해요. 설아 씨.

    안 그러면 연기가 엉망이 되어 버릴 테니까요.”

    이번에는 조금 망가지는 배역이다 보니 민수가 노파심으로 사족을 붙였다.

    그녀의 외모 때문에 설아가 궁상맞아 보이려면 아마 다른 배우보다 훨씬 더 많이 망가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수의 설명에 설아도 수긍을 하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조금 뾰로통한 표정이긴 했다.

    “민수 오빠는 절 대체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예쁜 척이 아니라 전 그냥 예쁜 거라고요.

    그리고 저도 아버지에게 연기를 배운 몸이니만큼 망가지는 연기도 자신 있어요.

    항상 예쁜 배역만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제 연기를 보고 평소의 저와 다르다고 실망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 와중에도 자신의 외모에 대하여 자부심을 잃지 않는 모습이 조금 재미있었지만 설아도 확실히 이번 배역을 위해 망가져야 한다는 사실은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거 같아 다행스러웠다.

    “전 설아 씨가 예뻐서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물론 아름다운 외모도 설아 씨의 매력 포인트이긴 하죠.

    하지만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면 설아 씨가 더 좋아지지 않을까요?

    자기 일에 열중하는 여성이 더 매력적인 법이니까요.”

    설아는 민수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환하게 웃었다.

    아마 민수에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 말 잊지 마세요.”

    설아의 배역이 결정되자 그녀는 바로 연기 준비에 들어갔다.

    평소의 자신과 전혀 다른 모습을 연기해야 하는 만큼 그녀에게도 배역에 몰입하기 위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아마도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촬영되기 시작하는 1월 중순까지는 배역에 대한 분석과 여러 가지 자료 준비 때문에 설아를 자주 만나기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촬영이 시작되면 당연히 만나기 힘들 테니 이래저래 못 보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는 사이 “로열”에서는 민수가 등장하는 회차가 방송되었다.

    민수는 등장하자마자 화려한 요리 실력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강탈했고, 넉살 좋게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냉소적이고 차가운 모습으로 씬 스틸러가 되어 시청률 상승을 견인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민수가 나오지 않아 실망하던 사람들도 민수가 등장하는 첫 씬을 보고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연말의 시상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배우들에게 한해 농사를 마무리 짓는 결실의 시기가 다가오는 것인데 윤 엔터 배우들도 이번 시상식에는 조금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용의 울음”이 한국 관객 신기록과 역대 최고 수익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여러 배우가 수상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상식이 다가오는 시점에 소희가 중국 촬영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중국에서 이러저러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돌아온 소희는 완전히 탈진한 모습이었다.

    하긴 벌써 다섯 달이 넘게 중국에서 지내온 소희였으니 확실히 지칠 만했다.

    “와, 소희 언니. 수고했어요. 많이 힘들었죠?”

    설아는 오랜만에 소속사로 돌아온 소희를 품에 꼭 안으며 반겨 주었다.

    소희도 오랜만에 만난 설아가 반가웠는지 같이 마주 안으며 지친 마음을 달랬다.

    “아~ 진짜 힘들더라.

    설아야, 넌 타국에서 사서 고생하지 마. 으흑~”

    중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소희의 얼굴에서 예전과는 달리 조금 자신감이 엿보였다.

    중국 드라마가 성공하면서 얻게 된 성취감이 그녀를 조금 변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타국의 배우들과 신경전을 벌이면서 아마 투쟁심까지 늘어나지 않았을까?

    중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던 소희는 예전에 설아가 마스크 싱어에서 활약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면 아이돌 지망생이었던 소희에게도 마스크 싱어는 조금 신경 쓰이는 프로그램이었을 것이다.

    “마스크 싱어에서 리아를 한 방에 보내버리는걸 봤어.

    정말 속이 시원하더라.”

    소희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1라운드에서 리아가 떨어진 이야기였다.

    그리고 뒤이어 설명하는 소희의 말을 들어보니 리아가 예전에 연습생들에게 별로 좋은 선배가 아니었었나 보다.

    “내가 연습생으로 들어간 시기에 릴리걸스가 막 데뷔를 했었거든.

    그때 데뷔하는 선배들이라고 연습생들이 연습하는 걸 평가해 줬었는데 날 딱 보더니 난 가망 없으니 그냥 포기하라고 하더라고.

    솔직히 리아의 말이 맞긴 했지.

    난 정말 아이돌로는 가능성이 없었고 결국 배우가 되었으니까.

    내가 리아랑 동갑인데 리아는 벌써 데뷔고 난 연습생을 시작했으니 얼마나 가소로워 보였을까?

    하지만 말을 얼마나 예쁘게 하던지, 온정이 다 떨어지더라고.”

    소희가 저렇게 말했지만 소희의 반응을 생각해 봤을 때 아마 단순하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온갖 무시와 멸시로 범벅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리아의 코를 납작하게 해준 설아에 대한 치하가 한창 이어지다가 여배우들의 텃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중국에서 온갖 텃세를 다 받아오며 연기를 했던 소희는 설아에게 한국에서는 별문제 없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면 설아도 신인이었는데 텃세를 받았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예쁜 신인이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경계가 이어진다고 하니 설아도 분명 그랬을 법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수연이 창민의 행패를 숨겼던 것처럼 설아 역시 숨긴 것일 수도 있었지만 설아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건 아닐 가능성이 컸다.

    “음…. 텃세요?

    전 별로 그렇지 않았는데요.”

    설아는 텃세를 별로 느껴보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설아는 별로 텃세라는 것을 느껴보진 못했다.

    다만 자신의 바보 오라버니와 민수에 대한 추파를 끊어 내는 게 조금 힘들었을 뿐이었다.

    "텃세도 부릴 사람한테 부리는 거야.

    설아처럼 뒤에 빽이 있으면 굳이 건드리지 않지.

    나라도 아마 설아는 피했을걸."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수연도 돌아왔다.

    수연은 설아의 의문을 해결해 준 후 바로 오랜만에 만난 소희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 소희 진짜 오랜만이네.

    이젠 다른 데 가지 말고 한국에서 활동하자고.

    얼굴 잊어버리겠어.”

    “네, 언니. 저도 이제 그러려고요.

    솔직히 너무 힘들었거든요.”

    소희와 수연이 인사를 나누는 중에도 설아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마 수연의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민수는 수연의 말을 듣고 상황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아직 여배우의 힘보다 남자 배우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태준의 동생이라고 알려진 설아에게 섣불리 텃세를 부리다가 나중에 태준과 드라마나 영화에서 만나게 되면 조금 곤란할 수도 있었다.

    물론 공과 사는 구별한다지만 사람 감정이란 게 그런 게 아니다 보니 설아가 태준에게 하소연하고 태준이 기억했다가 그 여배우가 상대역으로 물망에 오를 때 그 여배우는 좀 별로던데 이런 식으로 불만을 표하면 여배우도 곤란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런 소리를 안 들으려면 태준보다 티켓파워가 강하면 되겠지만 불행히도 “미스 신데렐라”의 여배우 중에 그런 여배우는 없었다.

    그러니 설아가 텃세 안전지역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번에는 설아 씨가 윤 배우의 덕을 좀 봤네요.”

    “아아….”

    인제야 설아도 수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에, 내가 그 바보 오라버니의 덕을 보고 있었다니……”

    설아는 조금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아직 신인이다 보니 그런 역학관계에 대하여 전혀 짐작하지 못했나 보다.

    민수는 이번에 태준이 설치는 바람에 설아가 앞으로도 그런 텃세로부터는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설아랑 소희도 그런 텃세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대단한 여배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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