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05화 (205/325)

#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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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이 눈에 불을 켜고 수연을 추궁했던 대로 은우는 윤 엔터와 무사히 계약을 마쳤다.

기존 소속사와의 계약이 올해 12월 말을 기점으로 종료되는 상황이라 며칠 빨리 윤 엔터가 인수인계를 받은 셈이었지만 기존 소속사에서도 은우가 계약을 종료할 거라는 통보를 받고 미리 합의를 마친 후였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은우가 있던 빅 엑터스 에서도 은우를 시작으로 몇 명의 배우들을 추가로 받으면서 앞으로 운영에 큰 문제는 없는 상태였고 은우가 처음 왔을 때 소속사 상황이 너무 열악해서 은우가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아름다운 이별을 선택한 것이었다.

물론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도의적인 문제로 걸고넘어지면 조금 피곤할 법도 했는데 상대가 쉽게 물러나 준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확실히 은우를 많이 굴리(?)긴 했지만 그래도 질척하게 물고 늘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렇게 성품이 나쁜 사람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굳이 다른 소속사와 척을 지면서까지 떠나는 사람에게 재를 뿌리는 것이 자신들의 회사에도 별로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은우도 민수처럼 소속사 계약서를 보고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무슨 이런 계약서가 있냐는 듯이 윤 대표를 바라보던 은우는 윤 대표가 설명을 다 마친 후에야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인을 했다고 한다.

이리저리 구르면서 돈은 상당히 벌어 놓은 은우였기에 계약금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오로지 윤 대표의 연기지도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은우에게도 윤 엔터가 딱 마음에 드는 보금자리일 것이다.

은우는 드라마가 종료되는 1월 말쯤에 정식으로 소속사에 들어와 연기를 배우기로 했단다.

기본기가 부족한 은우를 생각하면 민수가 그랬던 것처럼 강환에게 발성과 발음부터 배우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아마 그전까지는 소속사에 거의 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원래 이렇게 소속사에 죽치고 있는 민수와 그 패거리들이 정말 이상한 거지 배우가 소속사에 들리지 않는 건 정상적인 일이었다.

“와, 배우인데 연기만 잘하면 되는 거 아냐? 사람들 참…..”

대본을 살펴보다가 잠시 쉬는 시간 동안 방송에 대한 반응을 찾아보던 민수는 자신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무모한 도전”의 감상평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대본도 마음에 차는 게 없어서 심란한데 사람들이 자신을 예능에 부르지 말라고 하는 글을 보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하긴 내가 언제 사람들 반응 생각했다고…….”

사람들은 민수가 나오는 “무모한 도전”을 많이 기대했던 모양인데 민수가 깽판을 치다시피 해서 노잼이 되어버린 “무모한 도전”을 허망하게 시청했다고 한다.

민수가 방송에 나온 것 자체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고 민수의 근황이 어떤지 알게 되어서 좋긴 했는데 민수의 멸망 급 예능감이 아쉽다는 뜻이었다.

민수에게 너무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민수는 연기보다 예능을 더 배워야 하는 거 아니냐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그나마 설아가 재미있어서 다행이었다는 말도 많았는데 민수도 민수지만 드라마가 끝나고 마스크 싱어를 제외하고는 예능에 전혀 나오지 않았던 설아의 행보에도 관심이 많았었는지 설아가 나와서 반가웠다는 반응도 제법 있었다.

민수는 댓글을 확인하면서 자신 못지않게 설아도 예능에 별로 출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아는 자신과 다르게 예능감도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왜 예능을 피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번에 자신 때문에 억지로 따라온 감이 있었으니 설아에게 많이 미안했다.

애당초 자신이 믿음직했으면 굳이 설아가 따라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설아의 예상대로 민수가 재미없게 만든 방송을 설아가 구세주가 되어 구원했으니 더 미안하고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민수는 자신이 믿음직했어도 설아가 무조건 따라왔을 거란 사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설아는 민수랑 같이 놀러 나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설아는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더 많았었다.

“에이. 진짜 앞으로는 안 나간다.”

민수가 허리를 펴고 한숨을 쉬는데 자신과 마찬가지로 차기작을 고민하고 있던 설아가 민수의 집으로 찾아왔다.

“응? 왜 그러고 계세요. 오빠. 무슨 일 있어요?”

민수는 한숨을 쉬면서 설아에게 자신이 읽은 댓글 들을 몇 개 들려주었다.

“풋. 그래도 소속사에서 예능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말은 좀 웃기네요.”

“그러게요. 하긴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은 예능도 배운다고 하긴 하지만요.”

민수가 실의에 빠져있자 그 모습을 보며 웃음짓던 설아는 주제를 돌려 다음 차기작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세요? 사실 작년에도 아무것도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중국으로 가신 거잖아요?”

주제가 달라져도 민수의 얼굴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글쎄요. 그때보다는 나아졌죠. 그래도 좀 더 두고 보려고요.

아마 이번 주부터 “로열”에서 제가 나오기 시작하면 또 분위기가 조금 달라질 거 같아요.

이번에는 정극 연기를 한 건데 나름 나쁘지는 않았거든요.”

“하긴 그렇네요.”

“그러는 설아 씨는요. 어때요?”

민수의 물음에 설아의 표정도 조금 진지해졌다.

아무래도 설아 역시 차기작에 대한 고민이 많아 보였다.

설아는 “용이 울음”에서 조연을 그리고 “미스 신데렐라”에서 결국 마지막에는 주조연이 되었지만, 시작은 조연이었던 “제니”를 연기하면서 다음에는 반드시 주연을 해보고 싶었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미스 신데렐라”에서 충분히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고 자신의 이미지도 더 좋아졌으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분명 아직 자신을 주연으로 써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드라마를 중점적으로 알아보는 중이었는데 내용이 크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우선 주연으로 섭외가 들어오긴 했다.

그래서 고민 없이 그것으로 결정하려는 찰나에 영화에서 비중이 큰 조연으로 섭외하고 싶다고 감독이 직접 연락을 했고 시나리오를 보니 배역이 임팩트가 있는 역할이라 순간적으로 결정 장애가 찾아왔다고 한다.

저번에 설아가 해태 눈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낀 민수는 지금 설아가 고민하는 작품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직 경력이 짧은 설아에게는 한 작품이라도 잘못 출연하면 피해가 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확고한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경력을 차분하게 쌓을 수 있는 그런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 확실히 유리했다.

“드라마는 “햇살이 비추는”이고요. 영화는 “잠복근무”예요.”

설아도 아예 마음먹고 왔는지 바로 민수에게 두 개의 대본을 내밀었다.

“햇살이 비추는”은 민수도 기억이 나지 않는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가 빛을 보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전생에서는 없었던 드라마라서 그런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잠복근무”는 민수의 기억 속에 있는 영화였다.

민수의 기억 속에서도 이 영화는 나름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던 거 같다.

“잠복근무”는 한 형사가 마약사범을 뿌리 뽑기 위해 인천의 폭력조직에 잠복해 들어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 폭력조직을 완전히 소탕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설아에게 제안이 들어온 배역은 주인공의 조력자가 되어주는 “윤 마담”이었다.

“음….. 윤 마담이네요.”

“네. 윤 마담이요.”

“설아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배역이 괜찮을 거 같나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배역 자체를 잘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네, 이 정도는 자신 있어요.

하지만 이게 최선이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정도가 되겠네요.”

극 중 “윤 마담”은 기본적으로 팜므파탈적인 매력을 뽐내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아마 연기를 잘하기만 하면 충분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아의 이미지가 조금 걸리긴 했다.

아무리 성숙해도 우선은 이제 겨우 22살이 되는 설아가 적어도 30대 초 중반의 농밀한 감성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는 둘째 치고 아직 어린 설아가 자꾸 섹시한 쪽으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되는 것이었다.

전작의 “제니”도 의상이 고급스러웠을 뿐 엄밀히 따지면 매력적인 여성미를 충분히 보여준 셈인데 아마 감독도 그런 설아의 모습을 보고 “윤 마담”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수는 배우의 이미지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배우가 선택할 수 있는 배역의 폭이 좁아진다는 것을 지금도 충분히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반면 “햇살이 비추는”은 전혀 그런 방향이 아니었다.

이 배역은 차라리 설아의 연령대에 맞는 그런 배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드라마는 현시대에 많은 젊은이가 공감할 수 있는 취업에 대한 고민과 고난을 주제로 삼고 있었고 여주인공 “나은”은 취업을 앞둔 졸업반 여대생이었다.

나은과 친구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며 취업 전선에 뛰어들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두려움과 취업의 애환, 그리고 그런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성정 드라마였는데 현시대의 젊은이들이 가지는 고뇌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충분히 많은 사람의 공감을 줄 수 있는 그런 드라마였다.

게다가 여주인공 나은은 전적에서 설아가 보여주었던 예쁘고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소박하고 궁상맞으며 조금 엉뚱한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설아가 보여주지 못한 다른 매력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거 같았다.

다만 문제는 이 드라마가 전혀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이 드라마의 성공을 확실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민수를 시작으로 전생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전혀 기억나지 않는 드라마나 영화가 성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만약 저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전 드라마를 선택하겠어요.

둘 다 일장 일단이 있긴 한데, 좀 더 길게 본다면 차라리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혀 놓는 게 이익이 아닐까요?”

“음…. 그런가요?”

“그리고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아마 앞으로도 저런 농염한 배역은 설아 씨에게 숱하게 들어올 거에요.

하지만 저런 소박 하고 궁상맞은 배역이 설아 씨 앞으로 들어올지는 잘 모르겠어요.

차라리 저런 배역이 지금이 아니면 소화하지 못하는 그런 배역이죠.

설아 씨는 아직 어려요.

그러니 지금은 경험을 쌓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저런 배역보다는 아무래도 나은 같은 배역이 더 유익하겠네요.

사실 주연이란 것도 마음에 들고요.”

민수의 말대로 지금은 그래도 앳된 얼굴이 남아있는 설아였지만 아마 점점 더 성숙하게 변해 갈 것이고 그때가 되면 저런 배역을 소화하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주연이라는 것도 큰 매력이긴 했다.

단순히 주연 배우라는 타이틀 보다 어쩌면 자신이 극의 중심으로서 하나의 극을 완전히 이끌어 봤다는 경험도 무시 못 하는 것이었다.

민수가 생각하기에 그런 경험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그리고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민수의 사심이었지만 민수는 저 “윤 마담”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상당히 헐겁고 추워(?) 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 데다가 남주를 농밀하게 유혹하는 장면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기를 하기에는 설아가 아직 너무 어렸다.

설아가 벌써 저런 연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주연이라면 몰라도 조연인데 굳이?

물론 그런 사심이 들어가면 안 되는 거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음…..”

설아의 고민이 길어지는 모양인지 예쁜 이마에 살짝 주름이 졌다.

그런 설아의 모습을 바라보던 민수는 설아의 고민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물론 민수는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고 그냥 푸념했을 뿐인데 그게 결정타가 되어버린 경우였다.

“그리고 사실, 저 윤 마담 너무 야하잖아요.

감독도 좀 이상한 거 아니에요?

설아 씨 나이가 몇인데 저런 배역을 들고 오냐고요.

개인적으로는 좀 불쾌하네요.”

“네?”

“아니, 물론 연기자로서 당연히 그럴 수 있어야 하긴 하죠.

그런데…. 아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풋.”

고민하던 설아는 감독을 성토하는 민수의 볼멘소리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니까 제가 저런 배역을 맡는 것은 반대다. 이거네요.”

“음….. 작품의 선택은 전적으로 설아 씨가 마음 가는 데로 하는 게 맞아요.

그건 맞는데 순수하게 제 생각을 묻는다면 당연히 반대죠.

누가 좋아하겠어요?

저거 은근히 노출도 많잖아요.”

설아는 가끔 민수가 자신에게 저런 의외의 모습을 보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항상 배역을 고민할 때 연기적인 부분만 생각하던 민수였는데 이제 자신에게는 그런 기준만으로 배역을 추천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것도 자신이 민수에게 더 중요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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