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03화 (203/325)

#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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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마치고 고단한(심리적으로) 몸으로 차에 실려 오던 민수는 옆에서 콧노래를 부르는 설아를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피곤한 자신과는 달리 너무나도 건재한 설아의 모습 때문이었다.

사람에 따라 예능 체질이라는 말이 있다던데 설아도 그런 것인지 참 신기했다.

“하….. 설아 씨는 힘들지 않았어요?”

“힘이요? 왜요? 막말을 마구잡이로 퍼부어서 그런지 차라리 속이 시원한 기분이에요.

세상에 이렇게 은혜로운 방송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아닌 게 아니라 설아는 진짜 기분이 상쾌해 보였다.

아무래도 이래저래 쌓인 스트레스가 있었는데 이 일로 말끔히 씻어버렸다는 설아의 말에 민수는 그냥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음….. 설아 씨.”

“네?”

“아까요. 달리기할 때요. 그때 마지막에 일부러 힘을 빼신 거죠?”

“헤…. 아셨어요? 제가 막 달려나가면 재미가 없을 거 같더라고요.

이미 민수 오빠가 한번 그렇게 했는데 저까지 그랬으면 아마 피디님이 우는 걸 볼 수 있었을걸요.”

민수는 설아와 여러 번 운동을 해와서 설아의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로는 힘이 빠질 수도 있다고 했지만 사실 300M 정도로 설아의 힘을 뺄 수 없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시합이 시작되자 설아가 마지막에 힘이 빠진 듯 속도를 늦췄고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머쥐면서 결과적으로는 아주 좋은 그림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민수도 방송이라 긴장돼서 평소보다 체력이 빨리 소진되었거니 했는데 가만히 보니 설아는 전혀 긴장한 모습이 아니라 그게 연기일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민수 오빠는 왜 그랬어요?

MC들 상대로는 충분히 승부 조작(?)을 할 수 있으셨을 텐데요.

그러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설아는 민수가 압도적으로 이겨버리자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왠지 방송이 아주 재미가 없어질 거라는 걱정 때문에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 자신은 지금 한창 팩트폭력 캐릭터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웬만큼 막말을 쏟아부어도 별로 문제 되지 않을 거 같았다.

경기가 재미없으면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자신이 도전 멤버들을 이겨버리면 금상첨화.

민수에게 패배한 멤버들이 자신에게까지 져버리면 멘탈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테고 방송은 더 재미있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이게 오늘 설아가 예쁘게 차려입고 왔으면서 굳이 자처해서 도전 멤버들과 대본에도 없는 시합을 하게 된 이유였다.

설아는 자신이 생각해도 오늘 자신이 한 행동은 너무나도 완벽한 내조였다고 자찬했다.

“끙…..”

민수는 설아의 말을 듣고 아차 한 생각이 들었다.

그냥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설아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그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리얼 버라이어티의 생명은 사실성과 진실성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되나 싶기도 했다.

“리얼 버라이어티긴 하지만 어차피 예능이잖아요.

상황을 봐서 그 정도는 조절해야죠.”

민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민수 오빠는 예능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거 같아요.

정 그러면 연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같이 출연하는 MC나 게스트를 배우라고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각본을 대충 만들어 보는 거예요.

그리고 애드립으로 연기를 하는 거죠.

오빠는 차라리 그게 나을걸요.”

설아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조금 과하긴 했나 보다.

최대한 열심히 성실하게 미션에 임한 것이 이런 결과를 내다니.

정말 설아 마저 없었으면 방송이 엄청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그런 대결을 하다 보면 집중력이 올라가고 이기고 싶은 승부욕이 생겨버려 참 조절이 쉽지 않았다.

설아의 말대로 연기라고 생각하면 조금 나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리고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그렇게 한번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방송이 끝나고 편집실에서 편집에 열을 올리던 피디는 영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와, 세상에 이렇게 방송을 망치려고 하다니.

정말 쉽지 않은 녀석이네.”

“누구요?”

“누구긴 누구야? 정민수지.”

피디 옆에서 편집을 돕고 있던 조연출은 피디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 그냥 열심히 했을 뿐인데요.

원래 예능에 익숙하지 않은 연예인들이 나오면 종종 이러잖아요.”

“하…. 그래. 그렇겠지?

굳이 나와서 남의 프로그램을 망칠 필요는 없으니까.

윤 엔터 측이랑 오해도 다 풀긴 했고.”

“오해….라고 하기엔 조금 그렇지만 어쨌든 풀긴 했죠.

상대도 윤태준의 행동을 따로 사과했으니까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윤태준을 꼭 불러 달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하….. 정민수 이거 그림은 좋게 나오는데, 나중에라도 누가 정민수 쓴다 그러면 혼자 부르지 말고 저 윤설아나 아니면 윤 엔터 다른 배우들 누구라도 껴서 같이 부르라고 해.

쟤 혼자 나오면 프로그램 말아먹겠다.”

“그나저나 윤설아는 대단하네요.

그쪽도 별로 예능 경험이 많지 않잖아요.

패널로만 몇 번 나왔던 거로 아는데요.

거기서 그렇게 활약해 줄 거라고는…..”

“그러게 말이다.

얘는 예능에서도 잘 먹히겠네.

캐릭터도 좋고.

후…. 윤태준…. 정민수….. 윤 엔터라…..”

“왜 그렇게 신경 쓰세요?”

조연출은 웬만한 스타들은 전혀 신경도 안 쓰는 피디가 윤 엔터에 유독 신경을 쓰는 분위기이자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스타는 한철이고 그 스타가 아니라도 또 다른 스타는 언제나 있다는 마인드로 살아가던 피디였기 때문이다.

“신경 당연히 쓰이지.

내가 이쪽 밥을 먹고 사는 한 아마 계속 신경 써야 할걸.

윤 엔터 배우들이 이쪽에서 분위기가 어때?

너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많이 들었을 거 아냐?”

“평이야 좋죠.

솔직히 윤태준이면 세끼 피디부터 해서 FD, 그리고 보조출연자들한테도 엄청 친절하기로 유명하니까요.

게다가 촬영 중에 생기는 웬만한 변수들은 다 이해해주기도 하고요.

전에 “별당신”찍을 때도 이미 스타였는데 그때도 다른 사람들한테 얼마나 사근사근했다고요.

아마 지금까지 촬영장에서 윤태준이 짜증 내는 거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을걸요.”

“그럴 거야.

예전에 윤강철도 그랬거든.

보조 출연자나 FD한테 반말하는 걸 한 번도 못 봤지.

상대가 아무리 어려도 말이야.

자기 아버지한테 배웠으면 그런 것도 배웠겠지.”

“정민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에요.

이번에 SBC에서 “로열”에 급하게 그것도 거의 공짜로 들어갔는데도 촬영도 엄청 열심이었고 짜증 한번 안 부리면서 피디가 시키는 데로 다 고분고분 잘 마치고 왔다잖아요.

솔직히 지금 정민수 정도면 그렇게 들어가도 대본 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 급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냥 딱 제작진이 원하는 만큼만 정확히 해주고 미련 없이 나왔다니 그건 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민수가 촬영할 때도 이미 “로열”은 완전히 되는 드라마였잖아요.

만약 정민수가 들어가서 욕심부리기 시작했으면 피디랑 작가도 조금 곤란했을걸요.”

“끙… 뭐 소문은 좀 이상하지만….”

“진소희랑 윤설아는 아직 신인이라 알 수 없고…..

이수연은 이쪽 드라마를 찍은 적은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요즘 들리는 말로는 성격 정말 좋다고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조금 차가웠는데 요즘은 완전히 달라졌다고요.”

“이수연이 RD에 있었을 때는 성격이 좋을 수가 없었겠지.

소속사 옮기면서 이제 자기 성격 나오는 걸 테고 말이야.

아니, 그건 그렇고.

그래.

그렇게 성격 좋은 윤태준이 이번에 성깔 한번 제대로 부렸지.

보통 같으면 그냥 넘어갈 일인데 왜 우리가 사과까지 했을 거 같아?”

“그거야…. 우리가 먼저 잘못했으니까 그렇죠.”

“아니, 그게 아니야.

우리가 언제 잘잘못 따졌나?

방송에서는 힘 있는 놈이 왕인데 우리가 언제 힘없는 입장에서 사과했냐는 말이야.

그냥 흐지부지 넘어가기만 했지.

그리고 그게 당연한 거고.

그런데 윤 엔터는 이제 그렇게 무시 못 해.

실수로 이수연을 건드렸는데 윤태준이 저렇게 나왔고, 이번에 정민수가 이수연 드라마에 200만 원 받고 들어갔다며?

오늘 정민수 나오는데 윤설아가 들러리를 자처하다시피 해서 같이 따라왔고 말이야.

지금 윤설아 찾는 곳도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윤 엔터 배우들 사이에 결속력이 생각 이상이라는 이야기고, 만약 그중 하나랑 틀어지면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는 거야.

만약 윤태준 하나라고 생각하면 뭐 그렇게 사과까지 할 일은 아니었지.

그런데 그 배우들 전체라고 생각해봐.”

“좀 그렇긴 하네요.

완전 대형 소속사 상대하는 느낌이잖아요?

막상 활동하는 연예인은 5명뿐인데요.”

“그런데 진짜 드라마국이나 예능국에서 우리에게 압박까지 넣은 건 단순히 지금 윤태준이랑 정민수가 인기가 있어서만은 아니야.”

“그럼요?”

“배우들 나이를 잘 생각해 봐.

가장 나이 많은 이수연이 이제 스물여덟이야. 올해가 다 갔으니까 스물아홉이라고 치고.

그리고 윤태준이랑 정민수가 내년에 스물일곱 살.

어이없게 오늘 방송을 쥐고 흔든 윤설아가 내년에 스물두 살이야.

그리고 지금 중국에서 드라마를 찍고 있는 진소희가 내년에 스물세 살.

마지막으로 지금 계약 논의 중이라는 지은우가 내년에 스물다섯이라지?

지은우를 빼고 생각해도 쟤들이 앞으로 얼마나 활동을 더 할까?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10년은 더할걸.

게다가 생각해보면 쟤들이 다 나이대의 연기력이 아니야.

예쁜 애들은 많지만 그래도 나이 때문에 어린 애 중에 연기까지 잘하는 애들은 언제나 부족할 수밖에 없지.

정말 필요할 때는 찾을 수밖에 없는 배우란 말이야.

그리고 촬영할 때는 성격도 싹싹한 편이지.

스태프들한테는 당연히 잘하고.

그렇다고 얘들이 외모가 딸려?”

“아니죠. 비주얼도 완전히 먹어주잖아요.

특히 윤설아는 솔직히 좀 말도 안 되죠.”

“그래, 그래서 윤설아는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부터 얼굴 알리자마자 여기저기서 패널로 불러댔지.

그냥 앉아 있기만 해도 그림이 되니까 말이야.

결국은 무슨 소리냐면 저런 애들은 롱런 할 수밖에 없다는 거야.

지금도 저런데 내년 내 후년, 그리고 5년 후를 생각해 보자고.

지금 어린 배우들도 한두 해 안에 자리를 잡을 테고 점점 시간이 지난다고 생각해 봐.

막상 5년 후라고 해 봤자 제일 나이가 많은 이수연이 서른네 살, 어쩌면 여배우로서 가장 많은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나이야.

동안이라서 20대 연기까지 충분히 할 수 있겠지.

그때쯤이 되어도 저 배우들은 아직 전성기라는 거야.

그런 애들이 몇 년 동안 다 MBS를 거부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할걸”

“아…그래서.”

“너도 가능하면 친하게 지내둬.

네가 피디가 돼서 프로그램을 만들 때쯤이면 아나 너도 저들 중 하나가 꼭 필요할 시기가 있을 거야.

예능이 이런데 드라마는 이것보다 더하겠지.”

피디는 다시 한번 화면을 살펴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마 이 일로 일은 잘하지만, 입이 거친 작가도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이다.

원래 목표가 드라마 작가였기 때문에 어쩌면 더 심각했을지도.

자기가 미리 나서서 사과하겠다고 한 걸 보니 그건 확실해 보였다.

피디 자신도 굳이 이제 윤 엔터 쪽이랑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말한 데로 언제 저 배우들이 필요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능 출연까지 마치고 며칠이 지나자 이제 정말 한 해가 다 가고 있었다.

지금 당장 드라마에 출연 중인 수연과 영화가 상영 중인 태준을 제외하고 민수와 설아는 이제 다음 작품을 고민할 시기가 된 것이다.

결국 설아와 민수는 이제 다른 곳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시나리오랑 대본만 살펴보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주말이 되자 드라마 촬영에 피곤하던 수연과 이제 영화 관련 스케줄을 모두 마친 태준까지 같이 민수의 방으로 찾아왔다.

오랜만에 같이 시간도 보내고 민수가 나온 예능도 시청하기 위해서였다.

둘의 표정은 조금 상반되어 있었다.

아마 지금 얻고 있는 성과 때문일까?

물론 태준의 영화 “일리걸”의 성적도 나쁘진 않았지만 지금 드라마 “로열”의 기세는 무서울 정도였다.

특히 마땅히 키가 되어줄 간판 배우가 없다는 이유로 방송 전에는 조금 평가 절하되었던 “로열”의 약진은 방송가에서도 의아한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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