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201화 (201/325)

# 201

4

민수는 자신의 출연할 “무모한 도전”의 계획서를 받아 들고 윤 대표를 만나러 왔다.

방송 출연 전에 당부할 말이 있다는 윤 대표의 전언을 받고 나서였다.

윤 대표는 민수가 들어서자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민수를 자리로 안내했다.

“이거, 참 일이 이상하게 됐구나.”

윤 대표는 민수에게 자신이 이번에 어쩔 수 없이 민수에게 스케줄을 강제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설명했다.

단순히 상대가 이상한 오해를 하는 줄 알았는데 윤 대표의 말을 들어보니 태준이 조금 이성을 잃고 상대의 오해에 잔뜩 부채질을 해댔다.

민수는 특히 수연의 이야기까지 듣고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시기를 따져보니 대충 10월쯤, 민수가 중국에서 영화를 찍고 있을 시기였다.

그러니 자신이 아무런 이야기를 못 들을 거겠지.

그때는 한창 연락을 끊고 혼자서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 수연이 그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은 걸 보면 수연 자체는 그 이야기를 듣고 흘려버린 것이 분명했다.

다만 태준이 마음속으로 이를 갈고 무려 두 달이나 후에 복수를 한 것이고.

군자의 복수는 10년이라도 늦지 않는다지만 참 태준답지 않게 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 대상이 수연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뭐, 뒤에서야 나라님도 욕하는 세상이니 뭐라고 할 순 없지만, 그쪽도 경솔하긴 했네요.

그게 저희 쪽에 알려져 버렸으니까요.”

“그렇지.

뭐 어떻게 생각하면 별거 아니기도 하고 사실 그야말로 억울하면 급을 올리면 되는 거니까.

그쪽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온 건 분명 잘못된 거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건 그냥 흘려버려야 했었다.”

“그래서 급이 되는 태준이가 그렇게 날뛴 거 아닐까요?”

“끙,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긴 하구나.”

“그래도 확실히 경솔하긴 했네요. 윤 배우답지 않게요.

장난기가 많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녀석은 아니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내 따끔하게 한마디 하긴 했다.

배우가 높은 곳으로 갈수록 더 조심해야 하는 법인데, 벌써부터 그렇게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서야 쓰겠느냐?

그러고 보면 직접 당사자인 수연이도 흘려 넘기는 일이었는데 그 녀석이 왜 나서서 일을 크게 만들었는지 참…..”

아마 윤 대표가 수연과 태준의 관계를 알기 전까지는 이번 태준의 돌발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생각해 보면 분명 직원들은 둘의 사이를 눈치채고 있을 텐데 아직 윤 대표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니, 이건 필시 민 여사의 개입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동원이 말했던 통제력과 영향력이란 게 과연 이런 것일까?

자신의 회사인데 직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형국이라니 우리 대표님도 왠지 조금 안타깝긴 했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란다.

그쪽에서 정식으로 사과까지 했으니 더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고 분위기도 좀 풀어주고 싶은데 그걸 네가 해줘야 할 거 같구나.”

“참 제 능력 밖에 일인데요, 그건……”

민수는 윤 대표의 말을 듣고 아연해 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예능에 나가는 것도 벅찬 일인데 나가서 경색된 분위기를 풀어달라니.

확실히 능력 밖의 요청이었다.

“아, 특별히 뭘 해달라는 건 아니야.

다만 아무래도 그런 일이 있다 보니, 상대가 조금 삐딱하게 나올 수도 있단다.

물론 그러진 않겠지만, 만약 그렇더라도 그냥 웃으며 받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혹시 일의 앞뒤를 전혀 모르고 갔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안 되니 미리 알려주는 거란다.”

아무래도 윤 대표는 혹시나 민수마저 예능에 나가 문제를 일으킬까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이미 태준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셈이니 민수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자중하기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민수도 사정을 알고 나니 그쪽에서 조금 심술을 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특별히 큰일은 없으리라.

그렇게 사과까지 하고 불러 놓고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윤 엔터보다 그쪽의 손해가 더 컸다.

아마 조금 심술을 부리면서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전전긍긍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나가서 별 사고 없이 열심히만 하면 된다면 그건 민수도 자신이 있었다.

“네,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웃으면서 가서 열심히 촬영하고 웃으면서 돌아올 테니까요.”

“그래, 부탁하마.”

민수는 자신의 방에 돌아와 자신 앞으로 날아온 계획서를 살펴보았다.

대체 무슨 촬영을 하려고 자신을 그렇게 찾았을까?

“음…..”

사실 정말 별것 없었다.

대체 이 기획에 내가 왜 필요할까 싶을 정도였다.

기획된 내용은 “정민수를 이겨라”

멤버들이 힘을 합쳐서 자신과 겨룬다는 내용이었는데, 과연 이게 재미가 있을까 싶었다.

“뭐, 그건 그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 난 가서 그냥 내 할 일이나 하고 오면 되겠지.

그나저나 일이 그렇게 됐는데 석재 선배님은 따로 연락 한번 안 하셨네.

그렇게 애타게 날 찾았으면 그쪽으로도 연락을 한번 했을 법한데 말이야.”

전생에서도 석재는 일 문제로는 절대 사적인 부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실제로 겪으니 정말 그랬다.

자신이 심적으로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석재가 연락했으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긴 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3일이 빠르게 흘러갔고 촬영 날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3일 동안 설아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케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따로 개인적인 시간을 가진 모양이었다.

민수는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그래도 설아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로 했다.

촬영 당일 민수는 설아와 함께 촬영 장소로 출발했다.

장소는 방송국 근처의 실내 체육관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끔 큰 프로젝트를 촬영할 때마다 거액의 제작비가 들곤 했던 “무모한 도전”임을 생각해 보면 이번에는 정말 저렴하게 촬영이 진행하는 셈이었다.

“이 사람들 이거 막판에 제작비 아끼려고 이런 기획을 한 거 아니야?”

민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혼자서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설아는 자신의 벤이 아니라 민수의 차에 올라탔다.

어차피 같은 곳으로 향하기 때문에 따로 차를 타고 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서였다.

오늘 마음껏 몸을 움직일 민수에 비해 설아는 그럴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단정하고 세련된 의상을 입고 있었다.

타이트하고 짧은 아이보리색 원피스에 붉은색 계통의 재킷 수트를 입었는데 전체적인 느낌을 보니 오늘 기획에 맞춰 아나운서 같은 분위기를 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원래 옷보다 옷걸이라고, 예쁜 사람은 누더기를 입어도 예쁜 법이라 설아가 입은 붉은 색이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오늘도 예쁘네요. 설아 씨는.”

“헤~ 그래요? 그거 고마운 일이네요.

제 미모는 항상 열일 하고 있으니까요.~”

민수는 오늘도 자신감 넘치는 설아가 참 귀엽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제도 그렇고 통 보이지 않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민수가 요 며칠의 근황을 묻자 설아의 맑은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리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민수도 항상 설아를 관찰하다 보니 그녀의 습성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지금처럼 눈동자가 갑자기 흔들리는 경우는 당황했거나 거짓말을 했을 경우였다.

하지만 그 순간이 워낙 짧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었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음…. 개인적으로 조금 알아볼게 있었어요.

이제 다 마무리됐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군요.”

민수는 뭔가 조금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지만 설아가 됐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했다.

설아는 민수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보이자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 아버지에게 들었어요.

우리 오라버니가 생각지도 못하게 말썽을 부렸다고요.

분명 수연 언니는 신경도 안 쓰고 있을 텐데 이 바보는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정말 영화 일정만 끝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설아도 태준의 한 짓을 들었는지 태준을 성토하고 나섰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민수도 설아도 윤 대표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그가 MBS 예능에 안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었다.

아마 드라마에 온 신경을 다 쏟고 있는 수연도 전혀 모르지 않았을까?

참 태준 혼자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뭐… 저라도 설아 씨가 어디 가서 무시당하고 온다면 그럴 거 같긴 하네요.

그래서 윤 배우한테 뭐라고 하기도 힘들 거 같아요.”

“헤~ 그래요? 음… 음. 그건 좀 기분 좋은 말씀이네요.

그럼 별문제도 없었으니 오라버니는 그냥 용서하는 거로?

아니지. 아니야.

오라버니 때문에 여행도 물 건너갔는데 그럴 순 없지.

제가 이걸 적어 놨다가 나중에 오라버니가 어디 간다고 하면 바로 문제를 일으킬 거에요.”

아무래도 설아는 이번에 여행을 못 간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설아가 저렇게 이를 갈고 있는걸 보니 아마 내년에는 태준이 마음 편하게 여행할 일이 없어 보였다.

민수는 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진정을 시키면서 훗날 태준이 설아에게 복수 당해서 한탄하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거 같아서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하하. 그러세요.

그 녀석도 당할 땐 당해 봐야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저도 조금 억울하긴 하네요.”

“그렇죠? 복수는 달콤한 거니까요.”

민수마저 자신의 복수에 찬성하자 설아도 이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오늘 설아 씨가 제 들러리같이 돼 버렸네요.”

“글쎄요. 전 별로 상관없는데요.

어차피 오빠가 촬영가면 저도 특별히 할 일은 없으니까요.

그럴 바에는 그냥 같이 가서 하루 놀다 오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왕에 가는 거니, 제작진에 저에게 요구하는 바는 확실히 하고 올 생각이에요.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기획이 재미가 있을지 의문인데 저라도 옆에서 양념을 잘 쳐야죠.”

“그러게요. 참 무슨 생각인지…..”

그리고 촬영장에 도착한 민수는 바로 피디와 작가를 찾아가 인사를 건넸다.

조금 떨떠름한 모습을 보일 거로 생각했던 피디는 생각보다 더 민수를 환대하고 있었다.

결국 민수의 출연이 확정되자 피디는 우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드라마국이나 예능국에서 압박 넣는 일이 없어질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솔직히 자존심이 상하냐고 묻는다면 조금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프로그램에 그렇게 와달라고 해도 계속 거절을 하는 상대가 예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민수 자체만 봐도 참 좋은 소재였다.

애당초 매스컴에 노출이 거의 되지 않은 데다가 지금은 할리우드에서 영화가 개봉된다는 이야기 때문에 한창 상한가를 치고 있었다.

특히 영화를 찍고 온 이후에도 예능 출연을 하지 않았으니 소재도 무궁무진했다.

그러니 이런 소재를 놓친다면 예능 피디라고 할 수도 없으리라.

사실 다른 모든 장치나 소재들은 그냥 곁다리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민수가 출연했다는 그 사실 자체였고, 아마 석재나 다른 멤버들은 민수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다만 떨어도 충분히 방송 분량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다만 조금 심술을 부리긴 할 것이다.

그 심술로 방송이 풍성해진다면 지금까지 속을 끓인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민수의 소문을 생각하면 적당히 잘 조절하는 것도 중요했다.

“아이고. 민수 씨, 이제야 보게 되네요. 참 반갑습니다.”

민수는 자신을 진심으로 반기는 피디를 보며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자신에게 사적으로는 감정이 조금 안 좋을 수도 있을 텐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피디님 제가 너무 뺐죠?

영화 촬영이다, 드라마다 본업에 신경을 쓰다 보니 이렇게 되고 말았네요.

아직 신인이다 보니 방송가 생리에 서툴러서 그런 거라고 이해하고 아량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하하. 배우가 연기에 더 집중하는 건 당연하죠.

괜찮습니다. 이렇게라도 나와 주신 걸로 충분해요.

그럼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릴게요.”

“네, 피디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민수가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피디는 느낌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헛바람이 들어가 있을 시기인데 생각보다 더 겸손해 보였다.

게다가 폭탄과도 같다는 그런 성깔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긴 이 바닥 소문치고 정상인 게 없긴 하지.”

피디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오늘 촬영할 내용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