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95화 (195/325)

#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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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스러운 창민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민수가 합류한 이후에 모든 장면의 촬영은 민수가 연기하는 한준호를 기준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제작진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않는 민수를 배려해 준 것이었는데, 원로 배우 최원태까지 동의한 일이라 다른 배우들도 특별히 반발하지는 않았다.

물론 모든 배우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중론이 그렇게 모였기 때문에 겉으로는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어쨌든 그런 이유로 민수가 연기하는 준호는 드라마가 거의 끝날 때까지 등장하지만 민수의 촬영 일정은 7일이나 8일 정도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오늘 일정은 대원 그룹의 회장 한철원 역을 맡은 최원태와 민수가 중심을 이루고 자투리 시간에 다른 배우들이 촬영하기로 결정되었다.

몇 년 전 철원이 준호를 불러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는 회상 장면, 그리고 철원이 쓰러져 있는 병원에 문병 온 준호가 철원을 보며 안쓰러워하는 장면 등이었는데, 특히 혼자 누워있는 철원을 보며 준호가 독백하는 장면은 지금까지 나쁜 아버지로만 표현되고 있던 철원이 대원 그룹을 위해서 개인적인 감정을 모두 배제하며 살아왔고, 대원 그룹을 책임질 차기 총수를 육성해야 하는 회장이라는 위치 때문에 자식들에게 부정을 표현하지 못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준호는 기계에 의존하며 생을 이어나가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착잡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년 전에 자신을 개인적으로 부를 때만 해도 정정했는데 그새 나이를 먹은 아버지의 모습이 참 무상하기 그지없었다.

“하…. 영감 도대체 뭘 잘했다고 혼자 이렇게 누워서 쉬고 있는 거야?”

“영감이 예전에 그랬지.

자신은 대원 그룹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세 아이의 아버지일 수가 없다고 말이야.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은 한철원의 아들딸이 아니라 대원 그룹의 아들딸이 되어야 한다고.

참 웃긴 소리였어.

그래, 그렇게 한번 제대로 안아 주지도 못한 아들들이 얼마나 잘 자랐는지 보라고.

작은놈은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저를 떠받드는 놈들하고만 지내다 보니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면서 오만하고 건방진 멍청이가 되었고, 큰 놈은 영감이 안 좋은 부분만 빼다 박아서 사람을 돈과 가치로만 판단하는 그런 냉혈한이 되어 버렸잖아.”

“차라리 집에서는 회장님이 아니라 아버지로 자식들을 대하지 그랬어?

어차피 망칠 자식 농사였는데 그랬으면 한이라도 없었을 거 아니야.”

“어렸을 때 영감이 나한테도 그랬었지.

나에게 대원 그룹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야.

그때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해?

큭큭, 아마 영감도 기억 할 거야.

난 그딴 아버지 필요 없으니까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대원 그룹이 내 아버지라면 난 아버지 없이 그냥 엄마랑 살겠다고 했지.

만약 내가 그때 영감을 말을 듣고 계속 이 집에서 살았으면 나도 아마 그 형제처럼 무언가가 없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누나가 정상인인 게 차라리 신기할 정도야.

이놈의 집구석에 치를 떨며 몇 년 동안 집을 떠나 있어서 그런 거겠지?”

“그러니 결국 이게 다 영감의 자업자득이야.

애당초 이 집구석에서는 제대로 된 인간이 나올 수가 없었던 거지.

어린 나도 아는 걸 영감은 왜 몰랐을까.”

“만약…… 만약……. 다시 일어난다면 영감도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

그깟 대원 그룹이 뭐라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어?”

“어쨌든 이번 일 까지는 영감이 시키는 대로 해줄게.

그러니 뒷일은 영감이 일어나서 정리해.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

긴 독백이 진행되는 동안 민수의 감정이 수시로 변하며 억양 눈빛 그리고 호흡까지 자유자재로 조절되었다.

연민과 조소, 탄식 그리고 답답함이 수시로 바뀌어 가는 민수의 표현 능력은 누워 있던 최원태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너무나 완벽했다.

특히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호흡과 억양에서 눈을 감고 있는 자신에게까지 감정이 선명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연기에 대해서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강철이 키운 아이라더니 탁월한 표현 능력에는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원태는 새삼스럽게 민수가 달라 보였다.

이런 배우가 세간에서는 액션 전문 배우로 알려져 있다니.

강철은 대체 왜 이런 배우에게 지금까지 액션 연기만 맡겼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지 아들내미랑 거의 막상막하가 아닌가.

“좋네. 좋아. 민수라고 했지?

강철이한테 배웠다지? 내 앞으로도 기대 하겠어.”

원체 다른 배우들에게 무신경하다고 소문난 원태의 말이었기 때문인지 민수는 원태가 자신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묘한 짜릿함을 느꼈다.

원로 배우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역시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민수가 촬영장에 드나들기 시작한 지 3일째가 되는 날.

창민은 민수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냈다.

민수는 어제 피디로부터 자신의 일정을 일주일 정도로 조정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제작진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지만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자신이 함께하는 일주일 정도는 수연의 옆에서 자신이 방패막이가 되어준다고 해도 그 뒤로도 일정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주일만 참으면 자신이 사라질 텐데 굳이 3일 만에 자신을 찾아오다니 창민의 인내심은 정말 경이로울 정도였다.

후미진 곳으로 민수를 불러낸 창민은 인상을 잔뜩 쓴 채로 민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 너 도대체 뭔데 이수연한테 붙어서 떨어지질 않아?

네가 이수연 서방이라도 돼?”

“에이. 그럴 리가요. 그냥 수연 선배 말동무나 해 드리는 거죠.”

“말동무? 야. 이수연은 내가 찍었으니까 넌 딴 데 가서 알아봐라.

이게 어디서…..

하… 어쨌든 좋을 말로 할 때 이수연한테서 떨어져.

앞으로 이수연 대기실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수연 선배한테 접근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선배님 아닐까요?

분명 수연 선배가 대기실 오는 것도 불편하고 사적으로 만날 생각 없다고 하셨을 텐데요.”

“뭐? 이게 웃기고 있네.

이 병신아. 그럼 여자가 처음부터 네 좋아요 하겠냐? 당연히 튕기는 거지.

적당히 튕기다가 나한테 오게 되어 있으니까 참견 말고 넌 그냥 꺼져.”

민수는 마음속으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수연에게 농담 삼아 진짜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했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 되어버리다니.

창민의 말을 들어보니 창민이 수연에게 사적인 관심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연애 감정인지 아니면 그냥 호기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분명히 수연은 계속 거절했다고 하는데 같이 촬영을 하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딱 잘라서 거절하지 못하고 에둘러서 거절한 것이 이 사달이 난 이유일까?

아니 그걸 떠나서 그 정도 거절했으면 적당히 알아들어야지, 정말 면전에 대고 ‘야 난 너 싫으니까 꺼져’ 라고 해야 알아들을 생각인지 참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저 근거 없는 자신감은 또 무엇인가.

창민의 말을 들어보니 어떤 여자도 자신을 거부할 리가 없으니까 수연도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튕기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났는데 어떤 의미로는 참 대단하긴 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으면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민수는 자신이 그의 착각까지 고쳐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쓸데없는 논쟁을 더는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무슨 착각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선배님이 수연 선배한테 관심이 있든 없든 수연 선배는 아닌 거 같은데요.

그러니 대기실에 사적으로 찾아오지 말고 하셨으면 오지 않으시는 게 예의고요.

또 사적으로 연락처를 달라고 하셨을 때 안 주셨으면 연락할 생각이 없으신 게 확실하네요.

그냥 튕기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요.”

“뭐? 이 자식이….”

“그리고 그 전에 호칭부터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이는 같아도 선배님보다 수연 선배가 몇 년이나 선배잖아요.

사적으로 그렇게 이름을 막 부르는 건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니까요.”

창민은 조목조목 말대꾸하는 민수의 모습에 울화통이 터졌다.

거기다 마치 수연은 전혀 관심이 없는데 자신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스토커처럼 취급하고 있었으니 그 화를 참기 힘들었다.

“야이~ 미친놈아. 너 지금 나한테 훈계하냐?

야! 너 지금 제정신이야?

이런 미친놈을 봤나.

하~ 네가 운 좋게 영화 두 편 찍고 옆에서 대단하다고 하니까 네가 뭐라도 된 거 같냐?

이 새끼야. 넌 그냥 신인 찌끄래기 일뿐이야.

어디 신인 배우 새끼가 선배한테 훈계 질이야?

네가 이러고도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 같아?”

창민이 거칠게 폭언을 퍼부었지만 민수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창민의 폭언을 묵묵하게 다 들은 민수는 주머니에서 조용히 조그마한 물건을 꺼내더니 창민의 눈앞에 흔들었다.

덤덤한 표정의 민수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자 한창 씩씩대던 창민의 눈도 자연스럽게 민수가 꺼낸 작은 물건 쪽으로 넘어갔다.

“….뭐야 그거.”

“당연히 녹음기죠. 선배님.

연예계 생활이란 게 참 녹녹하지 않더라고요.”

“뭐…뭐?”

“선배님의 생각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신경 꺼주세요.

선배님이 제 앞날을 걱정해주실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요.

만약 선배님이 계속 수연 선배 대기실을 찾아오면 전 이걸 그냥 언론사와 TD 쪽에 뿌릴 겁니다.

그러면 선배님은 후배에게 폭언을 뱉은 배우로 유명해지겠죠.

요즘 사람들이 저한테 참 관심이 많더라고요.

아마 벌떼같이 달려들지 않을까요?”

창민은 자신에게 녹음기를 들이대는 후배는 민수가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가 민수를 신인배우라고 조롱했지만 결국 자신도 이제 데뷔한 지 몇 년 차,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상대했던 신인 배우들은 어리숙해서 자신이 윽박지르면 알아서 굽혔으니 제대로 된 상대는 처음 만난 셈이었다.

“야… 그러고도 네가 무사할 거 같아? 그리고 드라마는?

드라마에도 타격이 갈 텐데.”

“뭐… 저도 조금 성가시긴 하겠죠.

피해도 받을 테고요.

그런데 상관없어요.

선배님이 저를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좀 미친놈이라서요.

한다면 진짜 하는 놈이거든요.

아마 저에 대해서 조금만 찾아봐도 바로 아셨을 텐데 조금 안타깝네요.

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수연 선배의 대기실에 찾아오면 바로 이거 뿌린다고요.

제가 진짜 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으시면 대기실 찾아와 보세요.

그런데 제가 진짜 이걸 뿌리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알기론 선배님 계약 조건에 이것저것 많이 붙었다고 하던데요.

인터넷에서 욕먹는 것보다 그게 더 치명적이지 않을까요?

TD가 계약에는 참 철저한 회사라 선배님도 진짜 피곤하실 텐데요.”

창민은 민수가 대수롭지 않게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드라마가 망치든 말든 언론사와 소속사에 뿌리겠다고 하자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이 정말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만약에 정말이면 자신의 타격이 더 컸다.

그러고 보니 저놈은 그냥 편당 200만 원 받고 들어온 조연 배우지만 자신은 주연급 조연이었다.

드라마를 망쳐도 자신이 더 손해였고 저게 소속사로 들어가면 자신은 추가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민수는 혼란스러운 창민을 남겨두고 혼자 조용히 수연의 대기실로 돌아갔고 창민은 그런 민수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한쪽에서 이 장면을 처음부터 지켜보는 남자가 있었다.

지은우는 민수와 창민이 구석으로 이동하자 무슨 일인가 싶어 몰래 따라왔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와…. 개 멋있네.”

은우는 선배들에게는 잘하지만 후배들에게는 개차반처럼 굴던 창민이 민수 앞에서 굴욕을 당하자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도 촬영 내내 창민에게 은근히 무시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우가 민수에게 멋있다고 느낀 것은 저런 녹음을 했다는 사실보다 민수라면 진짜 저걸 언론사에 뿌려버릴 거 같아서였다.

자신이라면 자신이 피해받는 것이 두려워 그러지 못할 텐데 자신의 소속사 선배를 위해 저렇게 막 내지르다니 진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사이다를 찾는구나.

이따 가면서 준성 사이다나 하나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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