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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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호. 그래서 그렇게 언니한테 한 방 먹었다고요?”
그날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민수는 드라마를 마치고 앞으로의 일정을 조율하고 있던 설아를 만나 촬영 중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장 주된 이야기는 민수가 수연에게 역공을 당한 이야기였는데, 설아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현장에 있었으면 되치기를 할 수도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수연 선배한테 당한 건 상관없는데 로맨스에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것은 조금 안타깝네요.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다음 작품을 선택할 때도 애로 사항이 있겠어요.”
“음…..”
민수의 걱정스러운 말에 덩달아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해 보던 설아는 탁자 위에 올려진 민수의 손등 위에 살며시 자신의 손을 포개어 올렸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손위로 느껴지는 포근함에 민수의 마음이 조금 편해질 때쯤 설아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민수에게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언니의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아요.
아마 오빠가 로맨스에 취약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오빠의 삶이 너무 각박해서가 아닐까 해요.
하지만 오빠도 조금씩 변하고 있잖아요.
솔직히 예전 같으면 수연 언니한테 그런 장난을 걸 수나 있었겠어요?
그때는 모든 일에 진지하기만 했으니 아마 그런 농담은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빠는 지금도 충분히 좋은 배우니까요.”
설아의 분석은 생각보다 더 날카로웠다.
민수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완전히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이유를 대략적으로는 파악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설아의 말대도 민수도 이곳에 와서 점점 변해가는 중이었다.
예전에 각박하고 딱딱한 민수에서 이제는 조금씩 농담도 하고 웃고 즐기는 민수로 말이다.
아마 근본적인 이유는 병으로 굳어 있던 민수의 마음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면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고 있어서이긴 하지만 항상 유쾌한 남매의 모습도 민수의 변화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네요. 저도 변하고 있으니까…..”
민수는 설아의 말에 가슴이 따듯해지는 기분이었다.
좋은 사람이라.
민수는 문득 회귀를 한 순간 보았던 “인연” 카드가 생각났다.
아무래도 자신이 뽑은 “인연”카드의 중심에는 이 윤 엔터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여자 역시.
하지만 이런 밝고 포근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푸근하게 웃으며 말하던 설아의 눈꼬리가 살짝 내려오며 조금 묘하고 촉촉한 눈빛으로 민수를 바라보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이상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아가 민수의 손등에 올려놓았던 손끝으로 손등을 살살 간질이기 시작하자 조금 야릇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오빠 곁에는 제가 있다는 거예요.
경.험.이 없어서 로맨스 연기가 안 된다면 그 경.험.을 저랑 하면 되는 거니까요.
오빠가 로맨스의 달인이 될 때까지 제가 항상 옆에 있을게요.
그.러.니.까. 혹여나 언니의 말처럼 사방에 웃음을 뿌리는 건 안 돼요.
웃음은 저한테만 아셨죠?”
설아에게서 느껴지는 매혹 지수(?)가 점점 올라가고 분위기가 조금 짙어지는 기분이 들어 민수는 헛기침을 내뱉으면서 설아가 만지고 있는 손을 슬쩍 다른 곳으로 옮겼다.
게다가 특정 단어를 강조하는 것이 조금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특히 한눈이라도 팔았다가는 왠지 큰일이 날 거 같았다.
“흠흠. 그건 그렇네요.”
설아는 민수가 슬쩍 손을 빼면서 다른 곳을 보며 헛기침을 하자 아직 이 남자에게는 로맨스가 한참 멀었구나 싶었다.
어쩌면 자신이 말하는 것이 멜로가 아니라 에로로 넘어가려고 해서 그런 것일까?
이 기회에 조금 더 밀어붙여 볼까 고민하던 설아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녀는 그렇게 말을 돌리면서 문득 예전에 자신의 바보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연애를 사냥에 비유하면서 민수는 들판에서 풀을 뜯는 초식동물이라는 이야기였다.
흉악한 신체 능력을 가진 주제에 초식동물이라고 하니 조금 웃기긴 하지만 코끼리나 코뿔소도 초식동물에 포함되니 그건 넘어가고, 연애에 있어서는 확실히 태준의 말대로 민수는 초식동물이 분명했다.
초식동물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집중력과 인내심이 필요했다.
슬슬 자연스럽게 상대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상대의 경계심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다가 한 번에 훅!
설아는 인내심과 집중력에는 누구보다 더 자신이 있었다.
“음, 그런데 촬영장에 개아들이 하나 있다고 하던데 별일 없었어요?
수연 언니가 엄청 짜증 난다고 했거든요.”
묘한 분위기에 조금 난감해하던 민수는 설아가 대화의 주제를 바꿔주자 옳다구나 싶었다.
그래서 속으로 자기도 모르게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쉰 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설아의 말을 받아넘겼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름 대신 개아들이라고 부르는 호칭이 참 인상 깊긴 했다.
“아. 설아 씨도 알고 계셨어요?”
태준에게는 비밀로 했으면 좋겠다던 수연이 설아에게는 이미 말했는지 그녀는 수연이 조금 귀찮은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설아에게도 태준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는 전제를 붙였을 것이다.
“네, 잘 알고 있었죠. 수연 언니한테도 들었고 혜민이도 그랬으니까요.”
“솔직히 드라마 일정이 빡빡하고 피곤한데 쓸데없는 일로 더 피곤한 격이에요.
그래서 저한테로 시선을 좀 돌리려고요.
그 사람이 수연 선배를 대하는 걸 보니 수연 선배 입장에서는 마땅히 해결책이 없어 보이더라고요.”
“음…… 어쩌시려고요?”
“좀 더 두고 보긴 할 건데 아마 제가 수연 선배 옆에 계속 붙어 있으면 조만간 사고를 치지 않을까요?
그걸 이용할 생각이에요.”
“흠,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참견은 안 할게요.
나중에 해결되면 그때 알려주세요. 저도 조금 궁금하니까요.”
“그래요. 그때 이야기해요.”
설아와 한창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 민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의 메일함을 열었는데 거기에 생각지도 못한 대용량 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왠지 중국에서 설아의 메일을 받을 때와 비슷한 크기의 파일이었다.
“응? 수정이잖아. 맨날 보는 녀석이 왜 이런 걸 보냈지?”
수정이 보낸 것은 문서 하나와 동영상 파일 하나였다.
그리고 동영상에는 익숙한 배경에서 민수가 설아를 업고 길을 걷고 있었다.
“와….. 이게 찍혔어? 그러고 보니…..”
민수는 서둘러 문서 파일을 열었다.
[민수형 보세요.
형이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전 예전에 형이 7명에게 달려드는 영상을 블로그에 올렸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설명했던 대로 전 항상 그 시간에 창밖으로 집 주변을 촬영하는 것이 취미고요.
그래서 민수 형의 그 긴박한 순간도 촬영할 수 있었지요.
며칠 전 전 평소처럼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익숙한 실루엣의 두 남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네. 짐작하신 대로 그건 민수 형하고 윤설아 씨였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이 영상을 촬영하게 되었고 이 영상을 형에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걱정은 마세요.
이 영상을 보낸 직후에 원본은 바로 삭제했으니까요.
전 [민수네]의 일원으로서 형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다른 곳에 발설할 생각도 전혀 없고 영상을 유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물론 형이랑 초상권 침해로 경찰서에서 대면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요.
그건 좀 무섭잖아요.
물론 저도 사람인지라 민수 형이랑 설아 씨의 관계가 어떤지 궁금하긴 하지만 마음속으로 묻어 두겠습니다.
각설하고 제가 이 영상을 가슴 속에 묻어둬도 되는데 굳이 형에게 보내 달라고 요청한 것은 화면 속에 두 남녀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상을 그냥 지우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에 형에게 보내게 된 것이니 잘 보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더 좋은 연기를 보여주시기를 바랄게요.
그리고 예쁜 사랑 하시고요.]
이 사람은 예전에 자신의 영상을 블로그에 올려서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여론을 바꾼 그 사람인데 아마 자신과 설아가 지나가는 걸 우연히 발견하고 촬영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땅히 자신과 직접 연락을 할 방법이 없으니 팬클럽 회장인 수정을 통해 전달하게 된 것이고.
이 사람이 [민수네]의 회원이라고 하니 수정에게 연락하는 것은 간단했을 것이다.
“하…하하.”
민수는 영상을 다시 확인하며 난처한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한국의 네티즌은 어디에도 있다고 하더니 이 장면이 찍혔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니 사실 이 남자가 블로그에 항상 그 시간에 주변을 살펴본다는 말을 했음에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자신의 부주의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수에게도 핑계 댈 말은 있었다.
그때 그 분위기에서 그런 걸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말이다.
차라리 그냥 시간이 우연히 겹쳐서 발생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어쨌든 원인을 떠나서 이건 결국 자신의 잘못이었다.
항상 자신이 태준을 보며 부주의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그것보다 더 심한 셈이었다.
이건 빼도 박도 못 하고 스캔들이 날 만한 영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업고 가는 영상이라도 의심을 살 텐데 이 영상 속에 자신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었던 어떤 표정보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이건 누가 봐도 그냥 사랑에 빠진 남자였다.
아마 자신이 이 정도로 연기할 수 있다면 자신도 로맨스의 달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아름다운 영상이라서 지우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자신의 등 뒤에 업혀서 자신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는 설아의 표정, 그리고 자신의 표정과 움직임이 그야말로 한 폭에 담긴 그림 같았기 때문이다.
“참 고마운 사람이네….
이걸 찍은 사람이 그나마 내 팬이라서 망정이지…… 아니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진 진짜 팬이라서 망정이지 참….”
예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글도 그렇고 이 글도 그렇고 이 사람은 확실히 자신의 팬이 맞는 모양이다.
어쨌든 우연이라도 자신의 약점을 잡은 셈인데 그걸 자신에게 보내고 바로 지웠다고 하니 참 고마웠다.
아니, 자신의 약점이라기보다는 설아의 약점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만약 스캔들이 난다면 이제 날개를 펴기 시작한 설아에게 더 치명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설아 씨까지 걸린 문제였는데 정말 다행이야.
이 사람에게 어떻게든 꼭 보상하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
이건 나중에 수정이한테 물어봐야겠네.”
민수는 남자에게 어떻게든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처음 볼 때는 몰랐는데 다시 한번 읽어 보니 미묘하게 앞뒤가 안 맞는 구절이 있어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말이야.
궁금하지만 가슴에 묻겠다면서 예쁜 사랑 하라니 이미 나의 연애를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아니, 이게 그렇게 티가 나나?”
누구한테 물어봐도 뻔한 것이지만 괜히 멋쩍은 기분에 투덜거린 민수는 영상을 바로 설아에게 전송했다.
설아도 아마 이 영상을 확인하면 예쁜 영상이라고 많이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민수는 지금 이미 설아가 수정에게 이 영상을 받아서 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잠시 후 영상을 전송한 민수는 다시 한번 영상 속의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참 신기하고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내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다니……”
아마 민수는 이런 기회가 없었으면 자신이 설아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설아의 말대로 설아랑 계속 만나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로맨스 고수가 되어 있지 않을까?
민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영상 속 두 남녀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다음 날 촬영장에서도 민수는 수연과 대기실을 같이 쓰고 있었다.
그리고 수연의 옆에 민수와 혜민이가 찰떡같이 붙어 있자 창민은 이 상황이 못마땅한지 민수를 노려보고는 그냥 자신의 대기실로 돌아갔다.
민수의 방어가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 셈이었다.
민수의 촬영 기간 자체는 그렇게 길지 않지만 아마 이 기간에는 이런 양상이 계속될 텐데 창민이 그 시간을 참아 낼 수 있을까?
민수는 그렇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태준의 말을 들어보면 이 사람은 참을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조간만 무슨 행동이 들어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