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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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과 촬영하는 장면이 끝나고 바로 창민과도 같은 장소에서 촬영이 이어졌다.
드라마상으로는 하루 전날.
준호까지 한국에 입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호가 준호의 마음을 떠보면서 경거망동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장면이었다.
정호는 준호가 차린 레스토랑에 들어와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혀를 차며 비웃음을 날렸다.
“참 차려놓은 꼬락서니 하고는……”
주방에 있던 준호는 정호를 발견하고는 실없이 웃으며 다가와 인사를 건네었다.
“아, 형님이세요?”
정호는 준호의 말에 대번 인상부터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멸시하는 듯한 차가운 눈으로 준호를 노려보았다.
“형님은 누가 형님이야?”
“아….. 죄송합니다. 도련님.
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
“흥. 우리 아버지 병실에 웬 더러운 여자가 있던데……
그 여자부터 당장 치워.
대체 뭘 주워 먹으려고 한국까지 기어들어 온 거야?”
“아….. 어머니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정호를 보며 준호는 난처하게 웃으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정호는 그런 준호를 보며 짜증이 잔뜩 올라온 얼굴로 나지막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너희한테 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괜히 허파에 바람이 들어서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면 너희 모자의 알량한 몸뚱이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거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정호의 섬찟한 경고에도 준호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냥 난처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에이…. 제가 무슨 그런 깜냥이나 되나요?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회장님이 뵙고 싶다고 해서 온 거뿐이에요.
회장님 돌아가시면 다시 미국으로 들어갈 거고요.”
정호는 그런 준호를 계속 유심히 관찰했다.
뱀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준호를 계속 훑어보는 것이 자못 소름 끼칠 정도였다.
“너, 혹시 아버지한테 뭐 받은 거 없어?”
“네? 뭘요?”
정호는 차가운 눈으로 준호의 표정 변화를 살폈지만 준호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어리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호는 그런 준호를 잠시 살펴보다가 이내 핏 하고 비웃음을 날렸다.
“그래. 이런 놈한테 뭘 줬겠어? 어차피 정처 소생도 아니고…..”
정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도 못했는지 준호는 정호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저…. 도련님. 혹시 회장님은 좀 어떠신가요? 전혀 차도가 없는 건가요?
그래도 아드님이시잖아요. 자주 찾아뵙고…..”
“뭐? 네놈은 신경 꺼라.
의사들이 그렇게 달라붙어 있는데 어련히 괜찮아지시겠지.
내가 거기 가서 뭘 해?”
차갑게 타박하던 정호는 마지막으로 경고의 한마디만 남기고 바로 준호의 레스토랑을 박차고 나갔다.
이런 작고 더러운 곳에 더는 있고 싶지 않다는 듯 그의 움직임은 거칠고 신속했다.
“그래. 그렇게 얌전히 찌그러져 있다가 조용히 꺼져.
그게 널 위한 일이니까.”
민수는 정호가 떠난 이후 혼자 남은 준호의 장면을 하나 더 촬영해야 했다.
정호가 떠난 후 혼자 남은 준호는 피식하고 웃더니 밖으로 나와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셰프에게 담배라니, 물론 말도 안 되는 조합이었지만 준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풋…. 우리 영감탱이 참….. 자식 농사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도대체 어떻게 키우면 수박을 심었는데 열린 건 호박이야?
욕심은 넘치는데 능력은 안 되고, 그러니 남의 것을 빼앗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지.
거기다가 사람 보는 눈은 순 엉터리고, 제 속마음조차 감출 줄 모르니…..
저런 놈이 총수가 되면 대원 그룹도 참 볼만은 하겠어.”
정호의 얼굴에는 조소와 경멸이 가득 차 있었다.
조금 전에 실실 웃던 얼빠진 인물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차갑게 변한 정호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났을 때 자신에게 남긴 아버지의 단 한 가지 부탁을 떠올리고는 이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 영감탱이 진짜.
받은 건 없지만 낳은 정은 있으니 내가 지켜보기는 할게.
그런데 이미 한 놈은 아웃이네?
첫째 놈은 냉혈한이니 당연히 안 오겠고….. 둘째 놈은 머저리라서 와서 병신 짓만 하고 갔고……
이제 남은 건 딸내미 하나뿐인데….. 그래도 이 누나는 믿을 만하려나……
영감탱이, 만약 딸내미까지 그 모양으로 키웠으면 난 그냥 이거 들고 “정주그룹”(한성호, 한정호의 외가)으로 가버릴 거야.
자기가 뿌린 씨앗이니 결국 자기가 책임을 져야지.
안 그래?”
이제는 경멸과 조소조차 사라진 준호의 얼굴은 어느새 얼음장같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에 주변조차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촬영을 마치고 시작된 휴식시간.
촬영장 곳곳에서는 오늘 촬영된 장면들에 대한 이야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정민수 씨도 장난 아니네.
실실 웃을 때랑 딱 정색하면서 표정 굳을 때 갭이 엄청나.
솔직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었다니까.”
“말이 액션 배우지. 그래도 할리우드 개봉작에 주연 배우야.
저 정도야 당연하지.”
“덕분에 작가님이 만든 캐릭터가 잘살긴 하겠네.”
“솔직히 정민수 씨는 그냥 막대기처럼 서 있기만 해도 효과가 엄청날걸.
아마 지금쯤이면 사방에 홍보자료 뿌리고 있을 거야.
할리우드 영화 촬영 후 첫 작품이 “로열”이라고 말이야.
사람들도 엄청나게 기대를 할거고, 시청률도 덩달아 올라가겠지.
한번 두고 봐. 어떻게 되나.”
한편 수연의 대기실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민수는 조금 전 창민이 보여줬던 연기에 대하여 감탄하고 있었다.
“창민 선배가 이번 연기는 의외로 좋던데요.”
민수의 말에도 수연은 시큰둥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아. 그거?
원래 그놈이 남 무시하고 멸시하고 그런 연기는 잘하거든.
원래 생활이 그래서 그런지, 그때만큼은 태준이 뺨치더라고.
이건 뭐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
민수는 수연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다른 연기보다 슬픈 연기와 절망스러운 연기에 더 능숙하다는 것을 떠올리며 창민도 그런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작가와 피디의 섭외 능력이 놀라웠다.
이번 배역인 안하무인 정호는 대부분 남을 멸시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드라마를 찍고 창민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더 짜증 나.
그놈은 분명히 연기를 잘 못 하는 놈인데 이번 배역은 기똥차단 말이야.
아우….진짜.”
수연의 말에 민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쩐지 평소보다 더 평가가 박하다 했더니 아무래도 미운 놈이 배역은 또 잘 소화하고 있었고 게다가 어쩌면 연기력까지 더 높게 평가될 거 같아서 더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선배. 나쁠 건 없잖아요.
이번 드라마에서는 평소보다 더 선전해준다는 뜻인데 그러면 드라마는 더 잘될 테니 좋게 생각하세요.
어쨌든 지금은 한배를 탄 사이니까요.”
“후…. 알긴 아는데.
그게 생각처럼 잘 안 되네.
내가 밴댕이 소갈딱지라서 그런가 봐.”
호불호가 분명한 편인 수연이다 보니 드라마와 상관없이 싫은 건 싫은 거였다.
민수는 도대체 평소 행실이 어땠길래 수연이 저렇게 학을 떼는지 이제는 점점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식사를 하는데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양반은 못 되는지 창민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수연 옆에서 식사를 하는 민수를 보고는 인상을 쓰면서 수연의 맞은편에 몸을 걸쳤다.
정말 친한 사이라면 몰라도 저렇게 남의 대기실에 들어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자리를 잡다니 민수는 예의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자연스럽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야? 넌 왜 여기 있어?
여배우 대기실에 함부로 들어와서 이렇게 죽치고 있어도 되는 거야?”
내로남불이라더니 민수는 자신의 행동은 생각지도 않고 남을 탓하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수연 선배는 소속사 선배이기도 하고 사적으로 친하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선배님은 어쩐 일이세요? 남의 대기실에 말도 없이.”
“아~ 너도 내 후배였어? 요즘 윤 엔터가 잘나가나 보네.
나 있을 때만 해도 별거 없었는데.”
자신이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 없이 창민은 민수를 보며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민수는 왠지 거만하게 행동하는 창민을 보며 그의 말속에 들어있는 오류를 지적해 주었다.
별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고 따질 건 따지자는 생각이었다.
“너도 가 아니라 저만이죠.
수연 선배는 선배보다 훨씬 빨리 소속사에 계셨으니까요.
선배님이 계실 때는 잠시 딴 곳에 계셨던 거고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창민을 보니 전혀 모르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잠시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이 자신이 예전에 수연에게 거들먹거린 것이 부끄럽긴 한 모양이었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갔으면 예전 건 쫑이지 무슨…..”
“그러게요. 나가면 쫑이죠.
그래서 선배님이 제 소속사 선배님이 아닌 거처럼요.”
멋쩍어서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 때문에 궁지에 몰리자 창민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민수는 창민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웃으며 수연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창민은 민수와 수연이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들 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잠시 민수를 노려보더니 거칠게 일어나 대기실 밖으로 사라졌다.
민수는 그런 창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연에게 물었다.
“저렇게 계속 허락 없이 들어오는 거예요?”
도대체 허락 없이 여배우의 대기실을 들어오다니 저쪽 매니저는 뭐 하는 놈인가 싶었다.
그리고 그전에 수연의 매니저는 또 뭐 하는 건가.
이런 건 소속사에서 조치해야 할 사항이었다.
만약 윤 대표가 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윤 대표도 예전의 점잖기만 한 윤 대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매니저는 뭐 하는 거예요?”
수연은 민수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민수의 말 속에서 왜 소속사에 알리지 않았느냐는 항의가 들어있다는 것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맞는데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내가 바보라서 그냥 참고만 있었겠니?
저놈의 행태가 옳진 않지만, 솔직히 뭘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같이 연기하는 동료로서 대화를 하려고 했다고 하면 그냥 나만 이상한 년이 되는 거야.
다른 곳도 아니고 그냥 배우의 대기실일 뿐이잖아.
그걸 아니까 저놈도 저렇게 막 행동하는 거고.
저놈의 행실이 엉망이라 스태프들이 완전히 내 편이라면 몰라도 저놈 저래도 스태프들한테는 꽤 잘하거든.
이래저래 짜증 나는 놈이야.”
민수가 생각하기에 배우의 인성 질에는 총 삼단계가 있었다.
첫 단계는 외부에 표출하지 않고 자신의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 같이 측근들에게만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였다.
대부분 인성이 안 좋은 배우들이 이 수준에 머물고 있고, 그래서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소속사 측에서도 차라리 이러면 관리하기가 편하기 때문에 그냥 묵인하는 편이었고 그냥 매니저만 죽어 나가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외부에 알리기 곤란한 동료나 후배 배우들한테까지 미묘하게 인성 질을 하는 경우였다.
이 경우에는 가끔 큰 사고가 터지기도 하지만 웬만한 배우들은 그냥 똥 밟았다 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성질을 부리는 것이 선배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좁은 바닥에서 굳이 선배에게 대들어 봤자 더 피곤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성깔이 못된 놈일수록 스태프나 다른 관계자들한테는 싹싹한 경우가 많았으니 괜히 문제를 만들어 봤자 자기만 손해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스태프들한테까지 인성 질을 하는 경우였다.
이 경우는 정말 드문데 배우가 대체 불가인 슈퍼스타이거나 아니면 그 이상으로 엄청난 빽을 가진 경우에나 그런 짓을 한다고 보면 된다.
다만 아무리 슈퍼스타라도 달이 차면 기울기 마련이고 대부분 자신이 부린 인성 질에 대한 대가를 나중에라도 치르곤 했다.
여기서 문제는 두 번째였는데 아무래도 창민도 이 두 번째에 속한 모양이었다.
교묘하게 동료 배우에게 성가시게 구는 건데 정말 수연에게 관심이 있어서 접근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유일한 여배우라서 만만하게 생각하고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성가시긴 했다.
수연의 말대로 만약 수연이 강경하게 대응하게 되면 저놈이 교묘하게 스태프들을 선동할 것이 불 보듯이 뻔했다.
“흠…. 어이가 없긴 하네요.”
여자관계도 안 좋고 심지어 인성까지 더러운 배우가 수연을 귀찮게 한다라.
민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