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89화 (189/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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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말은 안 했지만 태준도 민수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배우들은 정말 섬세한 동물이었고, 배역에 들어가기 전에 그 캐릭터를 분석하고 몰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캐릭터 분석이 완벽하지 않으면 자신의 연기가 만족스럽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면 자신의 가치도 당연히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처럼 갑작스럽게 남에게 맞춰진 배역을 부탁하면 난처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연 배우로 두 편의 영화를 찍은 민수에게 주조연도 아니고 비중이 있다고는 하지만 도중에 잠깐 출연하는 배역을 부탁한 것이었다.

한번 주연을 놓치면 바로 급이 떨어지게 된 거로 생각하는 배우들의 세상에서는 참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태준도 자신이 스케줄만 아니었다면 수연을 위해 그래 줄 수 있었다.

수연과 알고 지내온 시간이 적지 않았고 개인적인 관계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민수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태준이 민수에게 고마운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민수가 자신들과 보낸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음에도 자신들을 정말 위해준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민수는 이번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았다.

우선 이 배역이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조금 입체적으로 이중인격 같은 배역이지만 등장하는 씬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맨스도 아니었다.

그리고 문제는 바로 급이라는 거였는데 민수는 기본적으로 급이라는 것에 무감각했다.

어차피 연기를 잘하면 어떻게든 써 줄 것이고, 그것이 단역이라도 민수 자신의 마음에 든다면 얼마든지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건 자신이 전생의 태준 같은 위치에 오른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태준의 생각처럼 민수가 소속사 식구들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은 맞았다.

민수도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배려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연도 분명 그 울타리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결정을 내린 민수는 바로 윤 대표를 찾아가서 “로열”에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윤 대표는 민수의 말을 듣고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지금 당장 CP가 군소리 없이 받아들일 만한 배우는 태준과 민수 정도였는데 태준이 시사회 스케줄로 한동안 짬을 낼 수 없었으니 남은 건 민수뿐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거지 같고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몰려오지만 그렇다고 여덟 편의나 넘게 찍은 드라마에서 발을 뺄 수도 없었으니 가능하면 빨리 촬영을 마무리 짓는 것이 나았다.

게다가 이번 배역이 짧고 임팩트가 있었으니 민수에게도 손해는 아니었다.

물론 민수가 찍은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개봉한다는 사실 때문에 민수의 급이 완전히 올라갔지만 그래도 개봉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그전에 한 번 더 연기를 선보이는 것은 의미가 있었다.

“쉬운 선택이 아니었을 텐데 고맙구나.”

“에이, 대표님까지 그러세요?

그리고 저한테도 좋은 일이잖아요.

이번에 찍은 영화가 개봉이 3월이나 4월이고, 그전까지는 또 저번처럼 이상한 요청만 올 거 같아서요.

막상 영화를 찍긴 했는데 개봉이 이렇게나 늦으니 이게 도움이 되는 건지, 후…..”

민수가 저번에 한동안 원하지 않는 액션 배역만 계속 들어오는 바람에 처음부터 오디션을 볼 생각까지 했던 기억이 나서 쓴웃음을 짓자 윤 대표는 헛웃음을 지으며 민수를 바라보았다.

“허…..

넌 진짜 너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나.

네가 자신의 이름은 절대 검색해 보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거 참…..

우선 지금도 섭외는 엄청나게 들어오고 있어.

다만 네가 올해 말까지는 쉬고 싶다고 해서 전해 주지 않았다.

2월부터 들어가는 드라마도 있고, 영화도 있는데……

하지만 이게 당장 너의 인기에 편승하겠다는 의도가 짙어 보여서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거 같더구나.

그리고 네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는거 같아서 비교를 좀 하자면 지금 너의 위치는 태준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영화 한 편으로 태준이의 5년 경력을 한 번에 따라잡은 셈이지.

네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할리우드에 개봉한다는 건 그런 의미란다.

단순하게 영화를 한 편 찍은 것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

“그냥 중국 영화 한 편을 찍었을 뿐인데요. 흠…..”

인식의 차이 때문일까?

윤 대표의 말을 들은 민수는 자신이 생각한 자신의 가치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가치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까 수연이 엄청나게 미안해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었나 보다.

태준과 동급으로 생각할 정도라니 솔직히 이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중국에서 촬영하면서 그냥 중국 영화라고 생각했던 그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개봉한다는 사실 만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모양이다.

하지만 민수가 생각하기엔 이건 그저 거품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명성이 올라가 있는 지금, 더 괜찮은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사실 오랫동안 액션 연기만 해서인지 조금 다른 연기를 해보고 싶기도 했다.

다른 연기를 하면서 수연과 혜민을 도와줄 수도 있으니 어쨌든 일거양득이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CP가 절 거부할 우려가 더 낮아졌으니까요.

어쨌든 이번 건 꼭 하고 싶으니까요.

혜민이가 연기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

그럼 바로 연락을 넣어 놓으마.

네가 한다고 하는데도 그런 똥배짱을 부리진 못하겠지.”

윤 대표는 민수가 출연 의사를 비추자 정말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정말 앞으로 당분간은 SBC 드라마국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다음 날.

바로 민수의 오디션 겸 미팅이 SBC에서 이루어졌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민수가 오디션을 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CP의 행태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미팅 장소에 들어가기도 전에 피디가 방송국 앞에서부터 민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피디 입장에서는 조급함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 드라마의 피디 최수철은 아직 대작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성격이 무던하고 모난 구석이 없는 평범한 피디라고 한다.

성정이 강하지도 못한 피디가 졸지에 CP와 국장 사이에 끼어서 새우등이 터지고 있었으니 한편으로는 조금 딱하기도 했다.

“오….. 민수 씨.

반가워요. “로열”의 피디 최수철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민수는 입구에서부터 자신을 과하게 반기는 피디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이분도 급하긴 한 거 같았다.

“네. 피디님. 정민수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부탁은 제가 드려야죠.

CP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가시죠.”

피디 최수철은 민수를 데리고 가면서 조금 조심스럽게 상황이 좋지 않음을 설명했다.

이런 것은 방송국의 치부와 같은 일이라 원래 숨기는 것이 정상이지만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고 민수도 알고 온 것이 분명했으니 괜히 감춘다고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민수는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수철이 차라리 믿을 만해 보였다.

그리고 CP야 어차피 촬영 중에 볼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피디 성격이 이렇게 무던하다면 촬영 자체는 별문제 없어 보이기도 했다.

수철이 민수를 데리고 간 회의실에는 작가와 CP만 민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살얼음이 낀 것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작가는 기본적으로 프리랜서였고 자신의 드라마에 재를 뿌리는 CP가 엄청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정민수입니다.”

민수가 회의실에 들어와 인사를 건네자 작가의 표정은 한껏 밝아졌다.

민수를 보고 조금 얼굴을 구기는 CP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네. 정민수 씨.

한준호 역할을 맡으시겠다고요?”

“네.”

다시 한번 민수의 의사를 확인한 CP는 잠시 민수를 이상한 놈 보듯이 보더니 인상을 쓰면서 기본적인 연기 몇 가지를 보고 싶다고 했다.

민수는 작가의 원하는 장면을 선택해서 대본 속 준호의 여러 가지 대사를 CP 앞에서 선보였다.

그런 민수의 연기를 유심히 바라보던 CP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좋은 연기 부탁드리죠.”

CP가 별다른 말 없이 민수를 받아 드리자 작가와 피디는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작가는 평소에 온갖 불평을 내뱉던 CP가 입을 다무는 것을 보고 스타가 가진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마 오늘도 연기는 잘하지만 이름이 없는 신인 배우를 데리고 왔으면 저 CP가 저렇게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불청객같이 자리를 잡고 있던 CP가 나가버리자 분위기가 한껏 밝아졌다.

작가는 민수에게 바로 자신이 생각했던 한준호에 대하여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민수는 작가의 설명을 들으며 자신이 생각했던 한준호와 작가가 원하는 한준호 사이에 차이점과 공통점을 확인하면서 그 둘을 서서히 동일화시켰다.

“준호가 셰프라서 그런지 요리 장면도 있네요?”

“아. 사실 박정우 씨가 요리를 잘해요.

그 장면은 사실 박정우 씨 때문에 넣은 장면인데 굳이 없어도 되는 장면이긴 하죠.

만약 민수 씨가 부담스러우면 그 장면은 빼도록 할게요.”

“음….. 아니에요.

맛은 상관없는 거잖아요?

중요한 것은 보이는 부분이니까요.

제가 손이 좀 빨라서 보이는 장면은 화려하게 잘 꾸며낼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도 요리는 좀 배웠거든요.

칼질이나 그런 건 봐줄 만하게 할 수 있어요.”

“오…..”

작가는 민수가 요리까지 할 줄 안다고 하자 정말 하늘이 내린 대타(?)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를 구상할 때부터 이수연이 그렇게 눈에 들어오더니 본인의 연기를 잘하는 건 기본이요, 이렇게 위기 시에는 대타까지 엄청난 배우로 데리고 왔다.

처음에 아역 때문에 고생할 때는 엄청 귀엽고 연기까지 잘하는 혜민이를 데리고 오더니 이제는 정민수까지.

작가는 이수연의 능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정민수가 자기네 드라마에 뭐 먹을 게 있다고 스스로 왔을 리가 없으니 분명 이수연이 부탁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수연은 엄청난 복덩이였다.

만약 이 드라마가 크게 히트를 친다면 조금 과장하면 정말 반 정도는 이수연 몫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민수가 작가와 함께 배역에 대하여 토론을 하는 사이 CP는 회의실을 나서서 자신의 작업실로 돌아갔다.

CP는 지금 엄청나게 짜증이 난 상황이었다.

“미친.

진짜 정민수를 데리고 왔네.

저놈이 제정신이 아닌 거야? 아니면 소속사가 미친 거야?

한창 잘나가는 새끼가 여기서 뭐 얻어먹을게 있다고 기웃거려?

할리우드 주연까지 한 놈이 여기서 편당 200만 원 받고 드라마를 찍겠다고?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구먼.”

CP는 처음에 피디가 윤태준이나 정민수의 이름을 거론할 때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싶었다.

이수연이 부탁해 본다는데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게다가 드라마에 그들을 쓰려면 최소한 편당 3천은 줘야 할 텐데 비중이 좀 있다고 해도 몇 편만 나오는 역할에 그 돈을 쓰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아니 그전에 그것도 그들이 한다고 할 때나 가능한 말이지 그들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배역을 맡는단 말인가.

아마 자신이 하도 압박을 하니까 그냥 막 지르고 있나 본데 정말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드라마는 이미 8회까지 제작이 되었고 그러니 적어도 한 달은 여유가 있었다.

적당히 줄다리기하면 분명 상대가 먼저 나가 떨어질 테니 그때 못 이기는 척 상대의 중재안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자신도 드라마가 완전히 망가지면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정민수를 떡 하니 데리고 왔다.

그것도 편당 200만 원에.

CP는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싶었다.

정민수가 무슨 생각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완전히 터 버렸다.

저 배우를 거절할 수는 없으니 결국 드라마는 재개.

이렇게 되면 드라마가 잘되든 안되든 자기에게는 별로 좋지 않았다.

자신이 태클을 걸고 들어간 이상 드라마가 잘 돼도 자신의 공이 아니라 국장의 공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서둘러 수습하는 것이 옳았다.

그랬으면 드라마를 살린 공을 인정받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실책을 범한 상대가 공까지 먹게 된다니, 자신의 판단 미스가 참으로 뼈아프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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