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4
“하….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지금 국장 쪽이랑 CP 쪽이랑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거 같아.
사실 국장이 이번에 바뀌었는데 젊은 국장이 지금 CP랑 입사 연차가 같아.
그 뒤에 무슨 악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건 확실한 거 같아.
그리고 이번에 박정우가 들어온 건 결국 국장 쪽에서 만든 일이니 CP가 물고 늘어지는 거야.
배우들은 잘 모르고 있던 일이었는데 PD나 AD는 다 알고 있던 모양이더라고.
어쩌면 CP는 이번 드라마가 잘 안 돼서 자신과 국장이 동시에 책임을 지는 걸 원하고 있을 거라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대체.”
“어처구니가 없네. 그건.
자폭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결국 지가 다 책임질 일인데.”
“더 어이가 없는 건 지금 피디님도 사실 국장님 라인이라네.
그러니 저 CP가 더 미쳐 날뛰는 거겠지.”
“배우들 소속사에서는 가만히 있어요? 언니만 주연인 건 아니잖아요?”
“물론 그쪽에서도 방방 뛰고 있지.
솔직히 다들 박정우가 들어오는 거 반대했으니까.
아마 그래서 CP가 더 기가 살아서 저러나 싶기도 해.
다 반대하는 일을 국장이 밀어붙였고, 결국 사고가 터졌으니 국장이 먼저 손을 들 거로 생각하는 거지.”
“가지가지네 진짜. 그런데 직급도 국장님이 높고 인사권도 국장님이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
CP가 그렇게 개길 수가 있는 거예요?”
“원래 정상적이라면 그렇겠지만 수연이 말을 들어보니 그런 건 아닌가 본데.
입사 년 차가 같다면 지금 CP도 국장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일 테고, 아마 그 아래 따르는 PD들도 많지 않을까?
그런데 자기 말 안 듣는다고 징계라도 날렸다가는 그쪽 사람들이 다 들고일어날 수도 있을 거야.”
“요는…. 결국 아직 신임 국장이 드라마국에 대한 지배권이 CP보다 약하다?”
“그런 거겠지. 아니면 CP가 그렇게 설칠 수가 없을 테니까.”
“지금 들리는 말은 국장님도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나 봐.
그리고 국장이 물고 오는 배우들은 다 CP가 여러 가지 이유로 퇴짜를 놓는 중이고.”
“진짜 개도 웃을 일이네요.
CP가 드라마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고 있다니.
소속사들도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수연은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윤 대표도 방방 뛰는 중이었다.
윤 대표는 박정우가 마뜩잖긴 했지만 그래도 굳이 넣고 싶다면 하니까 막지는 않았다.
사생활은 엉망이지만 배우로서는 충분히 능력 있는 배우였기 때문이다.
윤 대표가 분노하고 있는 것은 사건이 터진 후에 방송국의 후속 조치가 엉망이라는 점이었다.
도대체 드라마를 찍을 생각이 있는 건지 상대가 배짱을 너무 부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촬영된 촬영분이 대충 8화 정도였고 그렇기 때문에 한 달 정도는 더 시간을 끌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서로 힘 싸움만 하는 모양새가 배알이 꼴릴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윤 대표와 윤 엔터도 하루가 멀다 하고 항의 전화를 하는 상황이었다.
윤 대표는 자신이 방송국에 따로 압박을 넣을 방법이 없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SBC 드라마국이 윤 대표의 원한을 단단히 사는 중이었다.
“어쨌든 지금 그래서 결국 각 배우 소속사에서 배우들을 추리고 있는데 배역이 좀 어려운 데다가 애초에 박정우가 매력적으로 보일 요소를 많이 넣은 상황이야.
물론 사소한 설정 정도는 바꿀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박정우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드라마 분위기가 죽을 가능성이 크거든.
그래서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어.”
수연이 사정을 설명하는 사이에 민수는 대본을 슥슥 훑어보고 있었다.
과연 작가가 나름 신경 써서 만든 배역이 분명해 보였다.
“에…. “한준호”….. 이거 직업이 셰프네요. 요리하는 장면도 있고요.
인물이 조금 이중인격 같은 모습도 보이고……
인물 자체는 충분히 매력적이에요.
작가님이 신경 좀 쓰셨네요.”
“맞아. 그래서 더 문제지.
저 외모에 그런 연기를 해줄 신인을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일 테고 설정상 나이도 어린 편이야.
나를 누나라고 불러야 하니까.
알다시피 나이 어린 애를 나이 많게 꾸미기는 쉽지만 나이 많은 사람을 어리게 만드는 건 더 어렵잖아.
그래서 더 찾기 어려운 거고.
대충 배역의 매력을 죽이면 아무 배우나 쓸 수도 있는데 피디나 작가 입장에서 그런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아.
솔직히 배우들도 저 배역이 있는 그대로 나와서 드라마의 인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고.”
“솔직히 언니한테 누나라고 부르려면 20대 초, 중반이 가장 적당하겠네요.
언니가 또 워낙 동안이라.”
“수연이가 원체 동안이긴 하지.
그래도 이번에는 화장으로 좀 더 들어 보이게 꾸몄더라.
난 그게 불만이긴 한데 배역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수연이는 화장 안 하는 게 제일 예쁜데 말이야.”
드라마 1, 2화를 감상한 태준은 드라마에 나온 수연보다 실제 수연이 더 예쁘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었고 그런 태준을 설아가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이 바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수연은 그래도 태준의 말에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잔뜩 쓰고 있던 인상이 조금 풀리고 있었다.
아마 태준이 저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도 수연이 너무 열을 내고 있어서 일 것이다.
“OK 좋아요.
제가 해 볼게요. 이거 윤 대표님도 아시는 거죠?”
“어. 당연히 말씀드렸지.
네가 하겠다고 하면 해도 된다고 하셨어.
와… 진짜….. 민수 땡큐!
내가 진짜 너한테 이런 부탁 해서 정말 미안하고 면목이 없는데 다른 방법이 없었어.
내가 이 은혜 진짜 잊지 않을게.”
수연은 민수에게 정말 면목이 없었다.
민수가 이런 부분에는 무던하고 성격이 원만해서 그렇지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한 배우였으면 아마 수연에게 좋은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수연은 진심으로 지금 민수가 이런 대타를 뛰기에는 급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태준도 물론 급이 엄청나게 높았지만 자기의 애인이니까 자신이 애교를 부리면 결국 원하는 대로 해줄 것이 분명했지만 민수는 친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마 윤 대표의 생각도 자기 생각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민수에게 적극적으로 해보라고 권유하지도 못하고 자신이 인정에 호소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민수가 흔쾌히 받아줬다.
수연은 그런 민수를 보며 머릿속으로 민수와의 친분을 한 단계 상향 조정했다.
친한 동생에서 배우로서 자존심보다도 가치 있는 동생으로 말이다.
촬영이 중단될 위기에 짜증이 잔뜩 났던 윤 대표는 수연이 민수가 이 배역을 맡아도 되냐고 물었을 때 민수가 허락만 한다면 이 배역을 맡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수연과 혜민이가 들어가서 신경 쓰이는 드라마가 별문제 없이 다시 촬영할 수 있을 테고 액션 배우로만 자리 잡은 민수도 다양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짧고 굵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수의 연기력으로 드라마의 위치를 한 단계 올려 줄 수도 있었다.
다만 문제는 무려 주연을 두 번이나 연기한 배우가 남의 자리에 대타로, 그것도 주조연도 아니라 애매한 배역에 들어가는 일이라 배우로서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고, 민정우가 거의 거저나 마찬가지로 드라마에 들어왔기 때문에 민수도 금전으로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민수가 금전적인 부분에 집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개런티는 자존심인데 첫 드라마에서도 거의 대우를 받지 못한 민수가 지금의 위치에서 그 대우를 받으며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수연이 민수에게 이야기해 보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는 않았다.
그나마 인정에 호소하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민수라면 대본이 괜찮기 때문에 무난히 승낙할 가능성도 컸다.
“에이~ 이게 무슨 은혜에요.
그냥 지금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 상관없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촬영은 다음 주 라고요?
그전에 피디님이랑 작가님부터 만나야겠네요.”
“그전에 CP부터 보지 않을까?
헤이~ 정 배우 가서 어떤 CP님인지 낯짝이나 한번 보고와.
나도 그런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CP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니까 말이야.”
태준도 CP의 작태에 마음이 많이 상한 것 같았다.
“그 CP 민수 오빠한테 시비를 걸 수도 있겠네요.
그 사람은 지금 당장 드라마가 촬영되는 걸 반기지 않을 테니까요.
질질 끌다가 사람들이 다 진이 빠진 다음에 국장까지 두 손 다 들고 나서야 촬영되기를 바라지 않을까요?
그러다가 드라마가 적당히 실패하면 더 좋고요.”
민수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설아가 정확히 지적했다.
CP가 드라마 실패를 바란다니 참 아이러니하지만 사내 힘 싸움 때문이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다.
이번 일도 그런 맥락이었으니 아마도 CP는 민수의 출연을 절대 반기지 않을 것이다.
“아 맞네.
악….. 내가 민수에게 똥을 줬어!
남의 대타를 뛰는 것도 짜증 나는 일인데 대우까지 거지 같다니…….
하…. 민수야.
상대가 진짜 엿같이 굴면 굳이 안 해줘도 돼.
그건 진짜 아니잖아.”
민수는 절망한 표정의 수연을 보니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글쎄요…. 지금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배우들을 돌려보냈다고요?
어떤 배우들이 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한테 뭐라고 하면서 거절할지 궁금하긴 하네요.
제가 로맨스 빼고는 좀 자신 있거든요.”
“솔직히 정 배우 연기를 보고 그냥 돌려보내면 그건 자기 눈이 비정상이란 걸 인정하는 거나 정말 드라마를 망하게 하고 싶다는 말밖에 안 될걸.
나도 로맨스 빼고는 정 배우나 나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말이야.
그런데 CP가 진짜 드라마를 망하게 하고 싶다고 티를 내는 거면 그건 국장한테 완전히 빌미를 주는 거지.”
민수가 웃으면서 자신 있게 말하고 옆에서 태준까지 거들자 수연도 조금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사실 수연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민수가 거절당한다면 저 배역을 연기할 배우가 없다고 말이다.
다만 민수가 하고 싶어 하느냐가 문제였는데 말하는 걸 들어보니 민수가 생각보다 배역을 꼭 맡을 생각인 것처럼 보여서 마음이 놓인 것이다.
그리고 민수를 거절한다면 태준의 말대로 CP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밖에 안될 것이다.
그러면 CP는 명분을 잃게 되고 국장이 CP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민수는 자신의 눈치를 조금 보다가 안심한 표정을 짓는 수연을 보며 그녀가 자신을 조금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연은 민수가 어지간히 자존심을 찾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사실 민수는 그런 일로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이 흔히 배우의 자존심이라는 생각하는 확실한 대우와 개런티도 민수의 자존심과는 방향이 조금 틀렸다.
민수는 기본적으로 남이 자신을 평가하는 것으로 자존심을 챙기지 않았다.
그건 그냥 평가와 가치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자신의 능력보다 낮은 취급이나 대우를 받거나, 자신의 위치보다 적은 개런티로 연기하기를 요구받는다면 물론 사람이니까 기분이 나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민수는 그건 말 그대로 기분이 나쁜 것이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분이 나쁜 문제는 수연이나 혜민이 같이 자신과 친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민수가 자존심이 상할 때는 자신이 맡은 배역을 자신이 만족스럽게 소화하지 못할 때뿐이었다.
솔직히 민수에게는 CP에게 이해할 수 없는 대우를 받는 것보다 차라리 예전에 설아와 애틋한 장면을 찍을 때 냈던 그 많은 NG가 더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대타를 뛰는 것도 생각보다 기분 나쁘지 않았다.
배역은 나름 괜찮아 보였고 이 드라마에는 수연과 함께 혜민이 까지 있지 않은가.
혜민이의 데뷔작에 같이 출연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민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액션 연기 말고도 다른 연기도 훌륭하게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그러면 아마 다음 작품을 할 때는 저번처럼 짜증 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수연과 혜민을 위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연기를 보여 줄 기회를 얻는 것에 비하면 CP에게 조금 안 좋은 소리를 듣는다거나 그 배역이 남이 하기로 했던 배역의 대타이면서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 그리고 받을 수 있는 개런티가 매우 적다는 것은 정말 사소한 문제였다.
“어쨌든 걱정하지 마세요.
사내 힘 싸움으로 드라마를 망치려는 사람의 말에 제가 기분 나빠질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진짜 이런 일로 자존심 상하지도 않고요.
자존심은 남이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세우는 거로 생각하거든요.”
“오, 그거 괜찮은 말인데.
자존심은 남이 새워주는 것이 아니다.
감히 나의 가치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라. 캬~
나도 참고해야겠어.”
태준은 평소처럼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고 설아는 두 눈을 반짝이면서 민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수연은 조금 감동한 얼굴이었다.
이게 뭐라고 저러는지 참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