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86화 (186/325)

#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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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을 나선 둘은 어느새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었다.

늦은 밤이라 길가에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고 아주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도 어두워서 그런지 길가를 대놓고 활보하는 설아와 민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둘은 이윽고 예전에 사고가 터졌던 그 골목에 접어들게 되었다.

“여기네요. 저번에 문제가 터졌던 곳이요.

어? 저기에 가로등이 새로 생겼어요.

저희 때문일까요?”

설아의 말대로 가로등이 없던 곳에 가로등이 하나 들어왔다.

민수가 겪은 일로 주위에 사는 주민들도 너무 어둡고 으슥하다고 민원을 넣은 모양이었다.

거리에 가로등이 들어오니 확실히 전보다는 나았다.

“헤헤. 사실요.

전에 도망치는데 오라버니가 수연 언니를 업고 갔잖아요?

그게 좀 부럽더라고요.

아무래도 보호받는 느낌이 확 들지 않았을까요?”

“그래요? 확실히 상황이 그랬으니 보호받는 느낌이 확 들긴 했겠죠.

어쩌면 그 멍청이들이 수연 선배와 윤 배우를 이어준 오작교 같은 존재일 수도 있겠네요.”

“어쩌면요.

만약 그 일이 없었으면 음…. 아무래도 서로 마음속으로 속마음을 감추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민수는 조금 전에 설아가 한 말속에 들어있는 그녀의 바람을 눈치채고 설아 앞에 앉아서 등을 내밀었다.

“음 보호받는 느낌이 어떤지 알고 싶으시면 한번 업혀 보세요.

제가 그래도 상당히 인정받는 등이거든요.

예전에 수연 선배도 드라마에서 업힌 이후에 뛰어난 승차감을 인정했었죠.”

자신의 등이 가진 우월한 승차감을 자랑하는 민수에 모습에 설아는 피식하고 웃음을 보인 후 못 이기는 척 그의 등에 몸을 기대었다.

자기 생각을 정확히 눈치챈 센스가 조금 놀라웠다.

원래 이런 남자가 아니었는데 무슨 일인 걸까.

혹시 하려고 하면 잘할 수 있는 그런 남자인 건가?

설아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민수의 센스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등에 업혀서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니 민수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넓은 등이 참으로 안정적이었다.

설아는 민수의 등에서 느껴지는 따듯한 온기와 아늑함에 점점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 위기 중에 수연이 느꼈던 안도감은 이것보다 더 크게 다가왔으리라.

“좋네요. 오빠.

수연 언니가 왜 바보 오라버니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는지 알 거 같아요.”

“그래요? 설아 씨는 어떤가요?”

“음….. 좋아요.

참 좋은데 뭐라고 표현하기가 힘드네요.”

“그럼 됐어요.

딱히 뭐라고 표현할 필요는 없죠.

그냥 좋으면 좋은 거니까요.”

“그러네요.

좋으면 그냥 좋은 거죠.”

민수는 말없이 계속 걸어갔고 설아는 그의 등에 몸을 맡긴 채 포근함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소속사 근처 대로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배우들은 어김없이 민수의 방에 모여들었다.

일주일 동안 더 바쁜 시간을 보냈는지 수연은 더 피곤해져 있었다.

수연이 주연으로 출연한 “로열”은 이번 주에 1화 2화를 방송했다.

SBC에서 작정하고 만든 데다가 오랜 준비 기간을 걸친 드라마답게 시작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공인 수연은 요즘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적극적이면서 사랑스러운 여성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드라마가 순조로운 출발을 했음에도 수연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수연 선배. 드라마는 잘 나가고 있는데 왜 표정이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하…. 무슨 일이 있긴 하지.

민수야, 이따가 방송 끝나면 나랑 이야기 좀 하자.

그때 이야기해 줄게.”

수연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긴 한 모양이다.

무슨 일인지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이따가 말해준다니 민수는 차분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는 모두 맥주를 따고 마시면서 방송을 감상했다.

설아가 나오는 것은 네 번째였기 때문에 아직 한참 남았다.

“확실히 2라운드는 확실히 다르다니까.

다들 노래를 잘하네.

우리 동생이 얼마나 선전할 수 있을까?

이거 내가 다 긴장이 되는데……”

긴장된다는 태준이 실실 웃고 있는 것을 보니 긴장이 되기는커녕 설아가 만약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면 설아를 단단히 놀릴 생각으로 보였다.

하지만 노래를 부른 것에 한해서는 설아가 태준의 놀림을 받을 일이 없어 보였다.

“호호. 바보 오라버니 속마음이 여기까지 들리는 거 같아요.

저번 주에 수연 언니와의 대화는 잘 끝냈나요?

수연 언니 같은 애인을 두고 여돌에 관심을 보였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바보인 거겠죠.”

설아의 비아냥에 태준은 조금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민수는 태준의 표정에서 여러 가지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태준의 표정에서 겨우 끝낸 이야기를 왜 다시 꺼내냐는 원망이 섞여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설아의 말대로 그 일이 가볍게 넘어가지는 않았나 보다.

아무래도 수연에게 단단히 혼이 난 모양인데 요즘 수연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촬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다 태준에게 푼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것도 업보인 것이 배우인 수연과 사귀려면 태준도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할 것이다.

만약 태준이 촬영이 엉망이었으면 수연이 태준을 감당해야 할 테니 그러고 보면 저 둘은 서로에게 매우 공평했다.

그렇게 태준과 설아의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드디어 설아가 노래 부를 차례가 되었다.

곡명은 “월량대표아적심”

정말 의외에 선곡이었다.

이 곡은 그나마 한국인들이 많이 아는 노래이긴 하지만 저런 노래 경연에서 부를만한 노래는 아니었다.

곡 전체가 무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주가 흘러나오자 원곡보다 조금 무거워지고 구슬픈 가락에 민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원곡을 조금 편곡한 것 같았다.

하지만 편곡의 방향이 “세라”의 “월량대표아적심”과 놀랍도록 비슷했다.

노래가 시작되었고 설아는 가사를 중국어로 그대로 불렀다.

다만 곡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원곡이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한 노래라고 한다면 설아의 노래는 그리움과 애절함을 극도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점마저 “세라”의 노래와 비슷했다.

민수는 설아의 노래를 들으며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묘한 감동과 그리움이 몸속을 옥죄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영원히 이런 노래를 들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역시 상황이 바뀌어도 사람은 바뀌지 않는 걸까.

민수는 노래가 정말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혼란스럽기도 했다.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 모든 배우가 노래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녀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감정 표현과 그 음율 속에서 느껴지는 그리움과 애절함에 가슴이 먹먹해져 갔다.

노래가 끝나고 태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방금까지 설아의 노래가 별로라면 바로 타박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다 잊은 모습이었다.

관객 중에 저 노래를 모르고 있는 사람도 제법 있을 테고 가사가 중국어라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왠지 그런 것조차 그녀가 표현한 감성에 다 묻혀 버릴 거 같았다.

그냥 가사를 몰라도 될 정도로 그녀가 내는 소리 자체가 주는 느낌이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헤헤. 예전에 오빠가 말하는 걸 보니 이 노래를 조금 좋아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이 곡을 선택했어요.

어차피 1라운드에서 이기고 2라운드 곡을 부르는 것이 목표였으니 승패는 상관없었고요.”

민수는 승패에 상관없이 자신을 위해 곡을 선정했다는 설아의 모습이 너무나도 고맙고 어여뻐 보였다.

“네. 좋았어요. 정말.

제가 좋아하는 노래도 맞고요.

그런데 왜 저렇게 편곡을 한 거예요?

편곡은 누가 했어요?”

“음…. 편곡은 제가 했고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리고 저렇게 편곡을 한 것은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였어요.

저 가사를 보니 원곡처럼 부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전 그렇게 말랑말랑하게 그리워하지는 못할 거 같아요.

예전에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애절하게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다 보니 저렇게 된 거예요.

제 해석이 잘못되었을 까요?”

“아니요. 아니에요. 좋았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어머 그래요? 히히.

마음이 통했네요?”

옆에서 태준은 그런 민수와 설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한 쌍의 바퀴벌레를 보는 눈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아픈 곳을 '쿡' 하고 찌른 설아가 본인의 연애사업을 잘 꾸려가는 것이 못마땅해서 그런 거처럼 보였다.

“좋긴 한데, 그래서 승패는 장담할 수 없어졌네.

그냥 한국어로 된 노래를 제대로 불렀으면 쉽게 이길 수도 있었는데 그건 좀 아쉬워.”

수연은 설아가 중국어 노래를 부른 것이 승패에 큰 영향을 줄 거 같아 걱정되었다.

그리고 수연이 걱정하는 사이 화면 속에선 설아가 본인의 장기를 선 보이고 있었다.

[드디어 초승달 님이 1라운드에서 거절했던 자신의 장기를 선보입니다.]

[거, 그렇게 뜸 들이다가 실망스러운 게 나오면 대단한 망신인데요.]

화면 속에 설아는 MC의 요청에 앞으로 나오더니 구두를 벗고 가볍게 몸을 풀더니 화려하게 날아 멋들어지게 텀블링에 성공했다.

마치 물 찬 제비처럼 날렵하고 유려한 몸놀림이었다.

[저…저저…..]

[오우!]

처음에는 조금 심드렁하던 패널들도 설아의 동작이 너무나도 멋져서인지 모두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태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풋. 야 저기서 저런 걸 한 거야? 와 진짜 윤설아……

역시 윤 엔터 전투력 서열 넘버 투 답다. 하하하”

민수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텀블링은 예전에 액션 스쿨에서 같이 교육받을 때 설아가 자주 했던 익숙한 동작이었다.

원래 운동신경이 좋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걸 저기서 바로 선보이다니.

하지만 진짜 당황하고 있는 것은 화면 속 패널들이었다.

완벽한 중국어 구사 능력과 놀라운 순발력으로 보여준 텀블링은 설아의 정체를 더욱 오리무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와 세상에….. 여성분이 저런 텀블링을….]

[저분 대체 뭐죠? 우선 저분 한국인 맞나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혹시 중국에서 액션 배우를 데려오신 건 아니겠죠?]

[그래도 저분은 가수가 맞아요. 가수가 아니라면 저렇게 노래를 부를 수가 없죠.]

처음에는 가수냐 아니냐에 대하여 논쟁하던 패널들이 이제는 중국인이냐 한국인이냐를 논쟁하면서 점점 난장판이 되어가자 민수는 혀를 차며 설아를 바라보았다.

“설마 일부러 장기를 2라운드에 보인 거예요?”

민수가 묻자 설아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저쯤 되면 제가 누군지 알 거로 생각했거든요.

저분들도 제가 중국에서 등려군의 노래를 부른 것을 알고 있을 테고 액션 연기를 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니 말이에요.

그런데 의외로 더 어려워하시는 걸 보니 조금 신기하긴 했어요.”

자기는 정말 힌트를 주고 싶어서 저렇게 했다는 설아의 말에 민수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뻔뻔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설아도 자신이 저렇게 행동하면 사람들이 더 혼란에 빠질 거라고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민수는 설아가 은근히 여우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결국 패널들은 설아의 정체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상황에서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대결의 승자는……… 53대 46! 53표를 받은 “노래하는 초승달”이 이기고 3라운드에 진출합니다!]

MC의 우렁찬 선언과 함께 설아의 승리가 결정되었다.

설아가 노래를 잘 부르긴 했지만, 예상외의 승리였다.

아무래도 관객들에게도 설아의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었나 보다.

민수는 언어적인 장벽을 극복하고 승리한 설아가 더욱더 대단해 보였다.

“와 저걸 이기네. 대단하네! 우리 설아.”

수연도 설아의 승리가 기쁜지 설아를 꼭 끌어안고 즐거워했다.

그리고 설아가 또다시 승리하는 바람에 설아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패널들도 다음 라운드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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