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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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만에 다시 방문한 아는 사람만 안다는 주점.
이곳은 여전히 손님이 없어 보였다.
토요일 황금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손님이 없다니 도대체 이 주점은 어떻게 망하지 않고 운영되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그 동동주의 신묘한 맛을 생각해 보면 손님이 없는 것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 윤설아 씨, 정민수 씨 맞죠?”
아무래도 연예인이다 보니 6개월 만에 방문임에도 사장님은 민수와 설아를 바로 알아보았다.
“네. 사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음…. 그러니까 반년쯤 전에 태준 씨랑 같이 오셨던 기억이 나네요. 제 기억이 맞나요?”
사장은 의외로 민수랑 배우들이 방문했던 날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네, 사장님.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네요.”
“에이~ 민수 씨나 설아 씨가 쉽게 잊을 수 있는 얼굴은 아니죠.
태준 씨나 수연 씨는 종종 오시는데 두 분은 안 오셔서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원래 이곳이 안 오는 분은 있어도 한 번만 오시는 분은 없거든요.
자자. 안으로 들어가세요. 오늘은 특석이 비어 있거든요.”
이 주점의 특석이라면 저번에 멍청이들이 들어가 있던 그 자리였다.
따로 방으로 되어 있어 외부의 시선과 상관없이 편하게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으니 민수는 사장님의 배려에 감사하며 안내를 받아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생각보다 더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확실히 특석이라고 이름 붙이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그런 방이었다.
“헤….. 수연 언니랑 바보 오라버니는 벌써 몇 번 왔다 간 모양이네요.
저희에게는 말도 없이 말이에요.”
“그러게요.
저번에 레스토랑도 그렇고 가는 곳마다 윤 배우의 정보를 들을 수 있으니, 그 커플이 오늘 당장 스캔들이 나도 놀라지 않을 거 같아요.”
“그 오라버니가 그렇게 보여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 그렇게 쉽게는 아닐 거예요.
아마 믿을 만한 곳만 골라서 다니고 있을 테니 당분간은 안전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정말 의심을 사기 시작하면 아마 바로 걸릴 거에요.
당장 수연 선배 집 근처에서 잠복하고 기다리기만 해도 윤 배우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흠…..
어쩌면 스캔들이 나도 조금 아쉽긴 하지만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요즘 수연 언니는 CF도 다 거절하고 있으니까요.
아예 스캔들이 난다는 전제하에 활동하고 있는 건데 그러면 타격이 크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뭐…. 그건 윤 배우랑 수연 선배가 알아서 하겠죠.
하지만 저희한테 말도 없이 이곳에 와서 동동주를 마신 것은 좀 괘씸하네요.”
그 커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민수는 저번 주에 수연과 태준이 말다툼을 시작하려다가 지지부진해진 일이 생각났다.
그때 민수와 설아 모두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던가.
“수연 선배 말이 나와서 그런데, 저번에 윤 배우가 여돌 노래를 듣는다고 수연 선배가 뭐라고 했었잖아요?
그거 어떻게 됐을 거 같아요?
그날로 그냥 끝났을까요?”
“에이. 그럴 리가요.
수연 언니가 은근히 독점욕이 있어요.
아마 둘이 있을 때 2차전을 벌리지 않았을까요?
승자는 당연히 수연 언니일 테고요.”
설아는 태준의 패배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말의 저변에는 태준의 실책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음….. 그냥 여돌 노래를 좀 들은 건데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나요?”
민수는 수연의 태도가 조금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설아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아 설아의 생각을 알고 싶어졌다.
“글쎄요. 생각하기 나름인데, 저라도 조금 기분이 나쁠 거 같아요.
그냥 듣는 정도가 아니라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들은 거고, 심지어 춤추는 걸 보고 확실히 알았다는 걸 보니 무대 영상도 찾아본 모양이니까요.
제 남자는 적어도 저에게만 집중하기를 바라는데 그게 무리한 기대인 걸까요?”
“음…..”
설아의 말에 민수는 대답할 말이 궁색해졌다.
그리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것이 만약 민수가 저런 일을 벌인다면 수연 이상으로 압박을 넣을 기세였다.
아무래도 민수도 그런 면에서는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어 보였다.
태준과 수연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이 음식이 다 되었는지 사장이 음식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메뉴는 당연히 동동주에 해물파전.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향긋한 내음이 풍기는 해물파전을 보니 민수도 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실례가 안 된다면 가시기 전에 사인 하나만 부탁할 수 있을까요?
저번에 부탁을 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급하게 가시는 바람에 부탁을 못 드렸어요.
그러고 나서 얼마나 후회를 했던지.”
민수는 사인은 당장 해드리겠다고 말하고 항상 건강 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멋들어진 사인을 해서 사장에게 넘겨 주었다.
설아도 언제나 화목한 가정이 되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사인을 전해 주었는데 둘 다 음식점에 왔으면서 사업에 번창하라는 사인을 하지 않은 것이 조금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손님이 많이 모이면 이곳에 다시 오기가 힘들어지니 그걸 경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윤 배우는 또 엄청 바쁜 것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영화 개봉이 임박했으니 그렇겠죠?
요즘 집에서도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사실 저도 바쁘게 움직였으니 꼭 오라버니 때문은 아니겠지만 말이에요.”
설아의 말대로 요즘 태준은 엄청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 영화가 개봉하고 시사회를 다 마칠 때까지는 이런 추세가 이어질 듯 보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저번에 “런런런”에 출연한 이후 입이 완전히 풀렸는지 예능에서도 종횡무진 활약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실력 발휘를 못 해서 그랬지 원래 입담은 있는 태준이었으니 앞으로도 예능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예능에 재미를 붙이고 고정 출연을 노리지나 않을지 걱정될 지경이었다.
“음….. 확실히 요즘 윤 배우가 예능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윤 배우는 차라리 개인 촬영을 올리는 것보다 그냥 예능에 나가는 게 나아 보일 정도예요.”
“풋. 그건 그렇죠.
안 그래도 그 바보 오라버니가 자신의 새로운 적성을 찾은 것 같다면서 좋아하긴 했어요.
차라리 혼자 영상을 찍는 게 더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설아 씨는 어때요?”
“음….전 그냥 반반? 둘 다 문제없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전 개인적인 영상을 남기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어서 그건 계속할 생각이에요.”
요즘 윤 엔터 배우들의 예능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면 태준이 가장 친 예능적 배우였고 수연과 설아는 별로 상관은 없지만 굳이? 라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수연과 설아는 아직도 홈페이지에 개인적인 영상을 틈틈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예능에 가장 절망적인 민수는 예능은 아예 포기하고 개인 영상에 올인하고 있었는데 요즘에는 특별히 촬영이 없어서 자신의 요리 영상을 올리고 있었다.
수연이 처음에 올린 영상하고 조금 겹친다고 할 수 있지만 요즘 수연은 촬영장을 위주로 영상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네. 이번에 설아의 비법공개가 다 끝나면 다음에는 노래 영상을 올릴까도 생각 중이에요.
좀 더 생각은 해봐야겠지만요.”
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민수는 설아에게 그녀가 노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과연 그런 노래 실력을 갖추고 연기를 하는 것은 재능 낭비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고 어쩌면 그녀의 진정한 적성이 노래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설아 씨가 노래를 참 잘하긴 하죠.
그런데 혹시 살아오면서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어려서부터 자신이 노래를 잘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을 거 아니에요?”
민수의 물음에 설아는 머뭇거리며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머뭇거린 설아는 동동주를 한잔 쭉 들이키고는 조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음…. 노래요. 좋긴 하죠.
이건 좀 건방진 말인데…. 민수 오빠, 듣고 오해하시면 안 돼요?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거든요.”
민수는 설아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궁금해졌다.
“사실 제가 노래에 어느 정도 재능이 있다는 건 어려서부터 알고 있긴 했어요.
그래서 노래 부르는 것도 좋긴 한데, 이게 또 좀 지루한 부분이 있어서 평생 하라고 하면 좀 꺼려진다고 할까요?
이번에도 그래요.
며칠 동안 집중적으로 노래를 불렀더니 실력이 쭉 늘어나더라고요.
노래는 따로 배우지 않아도 느낌과 감으로 알고 있은 기분이에요.
다른 가수들이 부르는 걸 보면 대충 어떻게 불러야 할지 감이 온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걸 보고 부르면 또 그렇게 바로 되고요.”
“맙소사….. 그러니까 그 말은…..”
“아…. 제가 이래서 말하기가 꺼려졌던 건데…..
네, 맞아요.
솔직히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어요.
그냥 하면 하는 대로 실력이 쭉쭉 올라가 버리니까요.
그렇게 쉽게 실력이 올라 버리면 재미가 없잖아요.
반면에 연기는 아직 어려운 부분도 많고 항상 노력해야 하니 재미있는 거고요.”
이건 또 놀라운 말이었다.
민수가 예상했던 대로 설아의 진짜 재능은 노래가 분명했다.
민수는 사람이 다른 가수의 노래를 듣고 그 방식이 그대로 이해가 된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녀의 노래에 대한 재능은 확실히 천부적인 모양이다.
하지만 설아의 말을 들어보니 한편으로 이해가 되기도 했다.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고 만약 노래를 부르면서 별다른 성취감이 없다면 가수를 되는 것은 조금 무리일 것이다.
설아의 말대도 오만하다면 오만한 소리였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전생에 “세라”의 인생이 조금 보이는 듯했다.
왜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그녀가 그런 애잔한 노래만을 불렀으며 점점 활동을 줄여나갔는지.
만약 설아와 “세라”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세라”는 연기를 포기하게 된 후 자신의 재능대로 가수를 선택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쭉쭉 늘어나는 실력과 사람들의 환호에 취해서 만족했을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취감은 떨어지고 타성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실력이 느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세라”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재능 때문에 그 한계에 빠르게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면 쉬웠던 노래가 더는 쉽지 않게 되고 실력은 거의 늘지 않는다.
처음부터 가수를 하기 위해서 구슬땀을 흘리던 사람이라면 몰라도 연기자의 길을 원하다가 마지못해 가수가 된 “세라”가 그런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을까?
게다가 지금까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노래 실력이 쭉쭉 올랐으면 이 시점부터는 노래 부르는 것이 점점 고통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노래가 점점 슬퍼지고 슬픈 감성만 남게 된 것이 아닐까?
민수는 설아의 생각을 알고 나니 그녀에게 노래에 전념하라고 권할 수가 없어졌다.
대단한 가수가 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 개인의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전생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연기를 하면서 지금처럼 틈틈이 노래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민수가 참견을 하지 않아도 설아가 알아서 그렇게 할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민수는 자연스럽게 헛웃음이 났다.
그렇게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아직 자신이 “세라”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쩌면 설아와 “세라”를 완전하게 분리하는 것은 영원히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예전부터 민수 오빠는 제가 가수로 더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하곤 하셨죠.
저도 사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냥 이대로 좋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요?”
“그건 그렇죠.”
“아. 물론 전 노래도 사랑한답니다.
아마 노래가 없었으면 제가 이렇게 연기를 할 수도 없었겠죠.
노래로 제 대사 문제를 고칠 수 있었잖아요.
요즘도 가끔 대사를 가사로 생각하면서 연기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연기가 더 잘되니까요.”
그녀가 가수가 되면 어떻고 또 배우가 되면 어떠한가.
그냥 그대로 옆에서 그녀의 행보를 지켜봐 주는 것이 가장 현명해 보였다.
민수는 자신이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그녀의 앞날은 그녀가 마음 가는 대로 그렇게 선택하게 될 것이다.
민수의 머리가 가벼워지자 자연스럽게 도란도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한가롭고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동동주를 두 동이나 비우며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느끼고 주점을 나섰다.
음식이 맛있고 동동주가 근사한 이 고즈넉한 주점.
앞으로도 자주 찾고 싶어지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