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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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걸스는 판타즘과 함께 RD의 간판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판타즘이 요즘 이카루스에 조금 밀리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RD에서는 릴리걸스의 입지에 더욱 신경을 쓰는 분위기였다.
아마 인기 아이돌인 리아가 굳이 마스크 싱어에 나온 것도 그녀가 가왕이 되거나 최소한 가왕전까지 올라가 아이돌이 아닌 뮤지션으로서 자리매김하고 그에 따라 릴리걸스의 입지도 더욱 공고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방송국 입장에서도 어렵게 모신 리아를 가수가 아닌 설아와 대결시킨 걸 보니 그들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할 생각인 듯 보였다.
어쩌면 사전에 의논이 오고 갔을지도 모른다.
릴리걸스가 정말로 인기 있는 아이돌이었고 아이돌 중에서 가창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리아였으니 확실히 그런 기대를 할 만했다.
위치도 네 번째에 올려놓은 것을 보니 리아를 가왕 후보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프로그램의 구성을 생각해봐도 방송 끝자락에 나오는 네 번째 자리에 유력한 가수를 자주 넣어 왔으니 아마 예상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설아가 중국에서 “첨밀밀”을 부른 적이 있었고 그 노래가 중국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뿐이었는데 애당초 첨밀밀이라는 노래는 맑고 경쾌한 사랑 노래였고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가창력이 드러나는 노래가 아니었다.
그냥 무난히 리아를 2라운드로 올리기 위해 비가수를 상대로 결정한 방송국.
그리고 설아의 첨밀밀을 듣고 그냥 무난하게 슬픈 감성을 표현하는 노래로 결정하고 클라이맥스 파트를 가져간 RD.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예상대로 리아가 이기고 올라가는 그림이 나왔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설아의 노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을 뿐이다.
결국 그냥 불운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설아를 부른 거야 당연히 요즘 한창 드라마가 인기가 있으니 화제성 때문에 불렀을 거고, 리아는 진짜 가왕 후보나 도전자로 불렀을 텐데 이렇게 되면 방송국에서도 조금 난감했겠는데.”
태준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충 짐작한 분위기였다.
하긴 누가 봐도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너무 뻔해서 설아까지 예상할 수 있었던 게 문제였을까?
덕분에 설아가 미친 듯이 칼을 갈았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RD라….. 우리 진짜 진룡이랑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진 거야? 왜 이렇게 사사건건 부딪치는 거야?”
수연은 그냥 또 RD랑 묘하게 연관되는 거 같은 이 상황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RD는 잘 굴러가고 있나요?”
RD의 이야기가 나오자 민수는 왠지 요즘 RD가 어떤지 궁금해졌다.
배우 팀을 이끌던 박찬수 실장과 훗날 RD 배우 팀의 에이스가 되는 진소희까지.
게다가 그 당시 RD 배우 팀의 얼굴이던 수연은 진작에 윤 엔터로 자리를 옮긴 상황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국 윤 엔터에서 RD 배우 팀의 엑기스만 완전히 빼먹은 셈이었다.
“RD라….. 배우 팀은 결국 해산했고, 다시 가수 전문 소속사로 방향을 바꾼 모양이던데.
수연이랑 재계약에 실패한 이후에 이름있는 배우들이 줄줄이 소속사를 떠났거든.
마땅히 신인 배우를 키우기도 애매했는지 결국 배우 팀 자체를 없앴다고 하더라고.”
“맙소사……”
훗날 진소희를 필두로 여러 명의 톱스타를 거느리고 한국 영화 산업을 지탱하는 한 축이었던 RD 엔터가 배우 팀을 완전히 포기하다니, 민수는 자신 때문에 발생한 나비효과가 이 정도로 거칠게 몰아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다시 대표가 바뀐 모양이던데.
김익수 대표님도 결국 자리를 못 지킨 거야?”
“아 그거. 어머니가 그러는데 진룡에서 사장이 바뀌면서 사장 쪽 인사들이 다 자리를 비켜줬다고 하네.
김익수 대표도 전형적인 진시첸 사장 쪽 인물이라 자리를 물러난 거고.”
“결국 사내 힘 싸움에서 밀렸다는 거네요.
회사의 덩치가 너무 크면 그런 파벌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죠.
그걸 잘 조율하는 게 수뇌부의 일인데 그게 참 쉽지 않은 가봐요.”
그렇게 한참 RD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배우들은 다음 주에 있을 2라운드부터 설아가 어떻게 했는지 자못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설아는 다음 라운드에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진짜 가왕이라도 된 건 아니겠지?”
“그건 다음 주에 확인하시길~. 결과는 절대 유출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거든요.”
계속 궁금해하는 수연의 모습에 설아는 전혀 말해줄 생각이 없는 듯 정확한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냥 단순히 말을 해주지 않는 걸 넘어 이 상황을 조금 즐기는 거처럼 보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우리 동생이 노래를 잘하네.
내가 기대한 것 이상이었어.
예전에 정 배우가 설아의 노래에 반했니 어쨌니 했던 게 그냥 하는 그런 말이 아니었네.”
민수는 그때 수연이 말했던 건 그냥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 했던 말이었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별 의미 없는 일이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선후는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은 지금 설아랑 좋은 관계로 잘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민수는 태준의 말에 기운이 좀 빠졌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늘 설아의 노래가 단순히 노래가 아니었음을 꼭 지적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오늘 느낀 설아의 노래는 전생에 민수가 봐왔던 “세라”의 노래와는 또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 설아 씨는 노래를 잘하지.
그런데 오늘 만약 저게 마스크 싱어가 아니라 단순히 노래를 겨루는 자리였으면 더 차이가 크게 벌어졌을걸.”
“오호…. 그건 그렇지. 우리 설아는 엄청 예쁘니까.
원래 예쁜 애가 부르는 노래가 더 듣기 좋은 법이잖아?
솔직히 리아도 떨어지는 외모는 아니지만, 지가 우리 설아한테 들이댈 입장은 아니지.”
왠지 수연은 같은 소속사에 있었던 리아에게 별로 감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민수 오빠 그래요? 그렇게 봐주시다니…..”
설아까지 배시시 웃으면서 고마워하자 민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왜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 건지 당황하며 더는 이상한 쪽으로 이야기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말을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게 아니라.
오늘 설아 씨가 부른 건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어요.
제가 본건 노래가 아니라 완전한 연기였어요.
아마 가면이 없어서 설아 씨의 표정까지 판정단이 볼 수 있었으면 그 느낌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을 거예요.
가수들도 노래를 부르는 것에 연기적 요소가 있다는 걸 인정하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가수가 노력해서 노래를 연기한다고 해도 그런 쪽으로는 배우를 당해 낼 수 없죠.
배우들이 가수의 기교를 완전하게 따라 하기 힘든 것처럼요.”
“아, 그런 뜻이었어?
그거야 당연하지. 설아는 가수가 아니라 연기를 제대로 배운 배우니까.”
수연은 민수의 말에 조금 싱겁다는 듯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수연의 태도에 민수는 조금 답답함을 느꼈다.
민수는 이걸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생에 “세라”가 엄청난 가수가 된 후에도 그녀는 슬픈 노래밖에 못 부른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대중들이 그녀에게 가진 유일한 불만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끝까지 즐거운 노래나 밝은 노래는 잘 부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
예전에 부른 “첨밀밀”과 오늘 부른 “꿈에”
두 곡은 전혀 분위기가 달랐지만 설아는 두 곡을 모두 완벽하게 “연기”해내고 말았다.
이 말은 결국 전생에 그녀가 가졌던 유일한 단점을 극복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결국 지금 이대로 설아가 가수에만 집중한다면 전생의 “세라”보다 더 인정받는 위대한 가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연기자로서의 설아를 인정하고 있던 민수는 오늘 노래를 듣고 자신이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의 “세라”를 알고 있던 민수만 할 수 있는 고민이었다.
“자~ 설아의 마스크 싱어 다음 주를 기대해 주세요~”
민수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설아의 유쾌한 마무리 인사로 오늘의 모임은 그렇게 끝마치게 되었다.
아마 다시 모이게 되는 것은 다음 주 이 시간이 될 거 같았다.
다들 지금은 할 일이 많아 이렇게 모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수의 예상대로 다음 주에도 배우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민수가 설아를 다시 만난 건 마스크 싱어가 방송되기 하루 전이었다.
마스크 싱어 때문에 며칠 촬영을 하지 못한 설아가 막판 촬영을 몰아서 하는 바람에 전혀 시간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에서야 만나게 된 것이다.
아마 마스크 싱어와 드라마가 같은 방송국이 아니었으면 그런 배려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설아가 마스크 싱어 출연을 고사했거나 미뤘을 가능성이 컸다.
설아의 성격상 연습 시간도 없이 노래하러 나가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오늘 만난 설아는 촬영을 모조리 마치고 종방연까지 하고 와서 그런지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라마가 무사히 잘 마쳤으니 종방연도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했을 것이다.
“미스 신데렐라”의 최종 시청률은 32.1%
주작에서 올해의 작품상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선전이었다.
아마 시상식에서도 준수한 성적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설아와 민수는 조금 색다른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같이 있는 것 자체도 좋은 일이지만 항상 소속사만 있는 것은 조금 답답했기 때문이다.
“오빠. 전에 영화 개봉하기 전에 갔던 그 주점 기억하세요?
동동주가 기가 막히던 그 주점 말이에요.”
“아. 거기요. 당연히 기억하죠.
고즈넉하고 한가한 분위기가 참 좋았죠.
뭐. 끝은 안 좋았지만요.”
설아는 민수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소속사는 엄청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모든 배우가 활동을 하는 중이었고, 그에 따라 배우들의 사생활까지 신경 쓰지는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건 윤 엔터 배우들이 대체로 얌전한 축에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배우들의 사생활을 터치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
“그럼 오늘 한번 가볼까요? 같이. 둘이서 만요.”
설아는 왠지 “같이”와 “둘이서”란 단어에 강하게 악센트를 넣고 있었다.
오늘 설아의 매니저는 오랜만에 휴가를 얻었다.
설아의 촬영 기간 동안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인데 사실 그건 표면적인 이유였고 설아가 억지로 돌려보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둘이서 만요?”
“네”
민수는 설아의 제안에 왠지 끌리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매니저 동원도 오늘은 나오지 않았다.
원래 동원은 외부 출입이 거의 없는 민수가 스케줄이 없을 때는 따로 홍보팀이나 기획팀 쪽에 지원을 나간다.
아마 남들 몰래 나갔다 오기에 오늘보다 좋은 날이 없을 것이다.
“좋아요. 대신 얌전히 갔다 오죠.”
“네. 얌전히.”
둘은 짝짜꿍이 되어 몰래 소속사를 빠져나갔다.
둘이 나가는데 소속사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
하지만 로비에서 건물을 지키는 춘섭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 자네….. 아 작은 아가씨.
이 시간에 어딜 가세요?”
춘섭은 설아와 민수를 발견하고 미심쩍은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설아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하였는지 슬쩍 춘섭에게 다가가더니 귓속말로 쓱쓱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춘섭은 설아의 이야기를 듣더니 눈을 크게 뜨고 민수를 한번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저렇게 놀라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설아의 말을 듣고 한숨을 푹 쉰 춘섭은 민수에게 다가와 오늘 하루 설아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하…. 자네. 얌전히 잘 다녀오게.
저번처럼 위험한 일이 생기면 아가씨부터 바로 대피시키고. 알았지?
저번에 자네가 워낙 잘 대처해서 내 별말 없이 보내주는 거야.
내 말 잘 알아들었기를 바라네.”
사실 부탁이라기보다 명령에 가까웠지만 민수는 그냥 가볍게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춘섭의 평소 태도를 미루어 보면 분명 바로 민 여사에게 알릴 거 같은데 설아의 말에 두말없이 외출을 허락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설아와 민수가 나간다고 해도 춘섭이 그걸 막을 권리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둘이 몰래 매니저도 대동하지 않고 나가는 것은 소속사에 반드시 알려야 하는 사안이었다.
일반적인 건물 관리인이 아니라 아리 재단의 관리인, 사실상 윤 엔터의 직원이나 마찬가지인 춘섭이기 때문에 설아와 민수를 제지하고 소속사에 알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민수는 예상이라도 한 듯 춘섭에게 말을 건네는 설아를 보니 그녀가 이런 상황을 충분히 생각한 것 같았다.
아마 저 아가씨는 오늘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