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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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분배를 하는데 상대가 엄청 날카롭게 나오는 거 있죠.
상대가 욕심이 너무 많은 거 같아요.
전 가수도 아니라서 승패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요.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설아의 말을 들어보니 상대가 설아가 연습하는 걸 보고 단단히 경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괜히 너무 욕심을 내는 바람에 설아의 마음에 불을 더 붙인 것 같은데 조금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저 여자가 만만한 여자가 아닌데 말이다.
첫 입맞춤이 있었지만 설아와 민수의 사이가 극적으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더 다가갈 뿐이었다.
이제는 가끔 팔짱도 끼고 옆자리에 앉아서 식사하기도 했는데 이러다가 다른 소속사 직원들이 둘의 사이를 눈치채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바로 윤 대표에게 알려질 텐데 민수는 그건 좀 피하고 싶었다.
윤 대표의 지극한 딸 사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윤 엔터에서 생활할 날이 많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윤 대표와 갈등이 생긴다면 피곤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민수는 이미 직원들이 다 알고 있고 민 여사의 지시로 윤 대표에게까지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윤 엔터의 직원이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이 사람들은 원래 민 여사의 수족들이니 윤 대표보다 민 여사의 입김이 강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민수와 설아는 민 여사의 손바닥 위에서 서로 사랑을 키워가고 있는 셈이었다.
일주일간의 철저한 연습 후 설아는 촬영을 다녀왔고 그 결과는 비밀에 부쳤다.
아마 설아의 노래를 듣고 결과를 확인하려면 방송을 봐야 할 거 같았다.
설아가 출연한 마스크 싱어가 방송되는 날이 되고 윤 엔터 민수의 방에는 오랜만에 수연과 태준까지 모여들었다.
태준은 이제 영화 촬영이 끝나고 감독이 막바지 편집에 한창이라고 했다.
그리고 12월 10일쯤에 바로 개봉을 한다니 참 빠르긴 했다.
하지만 따로 CG가 많이 들어가는 영화도 아니고 태준의 이름값으로 상영관도 바로 잡을 수 있었으니 개봉을 빠르게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만약 12월 말까지 가면 크리스마스 특수를 위해 다양한 영화가 나와 상영관을 잡기가 더 힘들 테니 제작진 측에서 좋은 판단을 한 셈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수연은 볼이 조금 핼쑥한 것이 아주 바쁘고 피곤한 티가 났다.
이번 드라마가 방영 전에 반 이상을 찍고 시작하는 게 목표라더니 다음 주에 방영을 시작하기 전에 어지간히 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 시간이 한가해진 태준이 수연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며칠간 수연을 못 만났던 설아도 조금 야위어진 수연의 모습에 걱정이 들었는지 몸을 여기저기 만져 보며 건강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언니, 드라마 정도에 이 정도로 건강이 나빠진다니요. 참을 수 없는 일이에요.
아마 기초체력이 부족해서겠죠? 참고해야겠어요.”
“아니, 설아야 그건…..”
설아의 심각한 이야기에 수연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설아의 다음 행동이 너무 잘 예상되기 때문이 아닐까?
“수연 선배. 오랜만이네요.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너무한 거 아니에요?”
자신이 입국한 지가 언제인데 이제야 만나게 된 수연에게 민수가 조금 서운한 기색을 비치자 수연도 자신이 무심했다는 걸 안다는 듯이 미안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아. 미안 민수야.
요즘 좀 정신이 없네.
사실 태준이도 며칠 못 봤거든.
촬영 때문에 정신도 없고 왠 X신 같은…. 아, 이건 아니고.
어쨌든 좀 그랬어.
이제 좀 괜찮아질 거 같으니 이해 좀 해주라.
드라마 빡빡한 거 너도 잘 알잖아.”
수연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힘들긴 한 거 같았다.
태준도 수연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걸 보니 문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드디어 방송이 시작되었다.
배우들은 방송을 보며 저건 누구인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방송을 즐겼다.
하지만 불행히도 배우들은 가수들이 가면을 벗는 족족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사실에 한숨만 쉬고 있었고 설아는 그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자신은 다 알고 있는 걸 우리가 헛다리 짚으면서 논쟁하는 것이 제법 웃긴 모양이다.
마지막 라운드가 되자 여성 두 명이 무대 위에 올라왔다.
한 명은 은빛으로 빛나는 가면에 초승달을 붙인 여성이었고 다른 한 명은 노란색으로 빛나는 가면에 빨간 태양이 그려져 있었다.
민수는 두 여성을 보는 순간 바로 초승달 가면을 쓴 여성이 설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두 여성 모두 훌륭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지만 흰 면바지에 스웨터를 입은 실루엣이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설아의 이름은 “노래하는 초승달”.
상대가 “노래하는 붉은 태양”인 것을 보니 서로 대비되는 이미지로 기획된 것 같았다.
“달이 설아네.”
수연도 딱 보고 바로 설아가 누군지 눈치챘다.
하긴 항상 운동하며 설아를 계속 보았으니 바로 못 알아채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우리 동생님이야. 그렇다 치고 상대도 만만치 않네. 게다가 저 옷도 그렇고.”
다소 수수한 옷의 설아 와는 다르게 상대는 옷에도 좀 신경을 쓴 것 같았다.
몸에 딱 달라붙은 스커트와 재킷이 몸의 곡선을 완벽하게 살려주고 있었다.
설아의 스웨터가 몸의 곡선을 죽이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배우들이 외모에 대하여 평가를 하는 사이에 노래가 시작되었다.
노래는 박정연의 “꿈에”
이 노래는 한 여성이 사랑하는 남성을 떠나보내고 꿈에서 만난 이야기를 애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곡이었는데 정말 노래 잘하는 가수 박정연의 대표곡으로 부르기에 따라서 가수의 감성과 가창력을 모두 뽐낼 수 있는 그런 노래였다.
“ “꿈에”네. 진짜 어려운 노랜데…”
노래의 시작은 설아였다.
부드럽게 그리고 담담하게 시작된 설아의 목소리는 별다른 기교가 없었음에도 계속 사람들의 가슴속에 박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두 출연자가 서로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나 갈 때쯤 노래를 듣고 있는 배우들의 표정이 조금 묘해지기 시작했다.
“꿈에”는 전반적으로 감성적인 곡이었기 때문에 경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고음을 본격적으로 밀어 넣을 만한 부분이 없었는데 편곡을 통해서 한곳을 고음 부분으로 바꾼 상태였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붉은 태양이 멋지게 고음을 뽑아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노래가 1, 2절이 대칭되는 노래가 아니잖아.
이거 듀엣 하기에 많이 안 좋은 곡이네.
이거 누가 하자고 한 거야?”
“음…. 그쪽에서요? 뭐 저도 좋은 곡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예전에 설아가 말했던 파트 배분 문제가 이건가 보다.
결국 상대가 클라이맥스를 가져갔으니 상대가 유리하긴 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떨까?
클라이맥스 부분은 상대가 고음을 뽑아내는 바람에 더 기억에 남았지만, 곡 전체의 분위기는 설아가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설아는 자신의 강점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마치 연기를 하듯 애절하고 안타까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며 아련한 느낌을 주고 있었는데 그 감정의 폭이 너무 깊어 상대의 노래가 상대적으로 조금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만약 설아를 가리고 있는 마스크가 없어서 그녀의 표정이 보였으면 그 느낌의 깊이가 지금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까요. 제 특기는 고음 같은 게 아니더라고요.
고음을 내려고 하면 낼 수는 있지만, 고음을 내면 아무래도 감정을 정확하게 넣을 수가 없었어요.
가수가 아니라서 그런가 봐요.”
“아니. 설아야. 그건 누구라도 못하는 거 아니야?
네가 말하는 감정을 넣는다는 게 단순히 감정을 표현하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저음에서 했던 것처럼 완벽하게 감정을 제어하는 걸 말하는 걸 텐데.
고음에서 그게 되면 그게 사람이야?”
“아, 하여간 어쨌든 그래요. 그래서 그냥 제가 잘하는 걸 하기로 했어요.”
고음으로 가창력을 뽐내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잘하는 걸 하기로 했다는 설아.
그녀는 결국 클라이맥스를 넘기고 그 외 모든 부분을 자신이 차지한 셈이었다.
설아가 방향을 바꾸자 상대가 제안한 선곡과 파트배분 역시 모두 설아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다.
상대는 물론 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런 거였겠지만 어쨌든 조금 안쓰럽긴 하다.
“엥? 푸하하하 장기자랑을 보이콧했어?”
설아가 설명하는 사이에 노래가 끝나고 각 출연자의 장기를 보이는 시간이었는데 설아가 MC의 제안을 거절하며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설아가 장기자랑을 거부하자 패널들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설아는 꿋꿋했고 MC는 웃으며 이 돌발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아! 초승달이 2라운드에 올라야만 장기를 보여준답니다. 이분의 장기를 보려면 2라운드가 돼야 할 거 같습니다.]
화면 속 설아가 MC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자 그가 신나서 설아의 말을 패널들에게 전달했고 패널 중 터줏대감 격인 현동이 그런 설아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만하네요.
이거 그러다가 장기를 보여주지도 못하고 집에 가는 수가 있어요.]
현동에 말에 설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고 MC가 신나게 웃으며 다음 진행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사전에 설아와 MC 사이에 조율이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뭘 하려고 1라운드 때는 장기를 안 보여준 거야?”
“헤헤, 그건 다음 주에 확인해 보시죠.”
[….. 이 대결의 승자는~~~~~ 57대 42! 15표 차이로 “노래하는 초승달”이 이겼습니다!]
예상대로 승자는 설아였다.
그리고 승자인 설아는 자리를 피하고 패자인 붉은 태양이 자신의 2라운드에서 부를 곡을 준비하고 있었다.
붉은 태양이 2라운드에 준비한 곡은 빠른 템포의 댄스곡이었다.
화려하게 춤을 추며 음정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연습량이 대단해 보였다.
“저건 빼 박으로 아이돌이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저 사람 그 누구냐? 릴리걸스에 메인보컬. 그 사람 같은데.
듀엣곡을 부를 때는 몰랐는데 혼자 부르니 딱 알겠네.”
태준이 꼭 집어 한 아이돌 그룹을 이야기하자 수연은 의외라는 듯이 태준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오호. 윤태준 은근히 여돌 노래를 좀 듣나 보다?”
“에이. 솔직히 시커먼 남자애들 노래보다야 낭랑한 여돌 노래가 낫지.
그냥 대충 오고 가면서 기분전환 할 때 듣는 거야.
내가 걔들이 좋아서 듣겠냐?
그냥 노래가 들을 만해서 듣는 거지.”
수연의 어조가 낮아지자 태준이 서둘러 변명하지만, 수연의 눈빛 속에 숨어있는 의심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민수는 이렇게 사소한 일로도 커플의 말다툼이 시작될 수 있구나 싶어서 흥미진진하게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슬쩍 설아를 보니 설아 역시 흥미진진하게 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기대에 무색하게 둘의 다툼은 거기서 끝이었다.
“뭐 좋아. 나중에 보자 윤태준.”
민수는 다툼을 그대로 끝내버린 수연의 분별력에 아쉬움을 느꼈다.
다른 커플이 투덕거리면서 어떤 식으로 말다툼을 하는지 알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면 속에서는 붉은 태양이 가면을 벗고 정체를 공개하고 있었다.
“와 맞네. 릴리걸스에 “리아”네.
윤태준 제법인데.
진짜 맞추다니. 정말 여돌 노래를 많이 들었나 봐.”
민수의 착각이 아니라면 저건 분명 아까 했던 대화에 연장선에 있는 이야기였다.
분명 수연이 나중에 보자고 하고 끝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아. 맞네 “리아”
그런데 릴리걸스면 RD 엔터 간판이잖아.
쟤도 노래 실력 하나는 알아준다고 하지 않았나?”
태준은 능숙하게 말을 돌려버렸다.
대화의 주제를 자신에서 바로 화면 속 리아로 돌려버린 것이다.
민수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는 태준의 태도에 마음속으로 감탄을 느꼈다.
저런 건 자신도 배워야 할 거 같았다.
태준이 말을 돌리자 수연도 말을 받아 주고 결국 주제가 바뀌게 되었다.
왠지 수연이 그냥 넘어가 주는 분위기였다.
아마 민수가 기대하던 2차전은 단둘이 있을 때 벌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여자 아이돌 노래를 듣는다고 타박한 수연도 좀 너무하긴 했다.
“맞아. 릴리걸스면 RD 엔터의 간판이지. 참 RD랑 우리는 확실히 악연이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