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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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 오빠.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설아는 자신의 상큼한 미소를 보고도 민수의 태도가 왠지 미지근해 보이자 조금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뭐에요? 이 반응은.
적어도 웃으면서 반겨 주실 줄 알았는데요.
이러시면 제가 조금 서운해요?”
조금 멍하게 있던 민수는 설아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아니에요 설아 씨. 반가워요. 석 달 만이죠. 우리.
잘 지내셨어요?”
민수가 정신을 차리고 그제야 웃으며 자신을 반겨주자 다시 웃음을 찾은 설아는 지금 이보다 더 잘 지낼 수는 없다며 즐겁게 자신의 근황을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아가 출연한 드라마 “미스 신데렐라”는 30%를 목전에 둔 29%의 시청률을 기록 중이었고 최종화까지 계속 시청률이 오른다면 충분히 시청률 30%를 돌파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심지어 설아가 맡은 “제니”는 처음에는 씬 스틸러 조연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어엿한 주연급 조연이 된 상황이었다.
제니의 비중이 늘어난 것은 역시 캐릭터의 인기 때문이었다.
걸크러쉬한 느낌을 가진 데다가 시원한 일침을 날리는 제니는 사이다 같은 캐릭터로 점점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기 시작했고, 자신이 신경 써서 만든 제니에 큰 애정을 품고 있던 작가는 제니에 대한 반응이 좋아지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제니의 비중을 늘려간 것이다.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려 생겨난 일이지만 그 출발은 설아의 훌륭한 연기였으니 설아의 연기가 작가의 의도와 맞아떨어지지 않았으면 이런 혜택도 없었을 것이다.
설아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제 주제는 민수의 영화와 태준의 영화로 넘어갔다.
태준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법정 스릴러 “일리걸”은 예산이 많이 들어간 영화는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배우들의 출연료가 제작비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한국 영화라고 뜻이었다.
이런 영화는 시나리오가 좋고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준다면 충분히 쏠쏠한 이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영화 제작자들은 쓸데없이 돈이 많이 들어가는 액션 영화보다 이런 영화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확실히 괜찮은 거 같아.
조연으로 나오시는 선배님들도 연기를 잘하시고, 난 당연히 연기를 잘하니까 말이야.
원래 시나리오만 보고 들어간 영화인데 감독님도 시나리오대로 잘 찍고 계시니 아마 흥행도 나름대로 괜찮지 않을까 싶어.”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연기력이 흥행의 관건인데 태준이 자신 있어 하는 것을 보니 아마 저 영화도 나름대로 흥행에 성공할 거 같았다.
“그래서. 윤 배우 영화는 언제 나오는 거야?”
“이제 막바지야. 생각보다 진행이 빨라.
이대로면 11월 말에는 촬영이 끝날 거고 12월에는 개봉할 수 있을 거야.”
10월에 촬영을 시작한 태준의 영화도 생각보다 촬영이 빨리 진행되었는지 이미 촬영이 막바지라고 하니 저 남매는 12월에는 한가하게 한 해를 마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태준의 경우에는 아무리 자신이 한가해도 수연은 12월에 한창 촬영에 바쁠 테니 아무 의미 없지 않을까 싶었다.
“정 배우 쪽은 어떤데? 개봉 예정이 언제야? 설마 우리 영화랑 겹치는 것은 아니겠지?”
“아, 그건 아니야. 아무리 빨라도 3월이라고 하네.
이 영화도 CG로 덮어야 하니까 말이야.
세트장 봤지? 그런 곳에서 촬영했으니 배경은 완전히 CG로 바를 수밖에.”
“아 맞아요. 세트장.
거기 세트장이 그렇게 크다면서요?”
세트장 이야기 나오자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 설아는 민수의 영상에서 보았던 세트장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아 보였다.
“네. 정말 크죠. 그런데 그 세트장은 큰 게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영화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100% 중국에서 촬영을 마쳤어요.
진짜 중요한 건 바로 이거죠.”
“그러네. 그 말은 결국 배경이 미국이든 중국이던 일본이든 그곳에서 촬영하고 CG만 박아 넣으면 촬영할 수 있다는 말이니까.”
“어. 게다가 이번 영화에서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유럽풍의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거리가 따로 있어. 거기서 찍으면 유럽풍의 영화까지 촬영할 수 있을 거야.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지.”
“확실히 모든 건물을 CG 작업을 전제로 해서 만들었다는 건 의미가 있어.”
“헤… 대단하네요. 그건. 우리나라도 그런 세트장이 있으면 좋겠는데 역시 그건 힘들겠죠?”
세트장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도 그런 게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마무리되었고 태준과 설아는 민수가 중국에서 받은 대우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민수를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할리우드급 대우를 제대로 받은 셈이네….
그런데 진짜 이대로 할리우드로 가는 거 아니야?”
태준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민수의 옆구리를 쿡쿡 쑤셨지만 민수는 그냥 작게 쓴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기자들도 그렇고 태준도 그렇고 할리우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2000년대 후반이 되면서 한국 배우들이 종종 할리우드에 도전한다고 떠났지만, 아직 누구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그런 추세는 아마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아시아 시장의 티켓팅 능력을 고려해서 적당한 배역들을 맡게 되는 배우들은 종종 등장하지만 정말 연기력이나 스타성으로 주연을 꿰찬 배우는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도 물론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고 이번에 촬영한 영화가 할리우드에 인사하게 되면 자신에게 적절한 배역을 맡기려고 접근하는 감독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민수는 결코 그런 이유로 할리우드에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사람들은 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우선 그렇게 할리우드에 나가고 여러 배역을 맡으면서 점점 영역을 넓혀가면 결국 할리우드에 제대로 몸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민수도 그런 사람들을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건 정말 대단한 노력과 끈기가 필요한 일이었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배우가 있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열정을 가진 배우이기 때문이다.
다만 민수에게는 그런 로망과 열정이 없을 뿐이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당장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별다른 수가 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글쎄. 사실 이번 영화가 에릭 감독님의 이름을 등에 업고 나름 좋은 성적을 거둔다고 해도 내가 할리우드에 나갈 일은 없을 거야.
만약 날 원하는 감독이 있다면 그건 중국 시장에서 써먹을 나를 원하는 것일 테니까 말이야.
난 그런 일에 내 열정을 투자하고 싶진 않아.”
“그건 또 너무 비관적인 말이네…..”
“비관적이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솔직히 아직 할리우드는 동양인 배우를 받아들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그게 남자배우라면 더더욱 그렇고 말이야.
그러니 내가 왜 할리우드를 신경 쓰겠어?”
태준은 민수의 뜻이 생각보다 확고해 보이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배우라면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것이 꿈과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어떤 배우 누구에게 물어봐도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저렇게 단호하게 거절한다고 말하는 배우는 없을 것이다.
할리우드와 영화에 대한 조금 심각한 이야기가 끝나자 그들은 조금 가벼운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가벼운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들이 이어지면서 웃고 떠드는 시간 동안 태준은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민수의 눈이 계속 설아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은 설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의 눈을 슬쩍 피하던 민수가 분위기가 풀어지자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느낌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황당한 것은 민수였다.
처음 멀리서 걸어오는 설아를 보면서부터 자신이 좀 이상해진 거 같았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자신의 의지대로 시선을 돌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설아의 눈을 피할 수 있었는데 이야기가 진행되고 설아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자 눈이 자연스럽게 설아를 향했다.
눈을 돌리고 다시 가고 다시 의식적으로 돌리면 또 자연스럽게 눈이 가고, 도대체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냥 계속 보고 싶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태준은 왠지 지금 자신이 빠져줘야 할 거 같았다.
민수가 반갑긴 하지만 오늘만 날은 아니니, 더 이상 친구의 청춘사업을 방해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상대가 아무리 자신의 동생이라도, 아니 흉악한 자신의 동생이기에 빨리 저 괴수를 친구가 거둬 가 주기를 바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친구가 아직 저 괴수의 실체를 모를 때 수거해 가는 것이 베스트였다.
지금은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있지만 언제 들킬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지금까지 설아가 민수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보면 저 내숭이 그렇게 쉽게 발각될 거 같진 않았지만…..
“아. 난 내일 촬영 때문에 먼저 들어가 볼게.
둘이 좀 더 대화 나누고 있어.
그럼 바이~”
마음의 결정을 내리자 태준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자신의 인사를 받은 민수의 눈은 다시 설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슬쩍 웃은 태준은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했다.
“아이고. 친구야. 가긴 뭐가 너무 가.
이 사람아. 원래 올 때는 자네 마음대로지만 갈 때는 아니란 말도 못 들어 봤나.”
태준이 떠나고 민수와 설아의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둘러쌓고 있었다.
민수와 설아가 서로를 바라보고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삶이란 충동의 연속이라 했던가.
민수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설아의 머릿결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부드러운 머릿결을 감상할 틈도 없이 바로 설아에게 다가가 입술을 포개었다.
설아도 민수가 갑자기 그렇게 나올지 몰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키스도 아닌 가벼움 입맞춤이었지만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수 초 동안 짜릿함을 느낀 민수는 천천히 설아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 보고 싶었어요. 정말.”
설아는 조심스럽게 말하는 민수의 태도에서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수줍게 설아를 바라보던 민수는 멋쩍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나중에 봐요. 설아 씨. 촬영 잘하시고요.”
설아는 자신에게 입맞춤을 날라고 부끄러워 도망가는 민수를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귀여운 짓이었다.
설아는 처음에 민수가 연락을 당분간 자제하자는 말을 듣고 솔직히 짜증을 참기 힘들었다.
아예 못 보는 것도 서러운데 연락까지 하지 말자니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싶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민수였기 때문에 자신이 이해하기로 했다.
역시 참는 자에게 복이 있는 법인지 석 달 만에 만난 민수는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랐다.
물론 처음에 자신을 멍하게 바라볼 때는 민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마 자신을 잊어버렸나? 내가 그렇게 쉽게 잊힐 얼굴은 아닌데.
그럼 혹시 Out of Sight, Out of Mind?
하지만 조금 이야기를 해보니 그건 아닌 거 같았다.
그럼 몇 달 안 봤더니 새삼스럽게 예뻐 보이나? 그거 땡큐지.
하지만 갑자기 자신에게 입 맞추는 걸 보니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항상 같이 있던 사람을 한동안 못 보게 되면 감정이 솟구치는 경우도 있다는데 저 오빠가 지금 그런 거 같았다.
순간 자신에게 입 맞추는 민수의 돌발 행동에 설아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거부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입을 벌리는 건…..
솔직히 그건 좀 너무 하지?
그래서 선택한 것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저 오빠 성향을 생각해보면 이번에는 그냥 이걸로 끝일 것이 분명했다.
역시 예상대로 저 오빠는 가볍게 입맞춤을 한 후에 후속 조치 없이 바로 떨어졌다.
그리고 가볍게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은 그의 속마음을 바로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설아는 이 순간 자신이 3개월 동안 민수를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보상을 확실히 받은 기분이었다.
만약 설아가 지금 민수가 날린 입맞춤이 민수 인생 60년을 통틀어 첫 입맞춤임을 알았으면 완전히 횡재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민수.
그는 진정한 이 시대의 마지막 초 대마도사였다.
그가 지금 엄청난 신체 능력을 가진 것도 단순히 신에게 능력을 얻어서가 아니라 60년 동안 기를 모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충동적으로 입맞춤을 날린 민수는 자신의 방에서 이불을 걷어차면서 후회를 하고 있었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
민수는 내일 설아를 어떻게 봐야 할지 쓸데없는 고민을 하면서 억지로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