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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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까지 촬영을 마치자 남은 것은 자잘한 장면들이나 조금씩 수정이 들어가야 하는 장면의 보충이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생각보다 감정 표현이 많았던 피터의 촬영분이 가장 많았는데, 자신의 촬영분이 없었던 민수는 옆에서 스티븐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표정 연기의 여러 가지를 조언해 주었다.
드디어 영화의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민수는 한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에릭 존스 감독을 만나러 갔다.
중 후반부터 촬영에 염증을 느낀 것은 순전히 민수의 문제였을 뿐이고 에릭 감독은 항상 촬영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준 사람이 에릭 감독이기 때문에 마지막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 에릭 감독을 찾아간 것이었다.
“오! 자네 왔는가? 이제 바로 한국으로 돌아간다지?”
“네 감독님. 수고 많으셨네요.”
“수고? 글쎄…. 내가 무슨 수고를 했나 싶은데……
솔직히 지금까지 영화를 찍으면서 이렇게 편한 적은 없었어.
내가 바라는 대로 배우가 바로 연기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넌 정말 괴물 같은 녀석이야.
도대체 어떻게 너 같은 녀석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에릭 감독은 자괴감이 조금 포함된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민수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죠?”
“그래. 녀석아. 칭찬이다.
수고 많았고 나중에 개봉할 때나 다시 보자꾸나.”
“개봉은 언제쯤 가능한 건가요?
원래 계획은 내년 봄이라고 들었는데요.”
“원래 개봉 계획은 4월이었어.
영화를 찍을 때마다 항상 일정이 밀려왔기 때문에 넉넉하게 잡은 건데 촬영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으니 일정을 조정해야 할 거 같구나.
천루 쪽 하고 다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만 아마 3월쯤이 될 거다.
그럼 그때 다시 볼 수 있겠구나.
스케줄은 확정되면 소속사 쪽으로 바로 보내 주마.
그때까지 잘 지내거라.”
에릭의 말대로 에릭의 영화는 지금까지 항상 일정이 밀려왔다.
항상 과격한 액션을 연기 해야 하는 배우가 촬영 일정을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인데 민수는 계획보다 더 빨리 촬영을 마쳐버렸으니 생각보다 많은 시일을 당기게 되었다.
하루 이틀 정도면 몰라도 결과적으로 한 달이나 시일이 당겨졌으니 결국 개봉 일정의 조정이 불가피했다.
“네. 감독님.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번 영화가 좋은 기억으로 남을 거예요.”
진지하게 감사를 전하는 민수를 보며 에릭도 푸근하고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도 즐거웠다.
신기한 경험이었으니 말이야.
조심히 들어가거라.”
에릭 감독과의 마지막 인사는 매우 담담했다.
아직 영화가 개봉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다시 볼 날이 남았기 때문이다.
에릭은 민수를 보내면서 나중에 민수를 다시 볼 때는 즐겁게 축포를 터트리며 회포를 풀게 되기를 기대했다.
에릭 감독에게 작별 인사를 전한 민수는 다시 한국으로 떠난 채비를 시작했다.
같이 촬영을 이어가며 이제는 정이 들어 버린 스티븐이 그런 민수를 바라보면서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Boy. 재미있었어.
나중에 또 볼 수 있겠지?”
짐을 다 챙긴 민수도 자신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 있는 스티븐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었다.
“그래. 우선 영화가 개봉하면 중국에서 시사회를 하겠지.
그리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른 영화에서 볼 수도 있는 거고.”
“그랬으면 좋겠군.”
“스티비. 넌 정말 대단한 액션 배우가 될 거야.
그러니 그때가 되어도 날 잊지는 말라고 친구.”
스티븐은 민수의 확신에 찬 예언(?)을 듣고도 그냥 헤어지면서 으레 하는 덕담쯤으로 생각하고는 실없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래 친구. 말이라도 고마워.
조심해서 가고 나중에 보자고.”
스티븐과 인사를 나누고 호텔을 떠나던 민수는 뒤를 돌아 자신이 석 달 동안 머물렀던 곳을 다시 한번 둘러 보았다.
시간은 석 달 밖에 안되었지만 나름 정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간사한지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당장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는데 막상 떠난다니 또 조금 마음이 울적해졌다.
민수는 이곳을 떠나며 이번 영화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이번에 영화를 찍으면서 에릭 감독과 작업하며 온갖 다양한 액션 연기를 다 경험해 봤다.
그리고 중국의 전설 린 샤오 메이의 어린 모습을 직접 지켜보고 미래의 액션 스타 스티븐도 알게 되었으니 얻은 것이 제법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시간은 벌써 민수가 중국으로 떠난 지 3개월이 지난 11월 중순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고 한국의 공기를 만끽하던 민수는 소속사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은 동원에게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네? 기자들이요? 기자들이 왜요?”
민수는 중국에서 연락을 끊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몰랐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민수에 대한 관심이 매우 뜨거웠다.
한국에서 차기작 선택을 미루더니 느닷없이 할리우드 감독인 에릭 존스와 차기작을 찍는다고 발표한 데다가 민수가 소속사 홈페이지에 촬영 영상까지 남겼기 때문이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해외 진출, 특히 미국이나 유럽에 진출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특종이 되는 한국사회의 특징상 민수의 이런 행보는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만약 민수가 최근에 인터넷에서 자신의 이름을 한 번만 검색해 봤으면 이런 분위기를 대충 알았을 텐데 항상 설아의 이름만 검색해서 이 사실을 전혀 몰랐으니 참 민수스럽긴 했다.
“아….. 그래요? 생각도 못 했네요. 음….
그럼 어쩌죠? 기자들이 많이 모였으면 혼잡하지 않게 짧게 인터뷰라도 해야 할까요?”
“아니요. 배우님 저쪽에 소속사에서 미리 기자회견 장소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이미 기자들은 거기서 기다리고 있고요.”
당연히 한국에 있는 소속사는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지만, 이걸 특별히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민수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굳이 원하지 않는 스케줄을 추가로 만들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민수가 가능하면 조용히 입국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자들이 민수의 입국 사실과 입국 예상 시간을 알게 되자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모여들면 그냥 피해 오기는 쉽지 않았고 너무 피하기만 하면 또 기자들에게 안 좋은 이미지만 심어주게 되니 적당한 대응은 해줘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민수를 위해 소속사가 미리 나와 친히 자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으면 제대로 하라고 멍석을 깔아준 셈이었다.
“아….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았대요?
소속사에서 그런 정보를 흘릴 리가 없는데 참 신기하네요.”
민수의 의문은 정당했다.
윤 엔터에서 민수가 조용히 들어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고 윤 엔터 직원들의 충성심(?)을 생각한다면 소속사 쪽에서 정보가 샐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게 중국 쪽에서….”
동원의 말을 들어보니 촬영이 끝나고 “리 얀”이 중국 쪽 언론에 영화 촬영이 별문제 없이 잘 끝났다고 알렸고 그 사실을 전해 들은 한국 기자들도 민수가 조만간 귀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민수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던 기자들은 중국 쪽 정보통으로부터 민수가 숙소를 떠났다는 정보를 입수해 오늘 중에 귀국한다는 결론을 내고 지금까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아… 리 얀이요? 그나저나 기자님들 참 대단하네요.”
“리 얀”이 언론에 영화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아마 천루 쪽의 지시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 영화 흥행을 위해 지금부터 조금씩 밑밥을 푸는 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정말 대단한 것은 기자들이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머물던 중국 호텔에서 자신이 떠나는 것을 포착했다니 역시 기자들의 특종을 향한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다.
“어쨌든 저 때문에 모인 분들이니 적당히 대접해 드리긴 해야겠네요.
다행히 천루 쪽에서도 영화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은 다 말해도 된다고 했으니까요.
이게 무슨 극비도 아니고, 가죠.
기자회견이라니 예전에 고소당한 이후로는 처음이네요.”
민수가 작게 설치된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서자 생각보다 많은 기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 민수가 미디어에 잘 얼굴을 내밀지 않은 것과 할리우드 감독과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많은 기자를 불러모은 것이다.
기자 회견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기자들도 흔치 않은 기회를 엉뚱한 질문으로 날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민수가 지금까지 행해왔던 여러 가지 행동들을 미루어 볼 때 괜히 자극해 봤자 자신들에게도 별로 득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번 영화로 할리우드로 진출하시는 겁니까?”
역시 기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할리우드 진출 여부였다.
하지만 민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었다.
“아니요. 영화가 미국에서도 개봉하긴 하지만 할리우드 진출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어디까지나 중국에서 상영할 목적으로 촬영한 영화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냥 감독이 에릭 존스인 중국 영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할리우드에 대한 대답이 마치자 뒤이어 영화와 에릭 존스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정민수 씨 단독 주연이라고 들었는데 어떤 계기로 주연 배우로 발탁 되신 겁니까?”
“에릭 존스 감독은 배우에게 과격한 액션을 요구하는 감독으로 유명한데요.
혹시 촬영 중에 별다른 애로사항은 없었나요?”
“개인 영상으로 중국의 거대 세트장을 촬영하셨는데요. 앞으로 중국 영화가 어떤 식으로 발전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영화의 한국 개봉이 계획되어 있습니까?”
“영화의 출연한 대가로 어머 어마한 개런티를 받았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할리우드 스태프가 촬영하는 영화와 한국에서 촬영하는 영화는 어떤 점이 가장 다르던가요?”
영화에 대한 질문부터 시시콜콜한 질문까지 기자들의 질문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기자회견이 마친 후에는 체력이 강하다고 자부하던 민수도 녹초가 되고 말았다.
신체적인 피로와는 상관없이 정신적인 피로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수는 가능하면 자세하게 기자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했는데 엉뚱한 기사를 싣는 기자는 없을 것이다.
제법 많은 시간을 기자회견에 투자한 민수는 결국 저녁이 되어서야 소속사 위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이 제법 되었지만, 소속사는 조용했다.
동원에게 물어보니 배우들이 다 촬영에 나서서 늦은 밤이 되어야 돌아오기 때문이란다.
설아는 이제 막바지에 이른 드라마 촬영에 한창 바쁜 시기였고, 태준도 영화 촬영에 한창이었다.
그리고 수연과 혜민마저 드라마 촬영을 시작했으니 소속사가 조용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결국 민수가 소속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된 사람은 윤 대표와 민 여사였다.
대표실에 들어선 민수는 소파에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윤 대표와 민 여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저 부부도 항상 붙어 앉아 있는 것이 사이가 참 좋아 보였다.
항상 서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정말 사이좋은 중년 부부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마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대표님. 여사님 잘 지내셨어요?”
“어머…. 사고뭉치 이번에는 별 사고 없이 잘 다녀왔니?”
민 여사님은 평소와 같은 사근사근한 억양으로 민수를 반겨 주었다.
“이번에는 사고를 쳤다기보다는 막았다고 하더군.
건물에 매달린 배우 하나를 구한 모양이야.
그래. 잘 다녀왔느냐? 수고했다.”
윤 대표도 촬영 전에 발생했던 사고에 대하여 들었는지 민수가 스티븐을 구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민 여사는 윤 대표의 말을 듣고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민수를 바라보았다.
민수는 자신이 사고를 친 것도 아닌데 민 여사의 그런 눈빛을 받는 것은 조금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민 여사에게 불만을 표시할 생각은 없었다.
미래의 설아 보는 듯한 얼굴에 묘한 카리스마를 가진 민 여사는 민수가 상대하기에 너무 벅찬 상대였기 때문이다.
중국 촬영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에 대하여 한참 이야기한 후 윤 대표는 민수에게 정산 자료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이번에 중국과 일본에서 얻은 영화 수익이다.
그리고 네게 돌아갈 몫은 이 정도고 말이야.
영화 수익하고 일본에서 판매된 DVD 그리고 저번에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찍은 CF와 행사비까지 모두 포함된 금액이야.”
민수는 “용의 울음”과 “용명”의 중국과 일본에서 얻은 이익이 상상 이상이라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게다가 민수 앞으로 떨어진 금액도 예상 밖이었다.
“이거…. 엄청 많네요. 허허…..”
“그러게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많긴 하구나.
해외 진출에서 얻는 비용은 투자자와 주연 배우에게 배분한다고 했잖니.
덕분에 나도 체면이 좀 섰단다.”
아마 윤 대표가 말한 체면은 민 여사에 대한 체면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에 해외 수입까지 더하니 진짜 강남에 큰 빌딩을 세울 정도의 금액을 민 여사에게 배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