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4
영상의 주인공은 설아와 혜민이었다.
영상 속에 설아와 혜민은 귀여운 토끼 머리띠를 쓰고 손을 흔들며 민수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민수 오빠. 해외 촬영 중에 몸은 건강하신가요?
음식은 몸에 맞으세요?
설아가 항상 오빠를 걱정하고 있답니다.
건강하게 무사히 촬영 마치고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민수 오빠. 보고 싶어요! 빨리 돌아오세요!]
민수에게 인사를 건넨 둘은 영상이 재생되는 2분 정도의 시간 동안 계속 덩실덩실 귀여운 춤을 추고 있었다.
민수는 영상이 재생되는 동안 이게 도대체 뭔가 싶어 어이가 없었다.
영상은 정말 귀여웠고 그래서 기분이 엄청나게 좋아졌지만 왜 갑자기 이런 게 날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민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영상을 재생해 보았다.
민수의 눈이 매의 눈이 되어 영상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우선 촬영 장소는 소속사 연기 연습실이었다.
그리고 출연 인물은 혜민과 설아.
우선 혜민이는 귀여운 토끼 머리띠에 토끼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저 의상은 아마도 동물 잠옷이 분명했다.
예전이라면 저 옷을 보고 혜민이가 평소에 입고 자는 잠옷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새롭게 알게 된 혜민의 성격을 미루어 보면 저것은 분명히 이 영상을 촬영하기 위하여 새롭게 사들인 잠옷일 것이다.
그리고 설아.
처음에는 당황하고 어이가 없어서 잘 안 보였는데 냉정을 찾고 자세히 살펴보니 설아가 입고 있는 옷은 무려 버니걸 의상과 비슷한 옷이었다.
그리고 버니걸 형식의 의상이 가지는 특징은 역시 야하다는 거였다.
몸의 굴곡이 매우 잘 드러나고 게다가 은근슬쩍 노출도 상당했다.
평소에 설아가 저런 옷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으니 저것도 분명 따로 구매한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 참…. 좋긴 한데 말이야….”
귀여운 혜민이와 어여쁜 설아의 깜찍한 댄스 영상.
분명 민수에게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었다.
그러니 이유를 모르니 조금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뭘까….. 설아 씨와 혜민이가 저런 옷을 따로 사서 나에게 저런 영상을 보낸 이유….”
단순히 자신이 설아와 연락을 잠시 끊은 것에 대한 무언의 시위?
그렇다면 왜 혜민이가 같이 있을까? 혜민이…..
생각의 고리가 혜민에게까지 이르자 이 영상에 왜 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설아와 혜민은 지금 자신이 혜민이가 아역배우로 데뷔하는 사실에 마음이 상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따로 연락이 안 되니 제 마음을 풀어줄 방법이 없었고, 혜민이까지 동원해서 저런 영상을 찍게 된 것이다.
“아니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았지?
여기서 설아 씨한테 그런 야이기를 해줄 사람이…….설마 누군가 스파이가?”
민수는 순간적으로 자신 주변에 설아의 끄나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에 혜민의 일을 들었을 때는 조금 화가 났었다.
하지만 그 대상은 점점 변해갔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아무 말해주지 않은 식구들이었지만, 점점 혜민에게 무신경했던 자신으로 옮겨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제 거의 잠잠해진 상황이었다.
린이 즐겁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니 혜민이도 저렇게 연기를 하면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수정의 말처럼 혜민이가 그렇게 어른스럽다면 혜민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혜민의 일은 이제 잠잠해졌지만 스파이의 일은 이야기가 달랐다.
자기 일이 숨김없이 설아에게 전해지는 것은 조금 위험한 일이었다.
물론 자신이 특별히 엉뚱한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프라이버시란 것이 있지 않은가.
민수는 마치 영화 속의 조 가 된 것처럼 냉정하게 상황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 중국 땅에서 설아에게 그런 정보를 줄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자신의 매니저 이동원.
그리고 코디 겸 스타일리스트 겸 팬클럽 회장 조수정.
둘을 놓고 봤을 때 과연 누가 설아의 끄나풀일까?
해답은 너무나도 쉽게 나왔다.
정답은 당연히 조수정.
우선 여성이기 때문에 설아가 접근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수정은 소속사 내에서 은근히 마당발이고 붙임성이 좋았다.
게다가 지금까지 수정의 행동 양식을 돌이켜보면 설아가 부탁했을 때 수정이 거절하는 그림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아마 바로 콜을 날리고 자신의 행동을 다 설아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범인을 수정으로 확신한 민수는 다음에 촬영 전에 수정에게 적절한 경고를 전달하기로 하고 다시 영상을 재생하였다.
역시 귀엽고 예쁘다.
다시 보니 설아의 율동은 귀엽기도 했지만, 은근히 관능적인 느낌도 자아내고 있었다.
영상이 재생되는 동안 민수는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후…….”
영상을 보자 민수는 설아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지금 바로 전화를 하면 그녀와 통화를 할 수 있었지만 민수는 억지로 참아냈다.
민수가 설아와 연락을 끊기로 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설아 때문이었다.
첫 드라마 촬영.
저번처럼 안면 있는 사람들하고 찍는 것이 아니었고 설아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민수는 설아가 촬영에 집중하기를 바랐다.
드라마에만 집중하고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연락을 끊은 것인데 자신의 정보를 입수해 이런 영상을 보내는 것을 보니 왠지 자기 생각이 틀렸나 싶었다.
자신은 분명 첫 드라마에 들어가 촬영을 시작했을 때 그 환경에 적응할 때까지 주변을 전혀 돌아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설아는 이런 걸 보낼 정도로 여유가 있는 모양이니 참 대단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촬영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기도 했다.
“차라리 연락해서 물어볼까? 아니지…..”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참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뒤숭숭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민수는 설아가 자신과는 달라서 혼자서 집중하는 것보다 민수와 연락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민수는 혼자 외로움을 참으며 엉뚱한 짓을 하는 셈이었다.
다음날 촬영이 시작되기 전 민수는 수정을 불러 은근히 떠보는 말을 건네었다.
“수정아. 요즘 소속사 식구들이랑 따로 연락하고 지내니?”
요즘 에릭 감독이 데려온 스타일리스트들이랑 어울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던 수정은 민수의 말에 바로 고개를 저으며 자신은 요즘 바쁘다고 으스댔다.
“요즘 저 엄청 바쁘거든요. 배우 오빠.
그리고 따로 소속사에 연락할 이유도 없고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수정이 사실을 부정하자 민수는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정인데 수정의 반응은 정말 전혀 모르는 사람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히 주변을 둘러봤을 때 슬쩍 자신의 눈을 피하는 동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동원 씨였어요?”
민수가 너무 기가 막혀 힘 빠진 목소리로 동원에게 묻자 민수의 눈을 피하던 동원은 헛기침하며 모르는 척 이 자리를 피하려고 하고 있었다.
“세상에……”
그리고 옆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던 수정은 두 남자의 어이없는 행동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민수에게 무슨 일인지 캐물었고, 엄한 수정을 의심했던 민수는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찰떡처럼 달라붙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수정의 등쌀에 어쩔 수 없이 사실을 전부 실토할 수 밖에 없었다.
민수의 말을 들은 수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민수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아니, 배우 오빠 날 어떻게 보고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제가 그렇게 의리 없는 여자 아니거든요.
하. 참 기가 막혀서…. 절 의심하다니요.”
“아니… 그게 의리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전 그런 여자 아니거든요. 흥 칫!”
민수가 자신을 의심했다는 사실이 못내 짜증이 나는지 계속 투덜대는 수정을 보며 민수는 계속 그녀를 달래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그래. 내가 미안해. 앞으로 의심 안 할게. OK? 이제 좀 진정하자.”
수정이 겨우 진정하자 이제 민수는 동원에게 변명을 들을 차례였다.
동원은 민수가 자신을 쳐다보자 조금 난감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그게 사실은….. 원래 아리 재단에서 올라온 남자 직원들은 설아 씨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핑계가 아니라 설아 씨가 입만 벙긋해도 알 수 없는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거든요.”
설아의 말 한마디로 재수 없으면 아리 재단으로 끌려가 특별 훈련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에 민수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배우님이 불쾌하다면 제가 앞으로는 설아 씨한테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전 그래도 배우님의 매니저니까요.”
큰 결심을 한 듯 굳은 얼굴로 대답하는 동원의 모습에 민수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동원을 보니 확실히 아리 재단에서 특별 훈련을 받는 것이 상당히 힘든 일인 것 같았다.
“그냥 제가 말하지 말아 달라는 것만 조심해 주세요.
나머지는 그냥 상관없고요.
아셨죠? 부탁드릴게요.”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니 설아랑 연애하면서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면 아무래도 주변의 인물들부터 단속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이게 참 어이없긴 했지만 나름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설아가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궁금해하고 있다는 사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고 자신의 프라이버시는 지켜야 했다.
자신은 이 첩보전에서 반드시 승리하리라.
그러려면 차라리 동원을 잘 구슬려 정보를 교란(?)하는 방법이 제일 효율적일 거 같았다.
설아가 동원만 믿고 안심하게 하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좋아 보였다.
“네. 배우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죄송했습니다.”
동원이 미안한 얼굴로 사과하는 것을 웃으며 받아준 민수는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한편 민수의 사과를 듣고 겨우 마음을 푼 수정은 밖으로 나가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했다.
“응, 설아 씨.
동원 오빠는 들킨 거 같아. 어. 어.
난 안 들켰지.
걱정 마. 난 절대 안 들키니까.
원래 동원 오빠야 금방 들키는 게 당연하잖아.
원체 정직한 사람이니 바로 티가 나니까 말이야.
분위기 보니까 동원 오빠랑 배우 오빠랑 짝짜꿍 될 거 같은데.
어. 알았어!
그렇게 할게. 응 서울에서 봐.”
설아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달한 수정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휴…. 미리 알았으니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당황해서 들킬 뻔했네.
히히, 연기하는 거 그렇게 어렵지도 않네.
나도 연기나 한번 해볼까.”
수정을 웃으며 다시 스타일리스트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설아에게 양질의 정보를 제공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첩보전에서 민수가 설아를 이길 방법은 요원해진 것 같았다.
오늘은 민수와 스티븐이 같이 촬영을 하는 날이었다.
극 중에 스티븐이 맡은 배역인 특무대 소속 “피터”는 유일하게 조의 얼굴을 아는 요원이었다.
그는 예전에 이름 없는 부대에서 조 와 같이 복무하였고, 전우들을 다 배신한 대가로 특무대로 소속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런 피터에게 조의 생존은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고 조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피터는 자신의 배신을 알고 있는 조가 자신에게 복수하는 것이 두려웠고 조가 복수하기 전에 먼저 조를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 후 조의 제거 임무에 자진해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오늘 촬영은 조와 피터가 서로에게 한 번씩 인사차 공격을 주고받는 내용이었는데, 예전에 민수가 어이없어했던 저격을 피하는 정면도 오늘 촬영에 포함되어 있었다.
방금 전에 특무대에 지령을 받고 조를 잡기 위해 출발하는 장면을 촬영한 스티븐은 오랜만에 하는 연기에 조금 흥분된 모습이었다.
“Hey, Boy 드디어 같이 연기하게 됐네.
난 엄청나게 기다렸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거는 스티븐을 보며 민수는 작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봐야 서로 합을 나누는 것도 아니고 멀리서 총질만 하는 건데 뭘…..”
“저런, 이런 각박한 녀석.
오고 가는 총질 속에 피어나는 우리 우정이라는 말도 못 들어 봤어?
액션 배우들은 다 이렇게 총질을 하면서 우정을 나누는 거야.”
민수는 듣도 보도 못한 스티븐의 헛소리에 어이가 없어 피식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OK 좋아. 사이 좋게 총질 한번 해보자고. 물론 오늘 내가 할 것은 총질이 아니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