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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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액션이 시작되면서 에릭과 민수는 여러 번의 의견충돌을 겪었다.
그들이 의견이 서로 어긋나기 시작한 첫 번째 장면은 바로 차량 탈출 씬이 었다.
시내에서 추격전이 발생하고 조를 쫓던 조직원이 조를 멈추기 위하여 조의 차량을 들이받는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밀고 들어오는 트레일러에 조의 차량이 뭉개지고 찰나의 틈에 조가 탈출하는 장면이었는데 논쟁이 된 부분은 어이없게도 탈출 간격이었다.
이 장면을 찍기 전에 에릭이 가장 걱정한 것은 바로 배우의 반발이었다.
근래에는 스턴트맨들도 위험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요구하는 방식으로는 자동차 탈출 씬을 촬영하지 않는다.
저런 극단적인 방법 외에도 컷을 여러 번 끊어가고 CG를 덧붙이면 충분히 안전하게 자동차 탈출 씬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인데, 그런데도 에릭이 이런 위험한 방식으로 이 씬을 찍으려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촬영하면 이 장면을 롱테이크로 한 번에 가면서 더 실감 나게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롱테이크로 가면 충돌 직전까지 조와 트레일러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관객들의 긴장을 강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사실 에릭은 조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긴장감이 너무 떨어질까 봐 걱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이런 장면을 삽입하면서 극 전체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걸 배우들이 허락할 리가 없기 때문에 에릭은 민수를 설득할 만한 근거 여러 개를 들고 만수와 이 장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민수는 에릭이 제시한 첫 번째 근거만 듣고 바로 촬영을 승낙했다.
예상외의 상황에 에릭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그리 길지 않았다.
왜냐하면 민수가 더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하여 충돌 3초 전에 탈출하겠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에릭은 민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에릭은 간이 더럽게 큰 이 배우를 위하여 자신이 탈출 간격을 10초로 결정한 이유를 설명하며 설득해야 했다.
이런 비슷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고, 에릭은 자신이 위험한 액션을 요구할 때마다 더 위험한 액션을 하겠다는 민수를 보며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민수가 주장하는 대로 하는 것이 영화에 조금이라도 좋은 영상을 추가할 수 있는 방법이긴 하지만 영화에 1%더 좋은 영상을 넣기 위하여 배우의 위험성을 50% 높이는 짓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촬영하는 건물 침투 씬에서 민수가 요구하는 것은 보호 장비 없이 안전그물만 설치하고 연기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안전그물은 어차피 CG로 지워지기 때문에 상관 없지만 자신이 보호장비를 차고 있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몸에 주름을 남길 수밖에 없고 나중에 보호장비를 CG 처리하더라도 자연스럽지 않다는 이유였다.
지금까지 항상 민수의 의견을 거절하던 에릭도 이번에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민수의 말대로 옷에 남는 미묘한 주름은 눈썰미가 예리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결점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 진짜 넌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사람 같구나.
도대체 왜 이런 위험한 연기를 더 위험하게 하려는 거냐?
얼마 전에 시티비가 건물에서 떨어지는 걸 바로 옆에서 본 녀석이…..”
민수는 에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웃으면서 그의 말 속에 포함된 오류를 수정했다.
“그거랑 이건 완전히 다르죠.
우선 여기에는 충분히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고요.
또 이 건물은 그 건물하고는 다르게 기본적으로 클라이밍을 전제로 설계되었으니까요.”
민수의 말에 에릭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민수가 전혀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의 말이 대부분 옳았다.
안전그물로 안전은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고 안전장치는 확실히 영화의 영상을 해칠 가능성이 컸다.
“후…. 좋아.
헤이~ 안전그물을 두 겹으로 걸어.
그리고 자네는 최대한 안전하게 해 주게.
안전그물이 튼튼하기는 하지만 일이 어떻게 틀어질지는 알 수 없으니 말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떨어질 일은 없으니까요.”
결국 에릭이 자기 뜻을 존중해 주자 민수는 웃으며 촬영장으로 다가갔다.
“저런 미친놈. 이런 식으로 속을 썩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에릭은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민수를 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세트장 옥상으로 올라간 민수는 아래를 살펴보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 장면에서 민수는 인간 병기로서의 조의 면모를 정말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밀한 기계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일 필요성이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동선을 완벽하게 계산한 민수는 에릭의 사인에 맞춰서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 보았다.
거대한 건물의 옥상 역시 자신을 감각 안에 잡히는 다른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사방을 확인 한 조는 바로 건물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발 한발 아래로 내려가는 조의 몸놀림은 거침이 없었고 움직임에 한치의 군더더기도 없었으며 앞뜰은 산책하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너무나 부드럽고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동작들이 끝나고 조는 자신이 목표했던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목표지점에 도착한 조는 바로 특수한 나이프로 유리창의 구석 부분을 갈라 낸 후, 손으로 유리창을 열어 건물 안으로 쓱하고 사라졌다.
“하…..”
아래에서 민수의 연기 영상을 뚫어지라 살펴보던 에릭은 민수가 건물 안으로 사라지자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민수의 연기는 자신이 생각했던 조의 연기와 완전히 일치했다.
그래서 더욱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원래 사람이 저렇게 군더더기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거였나?
사람이 아니라 그냥 기계가 내려가는 거 같잖아.”
황당하기는 에릭의 근처에서 민수의 연기를 바라보던 스턴트맨들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십 수초 만에 옥상에서 두 층 내려와 건물 침투에 성공한 민수는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빌딩클라이밍을 해본 적도 없는 초보자였다.
스턴트맨 잭슨은 어이없게 웃으며 스티븐 로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헤이, 스티븐.
이제 빌딩 클라이밍 마스터의 자리를 민수에게 넘겨줄 때가 된 거 같아.
저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다니 말이야.
저거 사실은 기계가 아닐까?”
스티븐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단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스티븐은 자신도 저 코스를 타고 내려오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저렇게 아무런 떨림이나 주저함도 없이 길을 걷듯이 자연스럽게 건물을 타고 내려올 자신은 없었다.
스턴트맨들과 에릭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민수가 건물에서 내려와 자신의 영상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가오고 있었다.
웃으면서 다가온 민수는 영상을 확인하고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에릭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된다고 했죠.
이 정도면 충분히 에릭이 원하는 조의 모습대로 잘 연기한 거 같은데요.”
밝게 웃는 민수의 얼굴을 보며 에릭은 할 말이 없어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에릭은 왠지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될 것 같아 입안 가득 에스프레소를 머금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참고로 에릭은 평소에 절대로 에스프레소를 마시지 않는다.
건물에 침투한 조는 서둘러 복도로 나가 건물을 돌아다니는 적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최단 거리로 적 수장이 있는 사장실로 들어가 이 조직의 주인을 제거하는 거였다.
나이프 한 자루와 소음기가 달린 권총.
단 두 개의 무기로 조는 종횡무진 적진을 누비고 다녔고, 이 건물에 있는 어떤 자도 조를 막아 세우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결국 사장실까지 무사히 침투한 조는 상대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조직의 우두머리를 없앤 이후 조에게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모두 차례대로 조의 먹이가 될 뿐.
그렇게 PMC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있던 갱단 하나가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지게 되었다.
민수는 촬영 중에 같이 합을 맞추는 스턴트맨들의 연기를 보며 정말 기분이 좋았다.
원래 스턴트맨을 시작하면 역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맞는 연기, 쓰러지는 연기, 죽는 연기였다.
아마 에릭 존스의 스턴트맨 팀도 그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진짜 실감 나게 잘 죽고 자연스럽게 잘 넘어지는 걸 보니 이 사람들은 역시 진정한 프로였다.
솔직히 예전에 자신이 스턴트맨으로 스턴트 연기를 할 때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잘 죽지는 못하였다.
건물에 침투해 보스까지 사살하는 장면의 촬영이 끝나자 민수는 웃으며 스턴트맨들에게 다가갔다.
“와~ 최곤데요.
지금까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잘 죽는 스턴트맨은 처음 봤어요.”
“그럼. 당연하지.
우린 진짜 프로거든.
이런 액션 영화에 우리 같은 연기자가 없으면 영화 꼴이 엉망이 될 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영화의 숨은 공신이지.”
“하하하. 맞아요.”
민수는 웃으며 스턴트맨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그런데 원래 에릭 존스의 영화는 다 이런 식인가요?
전 솔직히 조가 상대 보스에게 다가가서 이런저런 것들을 막 물어보며 시간을 끌다가 결국 다른 적들이 몰려오고 악전고투를 하며 상대를 죽일 거로 생각했는데, 대본을 보니 그냥 들어가서 쓱 죽이고 끝이더라고요.”
“아 그거.
원래 에릭이 그런 거 더럽게 싫어해.
애당초 이런 곳에 몰래 침투했는데 시간을 끄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런 피라미 하나 잡는데 그렇게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는 거지.
총알 한 방에 그냥 슝~”
“그건 그렇네요.”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렇긴 했다.
그리고 이렇게 조금 억지스러운 영화적 연출을 피하는 것이 에릭 존스의 사실주의 액션에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킥킥, 조심해.
진짜 연기를 못하면 에릭은 주연 배우라도 가차 없이 총알을 먹이고 아웃시켜 버리거든.
전에 배우 하나가 액션이 너무 엉망이라 에릭이 대본을 수정해서 죽이고 보낸 적도 있었어.
근데 그놈이 주연 배우였거든.”
“맙소사….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되긴 주연 옆에 있던 엑스트라 액션 스턴트맨이 그 영화의 바통을 이어받았지.
분량을 적당히 자르고 그때부터 새로운 주연 탄생.
하긴 그걸 주연이라고 보기는 좀 어려우려나….
기존의 주연 배우가 연기한 것이 반. 새로운 주연이 연기한 것이 대충 반 정도?
결국 한 영화에 두 명의 주연이 연달아 연기한 셈이었어.
아마 영화사에 최초로 생겨난 사례였을 거야.
그 스턴트맨이 자네도 잘 아는 스티븐이고 말이야.”
“하….정말 대단하네요.
아마 에릭이 아니면 그런 짓을 하고도 감독 자리를 지킬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얼떨결에 데뷔하다 보니 스티븐은 단독 주연에 조금 목이 말라 있어.
진짜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서 그런 거 같아.
하지만 솔직히 난 이번에 스티븐이 조연부터 연기하는 것이 맞는다고 봐.
아무리 스턴트 연기를 잘해도 제대로 된 배우라고는 할 수 없는 거잖아.
스티븐은 아직 젊으니까 계단을 밟아 올라가듯이 단계를 거쳐도 충분히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어.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는 거지.
그리고 그렇게 배운 경험들이 나중에 분명 큰 재산이 되어 줄 거야.”
스턴트맨의 말에 민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스턴트맨 팀 중에 스티븐을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영화는 어떻게 됐나요?”
민수의 말에 스턴트맨은 웃으며 민수의 어깨를 치더니 한마디만 남기고 떠나갔다.
“뭘 어떻게 돼. 당연히 망했지.
그런 영화를 누가 보겠어? 큭큭큭”
익살스러운 그의 말에 민수도 같이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가 망할 것을 알면서도 주연을 바꿔버린 에릭 존스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민수는 자신의 호텔 방에서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켰다.
중국에서 마땅히 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민수는 결국 과거처럼 일과를 마치면 바로 “힐링 멘토”에 접속하고 있었다.
틈틈이 자신의 팬 카페도 둘러 보고 “힐링 멘토” 내에서 예전처럼 자신의 조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충고를 건네는 그런 생활.
“힐링 멘토”의 회원들은 다시 돌아온 조언 왕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제 조언 왕이 민수라는 사실을 다 아는 회원들은 오랜만에 다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민수를 격하게 반기는 중이었다.
커뮤니티부터 다 둘러본 민수는 자신 앞으로 날아온 대용량 메일을 보고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이건? 동영상인데…..”
민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영상을 다 다운 받고는 바로 영상을 재생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나오자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뭐야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