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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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렇지 않아요 언니.
정식으로 영화에 들어간 이후에는 집중하고 싶다는 핑계로 연락이 끊어진 상황이거든요.”
조금 서운해 보이는 설아의 모습에 수연도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뭐….. 민수답다고 해야 하나.
연기할 때는 가차 없군. 정말.”
“하지만 정말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설아의 표정은 조금 진지해 보였다.
그런 설아의 표정을 확인한 수연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침을 작게 삼키며 덩달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제 소식통에 의하면 지금 민수 오빠가 저에게 조금 삐진 거 같아요.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연락마저 안 되니 더 큰 일이죠.”
“음…. 삐진 민수라니 그건 좀 상상하기 힘든데.
대체 무슨 일이야?”
수연에 말에 한숨을 쉰 설아는 수연 옆에서 조용히 민수의 영상을 보고 있던 혜민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요 귀염둥이 때문이에요.
제가 혜민이가 아역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거든요.
근데 민수 오빠가 그 사실을 알아 버렸나 봐요.”
설아의 말에 수연도 조금 뜨끔한 듯 눈을 크게 떴고 혜민도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당황한 기색이었다.
“자. 민수 오빠가 삐진 건 여러분이 저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니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해결책을 제시해 주세요.”
설아의 말에 수연도 조금 심각해졌다.
우선 삐진 민수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짐작이 불가능했고 자신이 비밀로 해달라고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약간의 책임감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흠…. 어떻게 알았지? 그냥 나중에 딱 하고 놀라게 해주려고 했을 뿐인데….”
수연이 비밀로 하자고 한 것은 별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나중에 드라마에 출연한 혜민이를 보고 민수가 놀라며 반가워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왜 삐질 일이야? 민수답지 않은데.”
하지만 수연은 도대체 이게 왜 민수가 삐질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음… 제 정보통에 의하면 민수 오빠는 아직 어린 혜민이가 연기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불만인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혜민의 나이가 너무 어리니까 이 세계에 몸담기에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확실히 민수 오빠다운 생각이에요.”
“아…. 그런 거야? 그건 생각 못 했는데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이게 그렇게 뒷일까지 걱정해야 할 일인가?
어차피 본인의 인생은 본인이 책임지는 거잖아.
혜민이가 그렇게 생각이 없는 아이도 아니고 말이야.”
“아뇨. 확실히 민수 오빠가 보기에는 혜민이가 어리긴 해요.
우리 귀여운 혜민이가 민수 오빠 앞에서 엄청 더 귀엽게 행동하니까요.”
“윽, 혜민아, 설마 아직도 그러고 있는 거야?”
수연이 어이없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자 혜민도 수연의 눈을 피해 입을 삐죽이 내민다.
“하, 민수가 이런 모습을 봐야 그런 말을 안 할 텐데.”
수연은 혜민이 연기하고 싶다고 했을 때 바로 혜민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그건 수연의 성격이 원체 쿨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평소에 혜민의 행동을 미루어 봤을 때 어린 나이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어른스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약 혜민이가 마냥 어리기만 했다면 수연도 반대했을 것이다.
윤 엔터 식구들과 혜민의 가족들이 모두 혜민의 선택을 지지한 것은 결국 그들은 혜민이가 얼마나 애늙은이같이 성숙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민수만 이 사실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으니 참 애석한 일이었다.
“끙,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우리 혜민 양 왜 민수 앞에서는 평소대로 행동하지 않아서 이런 일을 만들어?”
“그냥 오빠 앞에서는 그렇게 행동이 나오는데 어떡해요?
제가 특별히 내숭 떨고 그런 건 아니에요.”
민수 앞에서는 그냥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오고 천진난만해진다는 뻔뻔한 혜민의 말에 설아와 수연 모두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수연은 뻔뻔하게 나오는 혜민의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설아에게 말했다.
“아우~ 이 뻔뻔한 녀석아.
뭐 어쩔 수 없지 그런 일이라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수밖에.
어차피 연락도 안 된다고 했지?
혜민이가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을 민수가 이해하면 금방 풀어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럴까요? 그런데 9살짜리가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시킬지가 걱정이네요.”
민수의 삐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수연의 모습에 설아는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제 일이 아니라고 수연이 너무 대충 생각하는 거 같았다.
그러니 결국 이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걸까?
“그나저나, 천하의 윤설아가 남자 때문에 고민이라니.
정말 믿을 수가 없네. 원래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여장부였잖아.”
수연의 장난스러운 말에 설아는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돌같이 보면 그냥 돌처럼 굴러가 버리는 남자니까 그렇죠.
민수 오빠한테는 밀당 이런 거 없어요.
적당히 튕기면 아예 저 멀리 튕겨 나가 버릴걸요.
어쩌겠어요?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굽히고 들어가야죠.
그래도 요즘엔 확실히 저에 대한 호감이 많이 느껴져서 기분 좋게 지내고 있었는데……”
수연은 장난스러운 자신의 말을 설아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움찔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설아가 민수를 좋아하고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 그런데 넌 대체 민수가 왜 좋은 거야?
물론 민수가 잘생기기도 했고 전도유망한 배우이긴 하지만 넌 그런 거로 남자를 판단하는 얘는 아니잖아?”
수연의 물음에 설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네요. 왜 좋을까요? 음…..
그냥 처음 본 느낌부터 조금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 왠지 모르겠지만 민수 오빠한테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어요.
이런 말은 조금 이상하지도 모르는데, 뭐랄까….. 상처 입은 짐승 같은 그런 느낌?
그런 아련한 느낌 때문에 처음부터 신경이 좀 쓰였었죠.
그러다 나중에 제 대사 문제를 고쳐줄 때는 사실 운명 같다는 느낌도 좀 들었고요.
그리고 그 후에 주변을 맴돌면서 계속 관찰했는데 점점 좋은 모습만 보이더라고요.
매사에 진지한 모습도 조금 멋있는 것 같고, 제 외모에만 집중하지 않는 모습도 괜찮고…..”
“의외로 확고한 이유가 있었네.
그런데 민수한테 그런 느낌이 있었나?
난 잘 모르겠던데.”
수연은 자신이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을 설아가 느끼고 있는 거 같아 조금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아~ 뭐 지금은 거의 없어진 거 같긴 해요.
처음에는 좀 위태로워 보이는? 그런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 왜 민수 오빠가 어두운 연기할 때 느껴지는 독특한 느낌이 있잖아요?
그게 평소에도 느껴졌다고 하면 언니도 알 거 같은데요.”
“아아…. 그 느낌….. 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네.
그런 느낌이 평소에도 있었다고?
예전에 힘든 경험이 있어서 그런 건가…..”
“뭐. 어쨌든 그래요.
확실히 지금 전 가볍게 생각하고 민수 오빠를 만나는 게 아니거든요.
엄마도 딱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은 물고 놓지 말라고 했었고요.
대부분 처음에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이 그 사람이 맞다고요.
아마 오빠도 언니 물고 안 놓아 줄걸요.”
설아의 말이 재미있었는지 수연은 키득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21살인 주제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설아가 귀여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개니? 물고 안 놓아 주게.
사람 일이란 게 앞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장담을 해.
그나저나 민 여사님도 너랑 민수 사이를 아셔?”
“네, 뭐. 원래 저랑 엄마 사이에는 비밀이 없으니까요.
엄마도 알고 계세요.”
“와 그건 좀 놀라운 일이네. 민 여사님이 별말씀 안 하셔?”
“엄마야 뭐…. 그런 거로 뭐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다만 확실히 지기 전까지 아빠한테는 비밀로 하기로 했어요.
아빠 넘어갈 수도 있다고요.”
수연은 설아의 말을 듣고 민 여사는 확실히 좀 남다른 면이 있긴 했다.
그리고 문득 자신도 민 여사에게 저렇게 쉽게 인정받을 수 있을지 조금 걱정되었다.
원래 딸은 아버지가 신경을 많이 쓰고 아들은 어머니가 신경을 많이 쓴다고 하지 않은가.
대부분의 어머니가 아들과 사귀는 여자를 볼 때 아들을 빼앗기는 기분이 든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그리 쉽지 않을 거 같았다.
“음… 나도 쉽게 인정받았으면 좋겠는데….”
수연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설아는 수연이 하는 말이 어이없게 느껴졌다.
수연은 엄마와 비밀이 없다는 말이 자신에게 국한된 이야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언니. 엄마 벌써 알고 있어요.
말했잖아요. 엄마랑은 비밀이 없다고, 아마 오빠가 예전에 말했을걸요.”
“이 미친 화상이! 진짜!”
설아의 말에 수연의 표정이 뜨악해지고 그녀의 안구가 급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그렇게 수선을 떤 수연은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되는지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설아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그..그래서 뭐라고 하셔?”
설아는 그런 수연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역시 언니도 자기 일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지 못하겠죠 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뭘 뭐라고 해요?
그냥 우리 바보 아들이 사람 하나는 참 잘 건졌구나 하죠.
‘어머 어머, 우리 수연이 맛있는 거 사줘야겠네. 흥흥흥~’
이라고 저번에 말씀하셨던 거 같네요”
설아가 민 여사의 성대모사까지 하면서 이야기하자 수연도 조금 긴장이 풀린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은 잘 풀렸다지만 자신에게 말도 없이 민 여사님께 입을 놀린 태준을 용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마 조만간 태준은 자신의 방종에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리라.
“그리고 언니 제 이야기 가볍게 듣지 마세요.
언니는 이미 물린 거라니까요.
이제 어디 못 가요.
오빠가 언니를 가볍게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닐걸요.”
이미 민 여사까지 알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수연도 상황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심각한 표정의 수연을 바라보며 설아는 지금이 수연의 집중을 끌어낼 수 있는 시기임을 직감했다.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둘이 고민했을 때 더 많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설아는 수연의 분발을 촉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위치를 십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자…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좀 해봐요.
언니, 자꾸 그렇게 나오면 저도 생각이 있어요.
정말 강력한 시누이한테 혼나는 수가 있거든요.
그리고 언니 앞으로도 저랑 계속 운동해야 하는 거 아시죠?
자꾸 이러면 정말 재미없어요.”
수연은 박력 있는 설아의 모습에 삐진 민수의 마음 풀어주기 프로젝트에 힘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혜민은 그런 설아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혜민이 생각하기에 박력 있는 설아의 모습은 확실히 본받을 만한 점이 있었다.
자신보다 한참 언니인 수연을 저렇게 좌지우지할 수 있다니.
솔직히 윤 엔터에서 자신만 민수에게 내숭을 떠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자신보다는 눈앞에 있는 저 설아 언니가 진정한 내숭 여왕일 것이다.
그에 비하면 수연은 확실히 약했다.
쿨하고 털털하게 행동하긴 하지만 정이 많아서 그런지 남들에게 끌려가는 상황이 자꾸 벌어지기 때문이다.
확실히 자신이 보고 배워야 할 사람은 설아였다.
자신이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이 바로 정답이었다.
본격적인 액션 장면들이 이어지면서 촬영장은 확실히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조금의 실수만 있어도 사람이 다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에릭 존스의 영화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원래 배우들은 몸을 사리고 감독은 그런 배우들에게 더 강도 높은 액션을 요구하며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곳 “My Uncle, Joe” 의 촬영장은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오늘 조가 건물 옥상에서부터 아래로 몰래 침투해 갱단 하나를 세상에서 지우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모인 스텝과 배우들은 민수와 에릭 존스 감독의 의견 다툼을 바라보며 한숨짓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그래야 하냐고? 굳이 그럴 이유가 있어?”
“하… 감독님도 잘 아시잖아요.
허리에 끈이 달려 있으면 나중에 지워도 티가 난다는 거.
아래에 안전그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니까요.”
별 것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민수를 보며 에릭 존스 감독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민수를 잠시 동안 바라보기만 했다.